각계 5000명의 추모

‘10.26’ 36주년의 현충원
각계 5000명의 추모
갈수록 박정희대통령의 선각감동


글/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 및 방산담당 비서관

▲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 36주기 추도식 행사가 열렸다. <사진=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신 날이 기억도 생생한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 이었으니까 금년이 서거하신지 36년 째가 된다. 10월 26일에는 매년 국립서울현충원 박정희 대통령 묘역 앞에서 추도식이 열린다. 민족중흥회 주관으로 열리는데 5주기 때부터 열렸다고 한다. 서거 후 당시 정부 (전두환 대통령)에서 추도식을 열지 못하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 10월 26일 오전 서울 동작구 현충로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36주기 추도식에서 추모객들이 묘소로 이동하고 있다. <사진=국립서울현충원>

현충원 추도식의 각계 5000명

신문 보도에 의하면 올해 10. 26에는 정·관계 인사 등 5천여명이 참석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 36주기 추도식을 현충원 묘역에서 엄숙히 거행하였다. 추도식은 구미 생가에서 구미시 주관으로 열리기도 했고 박 대통령이 교사로 근무했던 문경에서도 있었고 모교인 경북사대 부고에서도 열렸다고 한다. 조촐하게나마 관련이 있는 모든 곳에서 추모행사가 다 열렸다.
필자는 박정희 기념사업회에서 다년간 상임이사로 같이 근무했던 세분(이영근·고병우·오휘영)과 함께 그 전날인 25일 11시에 모여 묘역을 참배했다. 필자가 여기서 얘기하고 싶은 것은 10월 26일이 한국의 불세출의 선각자이고 지도자였으며 조국의 선진화에 기초를 닦은 대통령이 서거하신 날을 관련 있는 지역 몇 군데서만 거행해서 되겠느냐 하는 것이다. 현충원 추도식에 모인 5천여명의 인사들은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이다. 거물급 정계인사들은 뭘 겁내는지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를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이나 노무현 대통령의 추도식이 있을 때는 나라 전체가 시끄럽다. 정계 인사들이 다투어 참석한다. 국영 방송에서도 10. 26일에 박대통령의 추도식이 있었다는 뉴스 한 마디도 없었다. 필자가 보는 두 개의 신문 중 하나 만이 단신으로 보도했으니까 몇 개의 신문이 보도했는지 모르겠다.

▲ 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 <사진=박정희 대통령 기념 도서관 홈페이지>

아문법 3000억과 박정희기념재단 200억 비교

김대중 대통령의 치적물을 담아 둔다는 전당을 건설 운영하는 아시아문화궁전법(아문법)이 공무원연금법과 연계한다는 조건 밑에서 지난 2월 국회를 통과했다. 아문법은 사업비 5조 8천억(국가보조비 3천억원)을 들이고 연간 운영비 800억원을 5년간 국가에서 지원하는 사업이다. 특정인, 특정지역에 거액의 국고 지원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 현실화 되었다. 대한민국의 헌정사에 치욕의 한 장을 만들었다. 정치는 야합을 했다고 하지만 이 법이 통과할 때 언론은 무얼 했는지 한심스럽다.

▲ 1979년 10월26일 박정희 대통령이 마지막 공식행사가 된 삽교천 준공식에 참석했다. <사진=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홈페이지>

참고로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은 서울 상암동 근린공원 2,810평의 부지에 1,592 평의 기념관이 13년간 정부보조금 200억원 만으로 건립하였으며 500억원을 모금하여 그 이자로 운영하게 되어있다. 운영비 한 푼도 지원받지 않는다. 어떻게 이렇게 형평성이 없는 불합리한 일이 생길 수 있단 말인가. 10년간의 좌경화 정부를 되돌아 필요가 있다. 제대로 된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진실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그날 삽교천행사는 차지철의 월권

필자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것은 10.26 사건은 정상적인 청와대 비서실 행사계획대로만 됐더라도 일어날 수 없었던 일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79년에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 36년전 고 박정희 전 대통령 빈소 앞에서 박근혜. <사진=박정희대통령 기념도서관 홈페이지>

궁극적 목표인 수출 100억불을 달성하고 10월 1일 100억불수출 달성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중화학담당 책임비서실인 경제2는 공장 별 준공식을 거행하기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중화학 중 1개 단지로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여천석유화학단지였다. 이 단지의 준공식을 박정희 대통령 참석 하에 거국적으로 준공식을 성대하게 거행코자 계획했다. 대통령에게 보고 후 비서실 총무와 의전실과 상의하여 준공식 거행 날짜가 정해진 것이 10월 26일이었다. 날짜가 임박해 오는데도 확실한 통보가 없었다. 10.26일이 오기 2주일 전에서야 비로소 이 날짜가 삽교천 준공식 참석날짜로 바뀐 것을 알았다. 원래 대통령의 의전은 비서실(실장 김계원) 소관인데 경호실(실장 차지철)로 넘어갔었다. 경호실이 월권을 한 것이다. 구태여 핑계를 찾는다면 삽교천 행사는 당일 코스이지만 여천은 당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일 것이다. 반드시 당일이라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만약 여천석유화학단지 준공식을 10.26에 했으면 물론 10.26사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전두환 정권에서 중화학과 과학기술이 그렇게 심하게 푸대접 받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기회에 박정희 대통령의 모든 것을 참고 자료로 첨부한다.

숫자로 본 박정희 대통령 시대

<경제성장>
1962년 89달러이던 1인당 GNP가 1978년 1,000달러로 증가
1961년 세계은행 가맹국 125개국 중 101번째의 최빈국에서 1978년
49번째로 선진국 문턱까지 발전
평균경제 성장률 8.9% (OECD국가의 2배, 중남미의 3배, 사하라 이남
지역의 30배)
1962년 4,000만 불이던 수출, 1977년 100억 불로 증가

<산업구조>
1962년 39.1%이던 농업, 임업, 어업이 1977년 19.0%로
1962년 19.9%이던 공업, 광업, 건설이 1977년 38.8%로

<국민구조>
1962년 64%이던 농민층이 1977년 9.7%로
1962년 8.9%이던 근로자가 1977년 29.7%로
1962년 20.5%이던 중산층이 1977년 53.0%로 증가하여 민주화 기반
을 형성

(자료: 박정희 대통령 기념재단 전시관)

▲ 도표로 보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6호 (2015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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