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추위와 싸운 토막사 내무반풍경

휴전선, 그때와 지금
전방부대의 겨울나기
맹추위와 싸운 토막사 내무반풍경
경계와 작업 중노동시절의 추억들


글/ 박민식 편집위원(예비역 육군대령)

연말연시를 맞으면 초임장교 시절 병사들과 함께 보낸 전방부대 겨울나기가 회상된다. 강원도 동부전선 최전방 근무지는 민가와 멀리 떨어진 산중 진지로 추위와 외로움과 싸워 긴 밤을 보내야 했다. 이미 50여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혹독한 추위는 변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니 오늘의 후배 장병들의 겨울나기는 어떠한지 궁금하고 걱정스러운 심정이다.

혹한과 싸운 영양부실·수면부족 시절

옛 전방 내무반 막사는 겨우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건물로 냉난방 시설은 고사하고 40여명의 병사들이 생활할 공간으로도 너무 부족했다.
나라의 재정형편이 지금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라 장병 모두가 이를 그냥 숙명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실내 난방이라고는 석탄용 페치카 하나가 유일했다. 매일 당번병을 지정하여 한 순간도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얼음추위를 겨우 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외풍이 지독하여 밤에는 볏짚으로 엮은 두루마리로 외벽을 감싸놨다가 아침이면 걷어 올려 햇볕이 들게 했다. 문제는 천장으로부터 내려오는 냉풍이 심해 병사들은 담요를 뒤집어쓰고 전우들과 체온을 나누며 단잠을 자던 모습이 생생하다.
목욕·이발·세탁 등 위생관리 시설이 태부족했음은 물론이다. 영양부실, 수면부족에 피곤한 몸으로 밤마다 이와 빈대와 씨름하던 것도 그때 그 시절의 진풍경의 하나였다. 그러나 아무리 고달파도 새벽 6시 기상 점호를 거쳐 군가를 부르며 연병장을 몇 바퀴 구보하고 나면 다시 생기를 되찾아 휴전선을 지키는 전사로 복무를 개시할 수 있었다.

월동용 최대작전 김장 담그기 풍경

▲ 참전용사들에게 김치 통조림을 공급한 주월 한국군사령관 채명신장군과 박정의 대통령. <사진=국가기록원/1968-04-09 촬영>

쌀이 모자라던 시절이지만 군부대의 급식은 정량·정식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최종 취사단위 부대에 공급되기까지 과정상 유실 때문이었는지 병사들 눈으로 보면 늘 정량미달이었다. 초임장교의 눈으로 봐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 정량취식 보급과정을 체크해 보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인 경우가 있었다. 더구나 시골출신 병사들이 많았던 당시에는 주부식이 정량대로 보급돼도 늘 부족감을 느낀 경우가 많았다.
진지 유지 보수공사나 유실된 도로복구 등을 병사들이 맡아 육체적인 노동 다음에 식욕은 더욱 왕성해졌기 때문이다. 정기적으로 고기국 메뉴가 나오지만 병사들 국그릇에 고기 한 점이 고작이고 신선야채라야 오직 콩나물이 유일했다. 이 때문에 이 시절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할 때까지 먹은 콩나물 길이를 연장하면 서울과 부산까지 왕복할 수 있노라고 했다.
월동준비 중 큰 사업이 김장 담기였다. 김장작전은 연대·대대 단위로 무, 배추와 소금 및 양념재료가 트럭으로 산더미만큼 실려오니 그 작업량을 헤아리기 어려웠다. 때론 군인가족을 동원하고 인근 부녀회와 여학교 학생들의 일손까지 빌려와야 했던 궁색한 시절이었다.
월동용 김장 김치는 이듬해 봄까지 5개월간 군의 체력관리를 위한 가장 중요한 식재료로 김장담는 솜씨 따라 맛이 달랐다. 그래서 어느 부대 김장 맛이 어떠느니 어느 말단부대 김치 맛이 최상이니 하는 품평이 나돌기도 했다.
1965년부터 월남전에 파병되면서 김치 안 먹고는 정글전에 전투력을 발휘할 수 없었노라는 장병들의 하소연이 나왔다. 이 때문에 당시 주월 한국군 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미군사령부와 담판을 통해 김치통조림을 군수품 조달품목으로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초기에는 미군수 당국이 하와이에 있는 일본계 미국인 김치공장에서 조달한 사실이 드러나자 “일본김치 먹고 전투 못 하겠다”고 보이콧하여 결국 한국산 김치로 대체할 수 있었다. 당시 이 같은 사실을 보고 받은 박정희 대통령이 즉각 농촌진흥원에 김치통조림 개발을 지시하고 한국종합식품을 설립, 김치뿐만 아니라 깍두기, 장조림 마늘, 장아찌까지 군납하게 됐다.
이로써 군납을 통한 외화획득뿐만 아니라 주월 한국군의 전투력 증강에도 일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폭우·폭설시 병사들 등짐보급

