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대통령의 각별 신임하에 불호통

[경제개발시대 EPB 취재기(9)]

종횡무진 김학렬 시대
내말 잘 따르면 돼
박대통령의 각별 신임하에 불호통
EPB는 제2의 전성기 마음껏 누려


글/崔禹錫 (최우석 전 중앙일보 편집국장·주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

전국을 누비며 선거지원

김학렬 부총리가 정치에 끝까지 오불관언(吾不關焉)한 것은 아니었다. 1970년 12월엔 이낙선 상공장관과 함께 대대적인 농어촌전화(電化) 계획을 발표하여 농어촌의 환심을 샀다. 70년만 해도 전기가 들어가는 농가가 4분의 1정도였다. 1971년 대통령선거 땐 전국을 누비며 뛰었다. 2월 초엔 조시형 농림장관, 김태동 보사장관과 함께 농어촌 개발계획을 발표했다. 72년부터 시작되는 3차 5개년 계획기간 중(72~76년)엔 농업투자를 대대적으로 늘리고 농촌의 생활환경을 획기적으로 개선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도 농업투자를 많이 해 성과도 있었으나 제조업 부문이 너무 잘되는 바람에 농업 부문이 상대적으로 부진해 보였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김 부총리는 선거를 눈앞에 둔 2월 14일 부산에서 관계장관회의를 열어 부산항 종합개발계획을 대대적으로 터트렸다. 부산항만 한다고 호남 쪽에서 불만이 나오자 4월 16일엔 광주에서 다시 경제장관회의를 열고 영산강을 비롯한 4대강개발계획 발표회를 가졌다. 명분은 현지행정이었지만 실제는 선거운동이 되었다.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의 4대강 개발계획은 70년 말부터 71년 6월까지 몇 번씩 발표되었는데 워낙 규모가 크고 희망적인 사업이라 전 매스컴을 크게 장식했다. 지방과 농촌 표를 모으는 데 상당한 기여를 했을 것이다. 67년 대통령선거 때도 당시 장기영 부총리가 대 국토건설 계획의 일환으로서 4대강유역개발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그 후 방대한 사업비 때문에 별 진전이 없다가 몇 가지 차관협정이 체결됨을 계기로 다시 대대적으로 PR을 한 것이다. 당시는 이런 큰 공사를 대부분 외국차관에 의존해야 했다. 김 부총리가 지방출장을 가면 지역 상공인과 간담회를 열고 정부계획을 설명하고 건의사항을 듣기도 했다. 선거 때 김 부총리가 지방에 가서 지역 국회의원을 만나면 여당 표를 모은다는 명목으로 갖가지 지역 민원이 쏟아졌다. 그것을 일일이 메모하며 들으면서 여당의원들을 달래는 모습을 보고 칼날 같은 김 부총리에 이런 면도 있었나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 착공식 후 건설 현장을 둘러보는 박정희 대통령, 박태준 사장, 김학렬 부총리.

