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지주산업 활성화 기대

[1970년대 박정희 산업]
중화학의 정책 교훈
대한민국의 지주산업 활성화 기대


글/ 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 기획단 부단장

희망의 새해를 맞이했지만 경제를 둘러싼 국내외 환경은 비관적이다.
국제적으로는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고 있는 저유가로 유발된 장기적인 세계경제의 침체, 특히 중국의 경기침체, 전쟁과 같은 IS테러와 이에 대한 대응, 종교전쟁, 영토분쟁, 패권장악을 위한 권력투쟁, 경제적 헤게모니 쟁탈전 같은 사건들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불법적인 자기 이익 추구만을 노리는 노동쟁의, 정치권의 포퓰리즘에 의한 분에 넘치는 복지정책 그리고 여야 또는 좌우 사회단체의 선심정책 그리고 반미친북단체의 소요 등이 우리나라 경제에 해악을 끼치리라는 것이 틀림없다.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 심각상을 모르고 있는 것이 더 문제다.

▲ 중화학공업을 육성한 박정희 대통령

상술한 국내외적 악재들이 수출지향적인 우리산업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고 있다.
내수에서 활로를 찾자 또는 첨단사업이나 미래산업으로 해결하자고 하는데 미미한 효과의 방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지주산업은 중화학공업은 중화학으로 활기를 찾아야 한다.
합병, 인수를 포함한 구조조정과 기업의 과감한 합리화로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것만이 살길이다. 여기에 창조경제의 철학이 가미되면 더욱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수출이 저조하면 우리경제는 죽는다. 일선에서 싸우고 있는 군인은 안보를 위한 군인이고 수출역군은 경제를 위한 군인이다. 수출을 담당하는 수출기업체와 수출역군의 사기가 땅에 떨어져있다. 전 국민이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수출제일주의의 이념을 가지고 수출에 매진하여야 한다.
필자는 작년에 매스컴, 기념관, 대학들과 70년대의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공업에 대하여 여러 번의 인터뷰를 가졌다. 여기서 부각된 사항들만을 골라 난국을 타개하여 선진국에 올라서는 기초를 구축한 중화학공업화정책의 내용을 요약해 봤다.

1.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목표

▲ 박정희 대통령의 ‘중화학수출진흥’ 휘호

가) 중화학공업화정책의 궁극적 목표는 80년대 초에 수출 100억불, 1000불 소득을 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중화학화 정책은 80년대 경제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정부의 당초 81년의 경제목표는 53억불이었다. 중화학공업의 주종업종으로는 1)철강공업 2)비철금속공업 3)조선공업 4)기계공업 5)전자공업 6)석유화학공업의 6개 업종을 선정하였다.
나) 노동집약 산업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산업으로 향상시켜 선진국가에로 이르는 공업구조를 완성시켰다.
후진국가와의 격차를 넓히고 선진국가 대열에 합류하였다. 공업구조상 중화학공업은 피라미드의 정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다) 국가의 안보구축을 위한 방위산업 육성을 위하여는 중화학공업이 필요불가결한 것이었다.

2.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업적중 3가지

가) 중화학공업의 목표인 수출 100억불, 1,000불 소득을 1977년에 달성하여 목표년도인 1981년 보다 4년 앞당겨 달성하였다.
실제로 1981년에는 172억불을 수출하여 정상적인 5개년 계획에 의한 53억불 보다 3배 이상 성취하였다.
나) 중화학공업 업종을 동시에 착공하여 동시에 완공시켰다. 업종끼리 서로 공급자이고 수요자이기 때문에 업종 상호간에 일어나는 수급상의 불균형을 완전 해소시켰다.
다) 중화학공업과 상호관련이 있는 방위산업, 기술인력 개발과 연구개발 계획도 중화학공업과 병행하여 추진하였다.

3. 중화학공업의 성공의 결정적인 요소

강력한 리더십과 강인한 의지를 가진 영도자와 안정된 정부가 성공의 첫째 요인이다.
중화학공업은 100년 대계의 10개년 계획으로 출발한다고 했다. 10년간의 안정된 정부가 필요했다.
국민 총화를 이루어 중단 없이 일치단결하여 중화학공업추진에 매진 할 수 있었던 결과이다.
10월 유신은 1972년에 선포되었고 중화학공업화 정책선언은 1973년에 있었기 때문에 중화학을 위해 유신을 한 것은 아니다. 유신으로 안정된 정권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중화학공업화정책을 완성할 수 있었다.