최근 전방부대를 방문해 보면 도로망이 잘 확충되어 있고 군용막사와 각종 편의시설마저 고루 갖춰져 있어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었다. 모두가 국군 장병들의 호국 안보아래 국가경제가 크게 발전했기 때문임을 실감한다.
50여 년 전 필자가 초급장교로 복무할 때는 여름 폭우로 도로와 진지가 유실되고 겨울 폭설로 막사가 붕괴되고 보급품 공급이 두절된 사례가 있었다. 이때 상급부대 공병 장비가 투입되기도 했지만 말단 전투부대의 경우 전 장병이 인력으로 복구한 사례가 적지 않았다. 전투용 물자나 주부식 및 난방용 기름 등은 어떤 상황에서도 15일 이상 비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때문에 다급하여 병사들의 등짐으로 각종 물자를 운반해야 했으니 군복무가 너무나 고달프다는 하소연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24시간 경계임무는 방한복(防寒服) 전투복에 방한모와 두꺼운 벙어리장갑이 기본이었다. 방한복도 점차 품질이 개량되었지만 워낙 중노동 하던 시절이라 늘 낡고 부족했다. 이 때문에 휴가 병사들은 내무반에서 제일 깨끗한 방한복을 돌아가며 입고 휴가를 다녀왔다. 또 야간 경계근무는 말할 것도 없지만 내무반에서도 전투복장 그대로 새우잠으로 때우며 대기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난 70년대에 귀순했거나 체포된 북의 무장공비들을 보면 양말은 없이 광목으로 발목을 감싸고 있어 우리 병사들보다 훨씬 열악한 환경임을 알 수 있었다. 6.25 때 인민군들의 모습이 모두 그러했는데 아직도 그때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전방부대 방문하고 위안받다

2015년 한 해 동안 중동부 전방부대를 세 차례 방문하면서 현역시절과 비교하여 너무나 놀라울 만큼 발전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군 막사는 현대식 영구건물로 신축되고 냉난방 설비에다 수돗물과 샤워시설이 갖춰 있으니 우리네 눈으로는 모자람이 없어 보였다. 더구나 취미생활이나 공부할 수 있는 시설마저 제공되고 있어 군복무하면서 자기계발도 할 수 있다고 보여진다.
대대단위 이상 식당에는 영양사가 배치되어 있고 훈련된 조리팀에 의해 다양한 메뉴가 공급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식사의 정량은 물론이고 신세대 병사들의 기호에 맞춰 햄버거, 피자, 스파게티가 급식되는 것이 바로 국민의 정성이자 국력의 뒷받침이 아니고 무엇인가.
지난 시절의 눈으로 보면 좋은 시설에 충분한 영양식으로 군 복무의무를 다 하면서 나라에 대한 충성심이 절로 우러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이다. 지난해 8월 북의 목함지뢰 도발 시 자진하여 제대를 연장하고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복무를 연장한 용맹 장병이 바로 여기서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50여 년 전에 최전방에서 복무했던 노병의 심정이 부대방문을 계기로 위안도 받고 믿음직한 장병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7호 (2016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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