미국 무상원조의 종결

김 부총리 때 준비하고 발표한 3차 5개년계획에는 성장과 안정에 더해 ‘형평’이란 말이 처음으로 들어갔다. 아울러 농어촌개발과 쌀 등 주곡(主穀)의 자급, 4대강유역개발을 중점사업으로 내세웠다. 한국경제는 중대한 정책적 전환기를 맞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 획기적인 일은 김 부총리 재임 때 미국 무상원조가 끝난 일이다. 미국의 무상지원원조(SA)는 70년에, 잉농물 무상원조는 71년에 종결됐다. 6.25 전쟁부터 구호 부흥원조로 시작된 미국의 무상원조는 끝나고 필요한 물자는 장기차관으로 들여와야 했다. 1970년 5월 미국 개발처 휴스턴 처장과 1천만 달러의 마지막 SA원조 조인식을 하면서 김 부총리는 “이제 우리나라도 자립의 기반이 마련돼 웃으면서 사인할 수 있게 됐다”고 감개무량해 했다. 그러면서 “잉농물 원조도 조속히 끝냈으면 좋겠다”고 여유를 부렸다. 누계 40억 6천만 달러에 달하는 미국의 무상원조시대가 끝난 것이다.
잉여농산물 원조는 71년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해에 무상 2천5백만 달러와 장기차관 3천만 달러로 소맥, 원면, 옥수수를 들여왔다. 그때까지 들여온 총 12억1천만 달러의 잉농물 원조는 한국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식량과 우지(牛脂), 원면을 공급했을 뿐 아니라 그 판매대전은 정부예산을 메우는데 큰 몫을 했다. 미국은 평화식량법(미공법 480호)에 의해 국내에서 남아도는 식량을 후진국에 원조로 주었다. 해마다 한국은 미국과 협정을 맺고 잉농물을 들여왔는데 4가지 형태였다.
첫째가 한국에 들여와 원화로 파는 것인데 잉농물 원조의 대종을 차지했다. 판매대전의 30%는 미국 측이 대사관과 유솜(USOM) 경비 등으로 쓰고 나머지 70%는 대충자금으로 한국에 주어 정부예산으로 쓰게 했다. 미국 측 사용분 30% 중 5%는 쿠리자금이라 하여 밀가루 등 미국농산물을 많이 소비하는 한국업체에 빌려주었다. 한국시장 확보를 위한 포석이었다. 두 번째는 자조근로사업용으로 밀가루 현물로 주는 것인데 새마을 사업이나 취로(就勞)사업의 노임으로 나누어 주면 인기가 있었다. 셋째가 미국 민간인에 의한 식량구호용이고 넷째가 장기차관이었다.
미국 잉농물 때문에 식량난해소엔 큰 도움을 받았지만 부작용도 많았다. 값싼 미국의 농산물이 대량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한국의 농업기반이 무너져 자생력을 잃고 한국이 미국 농산물의 판매시장이 된 것이다. 그러나 식량이 워낙 부족할 때라 잉농물도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 생각했다. 유솜 측과 잉농물 교섭을 맡은 기획원은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김 부총리 때만 해도 미국 무상원조에 목을 맬 정도는 아니어서 무상 대신 차관으로 필요물자는 들여오면 된다는 여유가 있었다. 그 즈음해서 김 부총리가 기획원 순시에 나섰다. 어느 사무관을 붙잡고 “미국원조 끝난 것 알고 있나?” 하고 물었다. 그 사무관이 알고 있다고 하자 “그럼 대응책은, 한국경제는 어떻게 되나?” 하고 속사포 같이 묻자 “그건 부총리님 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바람에 더 이상 질문을 못하고 웃으며 순시를 끝냈다 한다.

