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李萬燮(이만섭) 전의장, 83세로 별세

▲ 고 이만섭 전 국회의장

8선의 쓴소리 의회주의
태생적 반골의 기자정신
고 李萬燮(이만섭) 전의장, 83세로 별세
정계 광풍· 격돌의 ‘질풍노도’ 회고

이만섭(李萬燮) 전 국회의장이 지난 14일 83세로 별세함으로써 8선(選)의 ‘쓴소리 의회주의자’가 떠나갔다. 고인은 3선개헌, 유신선포 반대하고 국회의 날치기를 추방한 국회의장으로 기록됐다. 고인은 이승만 시절 정치부 기자로 출발하여 공화당, 국민당, 민자당, 새정치국민회의 등으로 당적을 옮겼지만 41년간의 의정활동 기간 중 꼿꼿한 의회주의자의 본색은 한 번도 변질한 적이 없었다.

타고난 반골과 저항의 기자·정치인

▲ 대륜중학교 졸업 무렵

이만섭 전 의장은 생시에 경제풍월과 자주 면담하며 신문기자로부터 정계에 입문하여 의회정치의 혼돈과 격랑기를 온몸으로 체험하여 태풍과 광풍을 겪은 ‘질풍노도의 세월’이었다고 자주 회고했다.
태생적 반골과 저항의 기질로 부딪히면서도 꺾이지 않는 것을 필생의 신념으로 삼았다. 대구 달성공원 가까이서 태어나 천주교 계통의 대륜중고교를 다니면서 저항시인 이상화(李相和) 영작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선생은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민족주의 저항시인으로 달성공원에는 시비(詩碑)가 세워져 있다.
고인은 연세대 정외과에 입학한 지 한 달 만에 6.25를 만나 공군사관학교에 입교했지만 졸업기에 학생 패싸움 책임을 자칭하여 퇴교처분 됐다. 당시 생도대장으로 혼자 책임을 지는 조건으로 패싸움 면책을 받아냈다. 그 뒤 연대에 복학하여 털보 응원단장으로 대학가의 명성을 울리면서 매년 정기적인 ‘고·연전’을 제압했노라고 늘 호기를 자랑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광풍이 그치지 않는 8선의 의정활동은 파란만장이었지만 후회 없이 뛰었던 세월이라고 회고했다.

▲ 박정희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민주공화당 연설회장에 참석한 이만섭 전 의장.(1963년, 공보처 홍보국) <사진=국가기록원>

10.26 후 박통은 나의 정치스승

이 전 의장은 동화통신 기자로 출발했다가 동아일보 정치부로 옮겨 윤보선 대통령의 민정이양 촉구 기사를 1면 톱으로 보도함으로써 5.16정부 육군형무소에 석 달간 구금됐다. 윤 대통령이 박정희 의장에게 건의하여 석방된 후 3개월간 주일 특파원을 거쳐 최고회의 출입기자로 박 의장을 취재했다.
박 의장이 강원도 화진포에서 해병대 상륙작전을 참관 후 국가원수로는 사상 처음으로 울릉도를 순시한다는 정보를 얻어 현지로 달려갔다. 국방부 출입기자들은 예정대로 서울로 귀환했지만 이만섭 기자는 이후락 공보실장에게 귀띔해 놓고 군함에 잠입했다. 경호원들이 나서자 “이 실장한테 허락받았다”고 속여 선실에 숨었다가 군함이 출발한 후 선장실로 들어가 박 의장을 만날 수 있었다.
박 의장이 “이 기자가 웬일이요” 하면서 “요즘 동아일보가 쌀값만 야단치느냐”고 지적하길래 육군형무소 석 달 감금 이야기를 했더니 “그래, 그건 잘못 됐구먼”이라고 말하여 최고회의 박 의장 단독회견 특종을 보도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박정희의 자립경제와 자주국방 등 민족의식에 공감하여 대선유세에 참여했다가 전국구로 의회에 진출하여 8선의 정치경륜을 쌓게 된 것이다. 공화당 초선의원 시절부터 당내 규율을 잡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1969년 3선개헌을 위한 공화당의 심야 의총에서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해임을 주장, 파란을 일으켰다.
청와대로 올라가 박 대통령을 만나니 “그 문제는 나한테 맡겨 달라”고만 했다. 나중에 두 사람은 해임시켰지만 이만섭 의원도 더 이상 부르지 않았다. 이로부터 상당기간 정치공백기를 겪었지만 10.26 후 “박 대통령은 나의 정치 스승”이라고 추모했다.