4. 소요 자금은 어떻게 조달하였나?

약 8년간(1973~1981)의 중화학 추진기간에 필요한 96억 달러의 추정액 중 외자 58억 달러, 내자 38억 달러 중 원칙적으로 외자는 차관에 의존하고 내자는 자기자본으로 조달하되 정부가 지원하였다.
내자는 국민투자기금 법을 제정하여 국민연금 등 장기 저축자금과 정부의 각 회계로부터의 전입자금을 사용하였다.
중화학공업의 성패를 좌우하는 자금조달 방안을 재경당국이 사전에 마련한 것이 중화학공업의 성공의 한 요인이다.

5. 정부의 행정조치와 공사추진 이유

▲ 중화학공업 육성계획 확정을 보도한 1973년 5월 25일자 조선일보 기사.

중화학의 방침이 민간 실천이었지만 민간이 회의적이어서 따라오지를 않았다. 정부의 의지를 보여줘야 했다. 필요 기구와 법령제정을 서둘러 마련하였다.
중화학공업위원회 기획단을 만들어 청와대가 직접관리 감독하며 국민투자기금법, 산업기지개발공사 법을 만들어 시행에 들어갔다.
산업기지개발 공사로 하여금 정부가 지정한 단지를 구입, 조성하고 인프라 시설인 철도, 도로, 항만, 용수, 전기인입선 공사를 시행하였다. 기업체는 지정된 단지에 입주하여 공장건설을 하기만 하면 되게 하였다. 공장건설에 필요한 육성법도 제정하였다.
수출의 경우도 사전에 100억불 수출계획을 수립하여 공표하였다. 특히 대통령의 연두기자 회견 시 중화학공업의 실적과 계획발표는 추진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6. 왜 임해단지에 입주시켰는가

중화학공업의 특징 중의 하나가 업종별로 단지를 정하여 그 단지에만 입주토록 하였다.
전자공업을 제외하고는 중화학공업은 원료를 수입하여 가공하여 일부 국내수요에 사용하고 절반 이상을 수출하여야 하기 때문에 중화학단지는 항만을 낀 바닷가(임해단지)에 정하였다.
40년이 지난 지금도 모든 단지가 위용을 발휘하고 있다. 국토의 남발개발을 피하고 업체 상호간의 효율적인 배치를 기하였다.
1)철강공업은 포항기지에 2)비철금속공업은 온산기지에 3)조선공업은 울산과 거제도기지에 4)기계공업은 창원기지에 5)전자공업은 구미기지에 6)석유화학공업은 울산과 여천기지에 입주시켰다.(당초에는 중화학공업단지를 공업기지라고 명명하였음)

7. 재벌기업이 맡은 이유는 무엇인가

중화학공업은 관주도로 계획을 하되 실제로 공장건설은 민간으로 하여금 건설토록 하였다.
“관 계획, 민 건설”도 중화학 성공요인중의 하나이다.
중화학공업은 성격상 민이 건설하되 능력 있는 민간이라야 하기 때문에 재벌기업에 맡겼다.
대기업에 의한 중화학공장이 건설됨으로써 중소기업이 계열 공장과 부품 공장 건설에 참여 할 수 있게 되었다.

8. 한국경제사에의 의미는 무엇인가

중화학공업이 한국경제 발전에 있어서 혁명을 가져왔다.
불가능 하다고 반대했던 중화학공업을 성공시킴으로써 한국이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올라서는 기적을 만들었다. 기초가 든든한 척추산업을 구축하였다.
이리하여 한국은 GNP 3만불을 바라보는 회원국으로서 OECD 회원국이 되었다.
공업발전도는 선진국 중에도 선진국인 세계 5위 국가가 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경제난국을 해결하려면 한국산업의 펀더멘털인 중화학공업을 재창조하여야 한다.
과감한 구조조정과 경영의 합리화로 세계시장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수출을 추진하여야 한다.
중화학공업의 수출을 독려하는 최대한의 금융을 포함한 제반조치를 강구하여야만 일본의 잃어버린 20년과 같은 장기 저성장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 일본은 쌓아 놓은 과학기술력으로 버티어 냈다. 우리는 지금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선진국의 문턱에서 중진국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경제에는 내일이 없다. 경제 살리기에 총력을 다합시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7호 (2016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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