박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

김 부총리는 급한 것은 대통령에게 전화로 보고하여 승낙을 받는다고 기자들에게 밝히기도 했다. 공적으로 사적으로 깊이 신뢰하여 나중 박 대통령은 밤중에 김 부총리를 부르거나 집에 찾아가 술을 마셨다 한다. 김 부총리는 몸이 안 좋아 술을 조심해야 했지만 술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농담도 잘하고 노래를 잘 불렀다. 박 대통령은 담백하고 재미있는 김 부총리와의 술자리를 좋아했다 한다. 김 부총리는 유행가를 잘 불렀다. 나중엔 기밀사항인 정치자금까지도 김 부총리에게 맡겼다 한다. 이를 견제하려는 정보기관에 집이 한 번 털리기도 했다.
김 부총리가 강경일변도로 나간 것만은 아니었다. 정치적 포석도 잊지 않았다. 유력 정치인들의 민원 중 대세에 영향 없는 것은 깨끗이 들어주고 대통령 측근이나 언론기관에도 각별 배려를 했다. 한번은 5개년계획에서 12개항(港) 중점개발계획을 세웠는데 그것을 발표하기 전에 그 지역 출신 국회의원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 계획에 특별히 넣었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러나 부총리의 권위에 도전한다든지 하는데 대해선 가차 없는 응징을 했다. 같이 대통령의 총애를 받아도 부총리 지휘권을 존중하지 않으면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공손한 태도를 보이면 봐주지만 맞서려고 하면 끝까지 갚았다.
이낙선 상공장관이나 김현옥 서울시장도 몇 번 고생을 했다. 1971년 환율인상 협의를 할 때 실무진은 다 나가라고 하여 이 장관을 곤혹스럽게 했다. 이론에 밝은 김 부총리와 남덕우 재무장관이 ‘패리티(Parity) 이론’을 가지고 환율문제를 논의하는데 실무진을 내보낸 이 상공장관이 고생했다 한다. 김현옥 시장은 소방장비를 차관으로 도입하려 하자 서울시에 돈이 많으니 예산으로 하라고 거절하기도 했다. 국방비 문제도 재원을 이유로 예산을 깎는 통에 국방장관과 심한 논란이 있었으나 이미 대통령의 승낙을 받아놓고 있는 김 부총리가 이길 것은 당연했다. 박 대통령이 국방관계 프로젝트도 김 부총리와 상의하라고 지시하는 통에 국방부의 장성들이 줄줄이 브리핑하러 오기도 했다. 관계장관과 이견이 생길 때마다 김 부총리가 판정승을 하고 “내 말은 신의 뜻이니 잘 따르면 된다”고 큰소리를 쳤다. 이렇게 되자 기획원의 힘은 다시 막강해져 왕초시대에 이어 제2의 전성시대를 구가했다.
김 부총리도 남덕우 재무장관만은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처음엔 교수 출신이라 쉽게 보았으나 보통이 넘는 정치력과 내공을 보이자 “이 친구 봐라”하며 놀라워했다. 남 장관은 박 대통령이 직접 발탁한 케이스였다. 그래서 김 부총리는 남 장관을 테스트하기 위해 잽을 자주 넣었다. 남 장관이 부총리실로 찾아오면 일부러 엉뚱한 전화를 걸거나 모른 체 하는 등의 수법을 쓰기도 했다. 그때는 예산안을 편성할 때 세입을 재무부에서, 세출은 기획원에서 짰는데 세입추계를 둘러싸고 마지막까지 신경전을 벌였다. 또 예산으로 할 거냐 금융자금으로 할 거냐를 놓고 자주 논란이 벌어졌다. 더러 신문지상을 통해 기획원과 재무부가 공방전을 벌이기도 했다. 성질 급한 김 부총리가 정면으로 나서 반박을 하려하는 것을 참모들이 겨우 말려 기획원예산국장이 대신 싸우게 했다.
한번은 업무협의를 하다 김 부총리가 너무 엉뚱한 짓을 오래 하자 남 재무가 서류를 내던지고는 부총리실을 나가버렸다 한다. 엉겁결에 당한 김 부총리는 황당해 했지만 남 재무는 곧 평온한 얼굴로 다시 찾아와 사과하고 사태를 수습했다 한다. 김 부총리가 다소 무리하게 몰아붙여도 남 재무는 정면으로 맞서지 않았다. 그러면서 끈질기게 자기 할 일은 했다. 남 재무는 박 대통령의 신임도 두터웠고 또 개인적 약점이 없었다. 당시 재정안정계획은 주로 남 재무가 유솜(usom)과 협의했는데 그것도 큰 힘이 되었다. 재무부는 재정안정계획과 외환수급계획을 수립·집행하고 35개월 미만의 연불수입(延拂輸入)과 금융기관을 관장했으므로 법적인 권한이 막강했다. 기획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나중 김 부총리도 남 장관의 실력을 인정하고 조심스런 긴장관계를 유지했다.