날치기 추방, 국회의장 당적포기 실천

▲ 제6대 국회에서 사카린 밀수 사건을 규탄하며 정일권 국무총리(왼쪽)에게 철저한진상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10.26 후 신군부 권력하의 정계는 오리무중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여 당수가 됐지만 JP의 신민주공화당 창당으로 국민당은 와해되고 말았다. 고인은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에게 직선제를 권유하여 6.29 선언의 산파역을 맡았다. 그 뒤 다시 3당 합당 후에는 YS 대통령 만들기에 나서고 이회창 후보가 YS의 탈당을 권고하자 ‘정치적 패륜행위’라고 직격한 후 이인제 후보의 국민신당에 합류했다.
다시 정계기류가 변동하여 김대중의 새정치국민회의에 참여하여 격변기의 정치세력 안팎을 두루 체험하게 된 것이다.
1993년 14대 국회의장 시절에는 예산안과 개혁입법안의 법정기일 내 통과를 청와대가 독촉했다. 관례대로 변칙이나 날치기를 해서라도 통과시켜야 한다는 압력이었지만 고인은 거부했다. 끝까지 여야 총무간 타협을 관철시켰지만 의장직은 단명으로 종료됐다. 2000년 6월 제16대 의장으로 재임했을 때는 여당인 민주당이 자민련과 함께 국회법 개정안을 국회운영위를 통해 강행 처리해 놓고 의장을 압박했다. 원내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의원 20명에서 10명으로 축소하여 자민련의 교섭단체 구성을 지원하겠다는 요지였다.
여당은 의장의 직권상정을 요구하다 안 되자 부의장에게 사회권을 넘겨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 한나라당은 의장 공관으로 달려가 반대투쟁을 벌였다. DJ가 전화로 간곡히 당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인은 끝까지 여야간 타협을 주장하며 이를 무산시키고 말았다.
당초 16대 의장에 취임하면서 고인은 “사법부의 역사를 새로 씁시다”라고 여야에 당부했다. 실제로 “이제 국회에 날치기는 없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그 뒤 고인은 “더 이상 국회의장을 (청와대가) 우습게 못 볼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 ‘국회의장의 당적보유 금지’ 원칙을 확립하고 모든 안건 표결은 반드시 의장석에서 선포해야 한다는 방침도 세울 수 있었다.

▲ 1993년 9월 21일 제14대 국회의장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경제풍월 격려, 덕담·비화 가득

필자가 경제기자의 외도(外道)로 KBS의 아침방송 ‘조간신문 뉴스쇼’와 심야토론에 자주 출연할 때 고인은 만날 때마다 “경제기자가 좋은 말 많이 하더라”며 격려해 주었다. 그러면서 늘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봤다면서 흥분하지 말고 말을 천천히 하라고 충고했다.
고인은 국회의장 시절 늘 가슴 속에 참을 인(忍)자를 품고 사회를 보면서 돌출사고를 방지코자 고심했노라고 말했다. 또 의장석에 앉아 국회의원들의 자세를 체크하여 수첩에 기록했다가 이따금씩 충고도 했었다고 일러줬다.
필자가 정년퇴직 후 월간 경제풍월을 창간한 후 고인께서는 자주 메모나 전화인터뷰를 통해 시국을 비판하고 창간 기념행사에 참석하여 덕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노무현 정부시절에는 고 이진우 변호사와 필자를 정기적으로 불러 힐튼호텔에서 오찬을 나누며 정치의 비정(非情)을 지적하고 민심의 악화를 걱정하셨다.
또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 사업은 필요한 국책사업인데도 임기 내 완공을 서둘러 쓸데없는 비판을 유발했다고 지적하고 박근혜 대통령이 동생 박근령·박지만의 청와대 출입을 금지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전직 대통령을 예방할 때 전·노 두 분을 끝까지 방문하지 않은 점도 비정상이라고 지적했다.
오랫동안 고인의 덕담과 시국촌평을 종합하면 정치인이기에 앞서 날카롭고 용맹스런 기자정신으로 살다가 가셨다는 소감이다.
고인은 대구 수창초등학교 시절부터 부잣집 아들로 소문 난 삼성 이맹희(李孟熙) 씨와 친구사이였다. 대륜중고 시절에는 10.26 사건의 주역 김재규 체육교사가 인상에 남고 동창으로는 노태우 대통령의 동서인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 연대 정외과 동기로는 윤형섭 전 교육부 장관과의 친분을 회고했다.
고인은 삼성 사카린 밀수사건이 보도된 후 국회 대정부질문을 통해 “이병철 회장을 구속 수사하라”고 발언하여 삼성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았다. 다음 총선 때 이 회장이 장남 이맹희에게 “이만섭을 낙선시키라”고 지시하여 돈을 풀고 중앙일보 기자들을 동원하여 온갖 방해공작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만섭 의원이 거뜬히 당선된 후 이맹희 씨를 서울서 만났더니 낙선운동을 고백하고 사과하더라고 했다.
그러나 고인은 41년 정치활동 기간 중 삼성재벌은 물론 어떤 기업으로부터 꼬리달린 정치자금을 한 푼도 받지 않았음을 자부했다.
언론보도와 같이 쓴소리 의회주의자인 고 이만섭 전 의장의 질풍노도 시절 정치를 높이 평가하며 명복을 빈다. 이만섭 의장님, 편히 잠드소서. 배병휴.

▲ 경제풍월 창간 5주념 행사사진. 좌로부터 진념 전 경제부총리, 김상하 삼양사회장, 송정숙 전 보사부장관, 이만섭 전 국회의장, 배병휴 발행인, 김동길 연대명예교수, 남시욱 전 문화일보 사장, 김용래 전 서울시장. <사진=경제풍월 DB>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7호 (2016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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