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것은 나라· 사랑· 타다남은 등걸뿐

운정(雲庭) 김종필(金鐘泌)
[풍운(風雲), 허업(虛業)이야]
JP 현대사 증언록… 43년 정치인생
남은 것은 나라· 사랑· 타다남은 등걸뿐

▲ 운정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인터뷰 회고록 ‘ 김종필 증언록’ 이 출간됐다.

5.16 군사혁명 기획, “절망과 기아선상에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혁명공약을 기안했던 운정(雲庭) 김종필(金鐘泌) 전 국무총리의 인터뷰 회고록이 1·2권 960 페이지로 출간됐다. (2016.2.24. 와이즈베리) 풍운(風雲)의 혁명가에다 온갖 사방으로 다능다재(多能多才)한 소양을 갖춘 ‘낭만형’ 정치인생 43년 기록이니 화제와 일화가 넘친다.

중앙일보와의 1년간 인터뷰록

언론용어이자 국민적 애칭으로 각인된 JP라면 대통령을 지내고 타계한 YS(김영삼)와 DJ(김대중)와 함께 3김시대 한 축 아닌가. 비록 집권에 실패하여 만년 2인자로 인식되지만 그의 정치인생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YS와 DJ에 못 미칠까.
한마디로 JP의 현대사 증언록이라면 살아있는 현대사이자 대한민국 정치사 기록의 산실쯤으로 인식된다. JP는 오랫동안 주변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회고록 집필을 사양해 왔었다. 자칫 자화자찬으로 비칠까 스스로를 경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JP가 전직 대통령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력 정치인들의 회고록을 다 읽고 판단했을 것이다. 정치인들의 회고록이란 하나같이 용감무쌍했던 독립투사와 같은 진기록들로 가득하다는 느낌을 받기 십상이다.
JP는 중앙일보 인터뷰 팀의 설득으로 직접 회고록을 집필하는 대신에 지난 2014년 10월부터 1년간 청구동 자택에서 인터뷰 했다. 이를 중앙일보가 2015년 3월부터 연말까지 114회에 걸쳐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제목 하에 연재하여 인기를 끌었다. 그 후 독자들의 요구가 빗발치자 이번에 단행본 1·2권으로 엮어 출판기념회를 갖게 된 것이다.

주연·협업·동업정치 곡절에도 여백

▲ 1963년 1월 7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이 육군 준장으로 전역한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1등보국훈장 통일장을 수여하고 있다.(사진=국가기록원)

JP의 정치역정은 5.16 혁명주체로부터 9선(選) 의원에 국무총리를 두 차례나 역임하고 4개 정당 당수를 역임했으니 현대 정치사의 어떤 주역보다 기록과 증언이 많을 수밖에 없다.
박정희 시대에서 3김정치, 10.26 후 신군부 시대에서 민주화 시대 YS, DJ 및 노무현 시대에 이르기까지 주연(主演), 조연(助演), 협업(協業), 동업(同業) 등 온갖 곡절과 풍상으로 화려하면서도 아쉬운 여백(餘白)을 남기고 말았다.
JP의 마지막 정치무대는 2004년 4월, 제17대 총선으로 당시 노무현 탄핵의 역풍에 낙선하여 자민련의 붕괴로 쓸쓸히 은퇴하고 말았다. 그의 정치신념인 내각책임제를 이룩하지 못했으니 단순한 승패로 나눈다면 실패로 기록될 수 있다.
그렇지만 JP 정치의 43년은 역사의 격변현장 주역이었고 스스로 참여하여 현대사를 만들어 내기도 하여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통해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올라섰으니 자랑스럽게 기록될 수 있다. 그러나 JP 스스로는 은퇴 후 나이 아흔에 이르고 보니 ‘구십이지, 팔십구비’(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요약했다. 지나온 바쁜 세월이 그냥 헛것처럼 느껴진다는 소감이니 정치를 졸업한 노후의 텅 빈 마음을 표현했을 것이다.
JP는 이 대목에서 “정치는 허업(虛業)이야”라는 실감나는 명언을 남겼다. 정치란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온 심신을 불태우는 봉사이기에 기업에 투자하여 이자(利子) 받고 배당(配當) 받는 사업이 아니라는 뜻이다. 바로 오늘의 정치세대들에게 물려주고 싶은 교훈일 것이다. JP의 회고는 지금 와서 남아 있는 것이라곤 나라와 사랑과 타다 남은 등걸뿐이라고 했으니 이 또한 풍운의 혁명가가 들려주는 실전적 고백으로 들린다.
JP는 미리 자작(自作) 비문을 통해 고향 부여에 장만해 둔 유택에 평생 반려자인 부인 고 박영옥(朴榮玉) 여사와 함께 영면하겠다는 뜻을 밝혀 놓았다. 두 차례 국무총리를 역임한 국가유공자로서 국립현충원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미리 이를 사양한 것도 정치 거인(巨人)이 정치를 허업이라고 규정한 심정과 닿는다고 느껴진다.