경제전반에 지휘권 확보

▲ 명쾌한 성품의 김학렬 부총리

김 부총리는 경제전반에 지휘권을 행사했다. 위에 총리가 있었지만 박 대통령의 직접지시를 받아 움직였다. 꼭 총리의 결재를 받도록 했던 전임과는 대조적이었다. 원만한 정일권 총리는 경제문제는 모두 맡기고 간여하지 않으려 했다. 1970년 12월에 취임한 백두진(白斗鎭) 총리는 50년대 자유당 시절 재무장관을 역임한 경제통이어서 경제에 관심이 많았다. 취임 초 민간주도경제를 내걸고 이제 민간의 활력이 높아졌으니 경제운용방식을 관주도에서 민간중심으로 바꿔야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리고 기업인과의 간담회도 가졌다. 이런 백 총리의 방침을 김 부총리는 별 존중하지 않았다. 김 부총리에 대한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운 데다 백 총리의 재임기간이 짧아 드러난 충돌 없이 끝났다. 그 다음 실세인 김종필(金鍾泌) 총리 밑에서도 부총리의 위세는 여전했다. 김 총리가 경제를 맡겼을 뿐 아니라 총리와 기업인들과의 간담회에도 부총리가 가서 대신 답변할 정도였다. 청와대 비서실장이나 경제수석도 김 부총리가 하는 일엔 별 간여하지 않았다. 박 대통령과 김 부총리의 긴밀한 관계에 끼어들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김 부총리는 자신의 힘을 충분히 활용했다. 농업개발에 쏟는 박 대통령의 집념을 잘 알아 농업과 농촌개발에 자원을 많이 배정했다. 녹색혁명이란 이름 아래 그동안 소외되었던 농촌부문 투자를 크게 늘렸다. 특히 식량자급을 위해 벼의 새 품종 개발엔 청와대 수석으로 있을 때부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농촌을 챙기니 김 부총리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어지간하면 김 부총리 편을 드는 박 대통령이지만 고미가(高米價)정책만은 소신을 고집했다. 김 부총리가 물가안정과 재정문제 때문에 쌀 수매가의 대폭인상에 반대해도 박 대통령은 이젠 농촌을 살려야 한다면서 높은 수매가를 주장하는 농림부의 손을 들어 주었다. 1967년까지만 해도 쌀 수매가가 한 자리 숫자로 올랐으나 68년엔 17%가 올랐고 69년엔 23%, 70년엔 비료 한가마를 포함하여 무려 36%나 올렸다. 김 부총리도 놀랐지만 박 대통령이 그렇게 하자는 데는 어쩔 수가 없었다.

농공병진정책, R&D정책에도 앞장

박 대통령은 몇 차례 선거를 치르면서 농촌문제의 심각성을 절감한 것 같다. 그래서 1970년부터 농촌을 살리기 위해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다. 처음엔 농촌지붕 개량이나 길 넓히기, 우물파기에서 시작하여 농촌소득 증대사업으로 차츰 넓혀 나갔다. 맨 처음 전국 3만 여개 자연부락에 시멘트 3백포를 주고 마을 공동사업을 벌이도록 했다. 1년 뒤 실적을 보아 잘 하는 마을은 시멘트 5백포와 철근 1톤을 주고 못하는 마을은 지원을 중단하여 부락 간의 경쟁을 유도했다. 박 대통령 작곡 작사의 새마을 노래가 나온 것은 이 무렵이다. 농촌주택 개량은 예산지원이나 물자수급면에서 두고두고 기획원의 부담이 되었다. 그래도 박 대통령의 뜻이 워낙 강해 아무 말도 못했는데 79년 초 신현확(申鉉碻) 부총리가 강력한 안정화계획을 추진하면서 농촌주택 개량사업을 크게 깎았다가 박 대통령의 진노를 산 바 있다.
김 부총리는 대통령의 뜻을 받들어 아예 농업개발에 의한 농공병진(農工竝進)에 앞장섰다. 그래서 농업에 예산도 많이 배정하고 농업부문 차관도입을 서둘렀다. 품종개량, 경지정리, 수리시설, 비료증산 등 농업투자는 돈이 많이 들면서 효과가 늦게 나타난다. 세계은행에서 쌀 증산을 위한 투자가 지나쳐 다른 부문에 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우려가 나올 정도였다. 김 부총리는 71년 TV에 나가 1년에 1백만 톤이 넘는 외미를 도입하여 1억6천만 달러의 귀한 외화를 쓰니 74년까지 쌀 증산으로 식량자급을 하겠다고 선언했다.
김 부총리가 또 하나 신경을 쓴 것은 연구개발 부문이었다. 일찍이 5개년계획 작업에 참여했던 김 부총리는 두뇌개발사업과 싱크탱크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이들 사업에 과감한 지원을 했다. 홍릉에 과학연구단지를 만들 땐 김 부총리가 앞장서 부지문제를 해결하고 예산으로 뒷받침 했다. 홍릉의 임업시험장 자리에 연구단지의 터를 잡으려 하자 농림부가 많이 반대했는데 김 부총리가 나서서 박 대통령의 지원을 얻고 하여 결국 30만 평을 확보해 주었다. 오랜 현안이던 종합경제연구소, 즉 KDI(한국개발연구원)도 김 부총리의 적극지원을 받은 것이다. KDI에 우수한 인재를 유치하기 위해 당시로선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봉급도 국립대 교수의 몇 배를 주고 반포아파트도 얻어주었다. 이때 반포아파트에 들어가 산 연구원 중엔 집을 살 기회를 놓쳐 나중 집값폭등 때문에 낭패를 보기도 했다.
KDI 원장을 선임할 땐 창립준비를 주도한 김만제 박사는 나이가 너무 젊어(38세) 일단은 부원장을 맡고 원장은 원로를 선임할 생각이었는데 보고를 받은 박 대통령이 그 나이면 충분하다 하여 38세의 원장이 탄생했다 한다. 경북 선산(善山) 출신의 김 원장을 보고 김 부총리는 “선산 사람은 엉터리가 많아”하고 농담을 해 놓고는 곧바로 “일부 인사는 빼고”하는 말을 덧붙였다. 박 대통령도 선산 출신이었던 것이다. 김만제 원장은 초창기 KDI를 잘 이끌어 여러 경제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당시 박 대통령이나 김 부총리나 KDI의 정책건의를 존중했고 기자들도 보고서를 큰 비중으로 다루었다. 김 원장은 10년 넘게 장수하곤 5공 들어서 재무장관과 부총리를 지냈다.