5.16에서 10.26과 2인자 정치 2막까지

증언록 1·2권은 △5.16과 박정희로부터 시작하여 △제3 공화국 수립과 한일회담의 진실 △조국근대화의 여명과 권력투쟁 △유신개헌, 그리고 운명 △10.26과 신군부의 등장 △2인자 정치의 제2막 △자민련 창당과 DJP 연합 △인간 JP, 나를 말한다 등 제8장에 이르기까지 길고도 험한 여정의 영광과 굴절이 자세하게 나온다.
소제목만으로도 JP 정치의 굽이굽이가 오늘의 우리세대의 삶과 희로애락을 함께 해 왔음을 실감할 수 있다. 5.16 정부 제2인자로서 중앙정보부 창설, 공화당 창당에 이어 ‘자의반’(自意半) ‘타의반’(他意半) 외유, 반JP 4인방 체제, 공화당의 10.2 항명파동, 3선 개헌과 유신선포 및 10.26 국변까지 박정희 정권 18년간 한순간도 중단 없이 JP의 고뇌와 영광은 계속되어 왔다.
이어 전두환 장군의 신군부 등장에 따른 정치규제와 미국 망명생활, 귀국 후 1노(盧) 3김(金) 시대의 신민주공화당, 3당합당과 내각제 합의각서 파문, YS와 결별 후 자민련 창당 및 DJP 연합 등 비정(非情)과 격동의 정치사에 얼마나 많은 곡절을 겪었을까. YS와 DJ는 분명 JP의 협력으로 집권에 성공했지만 연합이나 공동이란 말은 헛공약에 지나지 않았다.
집권자는 온갖 명분과 약속으로 JP와 손을 잡았지만 금방 오만과 독단으로 군림하고 가신(家臣)그룹의 JP 거세작전으로 빈손으로 물러나기를 거듭하고 말았다.
이 같은 험난한 정치역정에도 불구하고 JP는 음악, 미술, 문학 등 타고 난 낭만적 성품으로 난세(亂世)의 풍운을 참고 이겨냈노라고 볼 수 있다.

혁명가 박정희의 ‘인간적 향기’ 증언

JP의 증언록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대목을 유심히 읽게 된다. 우리네가 거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박정희는 타고 난 혁명가였다.
“중단하는 자는 승리하지 못한다”, “내 일생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라는 박정희의 신념이 5.16 정신이고 조국근대화의 철학으로 배고픈 국민들에게 밥을 먹여주는 혁명에 성공한 것은 객관적인 역사이다.
5.16 직후 JP가 박정희와 함께 역술가 백운학을 찾아갔더니 그가 ‘험하게 돌아가실 운명’이라고 귀띔하더라고 했다. 실제로 박 대통령이 끔찍하게 돌봐 준 김재규가 ‘발작증’으로 총격을 가했으니 10.26이 운명이었는지 모른다.
JP는 1949년 6월 문관이던 박정희를 ‘조그마하고 새카만 분’으로 처음 만났지만 눈빛이 남달랐다. 자세가 반듯하고 모나지 않아 평소 웃지 않는 모습이지만 미소만은 일품이라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골프 18홀을 돌 때까지 무리 없이 또박또박 했고 술을 즐겼지만 경호실장 박종규의 만취 오기를 나무랄 정도로 절도가 있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소문대로 ‘황성옛터’, ‘짝사랑’, ‘추풍령’ 등을 애창하며 식민지 시절의 울분과 성장기 가난의 한(恨)을 달랬노라고 짐작된다. 또 반듯한 육필글씨로 공직자들에게 격려나 경고편지를 보내 엄중하게 다스렸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다.
박 대통령이 미국과 종종 불편한 관계를 보였지만 JP는 용미(用美)전술로 이해한다. 박 대통령이 포병 대령이던 1953년 포병간부 교육을 받으러 갔을 때 미군대위 교관이 “별 달고 싶으면 좋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훈시하자 즉각 박 대령이 ‘갓 댐’(God dam) ‘선 오브 비치’(Son of Bitch)라고 쏘아붙였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멋진 인간의 발자취’… 홍석현 회장

JP 증언록을 인터뷰하고 신문에 연재했던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은 JP의 현대사 증언이 회고록 문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말했다. 홍 회장은 이 증언록 속에 JP의 결단과 리더십의 고뇌가 담겨 있지만 권력세계의 내면을 솔직하게 증언한 ‘멋진 인간의 발자취’라고 밝혔다.
JP가 민감하고 미묘한 대목에 이르러 이를 우회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파란곡절 그대로 정면으로 실감나게 증언했다는 평가이다.
JP를 40여 년간 보좌해 온 김상윤 전 총리 보좌역은 지난 10여 년간 수많은 자료를 준비한 끝에 인터뷰하여 이번 증언록을 출판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JP는 35세의 청년장교로 5.16을 기획하여 9선 의원, 국무총리, 4개 정당 총재를 역임하고 여러 정권 출범을 지원했으니 남겨 놓은 자료가 얼마나 많을까.
서재와 창고에는 트럭 3대 분량의 각종 자료와 영상물이 보관되어 있다고 하니 10여 년간 정리 끝에 증언록이 나왔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지난해 5월 중앙일보가 발행한 ‘운정 김종필 화보집’도 여기서 나오고 소이부답 증언록도 나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중앙일보의 JP 인터뷰 팀은 박보균 대기자, 전영기 논설위원, 최준호 차장, 한애란 기자 등.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0호 (2016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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