호불호 분명하고 더러 놀랄 정도로 솔직

김 부총리는 기자실을 비롯한 언론과도 비교적 잘 지냈다. 괴팍한 성격에 비해 언론엔 우호적으로 대하려고 애를 썼다. 그 바쁜 중에도 기자실에 자주 왔다. “여러분 중에 집을 사려 하는데 은행융자를 못 받거나 친여동생이 은행 같은데 취직하려 하는데 안 되는 경우엔 직접 갖고 오십시오. 이 김학렬이가 책임지고 해결하겠습니다.”하고 선언을 하곤 실제 그렇게 해 주었다. 당시는 취직이나 은행융자가 무척 어려울 때였다. 출입기자가 면회를 신청하면 즉각 만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또 정책현안에 대해서 복안을 털어 놓기도 하고 옛날이야기도 자주 했다. 인간적인 유대도 강화하고 정책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높이려 했다. “내가 말이야, 재무장관에서 떨어져 잠바 입고 경부선 야간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내려갈 때 칼을 갈았지. 이번에 장난친 놈들 절대 가만 두지 않겠다고. 그러나 이젠 다 용서하기로 했어. 이만 하면 이 김학렬이도 착한 사람이지, 허허허.” 하며 웃었다. 김 부총리는 1966년 기획원 차관에서 재무장관으로 입각하자 최고의 업적과 최장의 수명을 목표한다고 큰 소리쳤으나 3개월 만에 경질된 바 있다. 특히 현금차관을 금지하겠다고 하여 장 부총리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부총리가 되자 현금차관의 불가피성을 알고 조금씩 인정했다.
재무장관 때 일본 동경에서 열린 ADB(아시아개발은행) 창립총회에 한국대표로 가면서 민족정기를 보인다며 한복차림으로 갔다가 청와대로부터 회의에 참석할 땐 양복을 입도록 지시전문을 받기도 했다. 민족정기가 넘치게 쓴 연설문도 수정되었다. 물가와의 전쟁을 할 땐 “다른 나라의 부총리는 중동에서 전쟁을 벌이나 마나. 핵탄두는 언제 쓰나 하는 굵직한 판단을 하는데 이 김학렬 부총리는 짜장면 값을 올리나 마나. 커피 값은 얼마나 올리나하는 쪼잔한 문제에 매달리고 있으니…” 하고 한탄하기도 했다.
그 외에도 정책의 배경이라든지 대통령과의 관계도 은근슬쩍 흘리기도 했다. 더러 놀랄 정도로 솔직하기도 했다. 한번은 과장승진 인사를 해놓고는 “어때, 이번 인사가?” 하고 물었다. 기자들이 두 사람은 납득이 가는데 한 사람은 이상하다고 했더니 “그럴거야. 엘리트는 아니지. 옛날 예산국 과장할 때 데리고 있었는데 내가 지금 안 올려주면 기획원에서 올라가기 힘들어.” “그 때문에 못 올라간 사람은 어떻게 되고요?” “엘리트들은 언제 올라가도 올라가게 돼 있어.” 하는 통에 웃고 만 적이 있다. 공사가 분명하다는 김 부총리도 더러는 “이 사람은 내가 아니면 못 올라갈 사람”이라면서 챙겨주었다. 공정하다는 기획원 인사에도 더러 납득 안 되는 일이 벌어졌는데 김 부총리는 정실인사에도 과감했다. 한 번 신임을 받으면 보지도 않고 사인도 하고 챙겨주는데 일단 눈에 났다 하면 죽을 고생을 각오해야 했다. 심지어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엔 너 출세할 생각 말라”는 극언까지 했다. 사실 그런 곤욕을 치른 사람이 꽤 있다. 사람에 대한 좋고 싫음이 너무 분명했다.
특히 과거 부흥부 출신에 대한 적대감이 강했는데 김 부총리가 재무부 예산국에 있을 때 대충자금을 관장하던 부흥부 사람들에게 심한 괄시를 받은 뒤끝이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미국 원조물자를 판 돈으로 조성한 대충자금을 얻어 와야 예산을 편성할 수 있었는데 부흥부 담당관이 고분고분하지 않은 김학렬 예산과장을 괴롭혔다는 것이다. 김 부총리 시절 부흥부 출신들은 매우 불안해했다. 차관 때 장기영 부총리의 괄시를 많이 받은 김 부총리였지만 자신도 차관을 많이 괄시했다. 그 차관도 부흥부 출신이어서 그렇다는 소문이 있었다. (계속)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 필자 최우석(崔禹錫) 기자

1962년 한국일보 기자로 출발, 중앙일보 논설위원, 경제부장, 편집국장, 주필을 역임한 후 1995년부터 10년간 삼성경제연구소장·부회장을 끝으로 은퇴했다.
필자는 1965년부터 71년까지 경제기획원을 출입하며 장기영, 박충훈, 김학렬 부총리시대를 직접 경험하고 취재했다. 필자는 경제기획원 시절의 수기를 묵은 취재수첩과 관계기록, 신문스크랩 및 출입기자 시절의 보고 들은 내용과 개인적 체험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 형식의 사적 기록이라고 말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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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98호 (2016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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