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선 의원 은퇴 후 대한민국 정통성 수호

▲ 소석 이철승(素石李哲承)

오! 대한민국 누가 지키리…
[素石 李哲承 애국일생]
반탁· 반공· 건국 학생운동의 독보적지도자
7선 의원 은퇴 후 대한민국 정통성 수호

소석(素石) 이철승(李哲承)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께서 지난 2월 27일 향년 94세로 별세하여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소석의 일생은 대한민국 건국 이후 현대사의 독보적인 증언이다. 대한민국 건국과정의 반탁(反託)·반공(反共) 학생운동 지도자, 6.25와 반독재·민주화 및 대한민국 정통성 수호 지도자로서 소석을 능가할 사람이 어디 있으랴.

애국선배 사랑방에서 애국정신 학습

▲ 1946년전국학련위원장으로서이승만박사내외분과함께

소석은 ‘대한민국 이렇게 세웠다’, ‘오! 대한민국 누가 지키리’라고 외칠 수 있는 이 시대의 애국충정 사표이다. 소석은 생전에 ‘대한민국과 나’라는 제목으로 회고록 상·하권을 통해 조국 대한민국의 현대사 증언을 남겼다.
고인은 회고록에서 보성전문(현 고대) 학생시절부터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등 애국선배 사랑방을 동가식(東家食) 서가숙(西家宿)하며 “밥상 나르고 군불 때면서 애국정신과 자세를 배웠다”고 회고했다.
그로부터 반탁·반공 학생운동으로 대한민국 건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정계에 입문하여 7선(選)에 이르기까지 반독재, 민주화 투쟁전선에서 맹활약함으로써 역대 국가 지도자들을 비판하고 평가할 수 있는 경륜과 지도력을 쌓았다.

▲ 1960년 3.15 부정 선거 규탄 시위에 참여한 국회의원 시절의 이철승.

소석은 반탁·반공 학생운동 시절 이승만 대통령, 백범 김구의 지도와 격려를 받고 정치활동을 통해 윤보선 대통령, 장면 총리 시절을 거쳐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 및 김영삼·김대중·노무현 대통령까지 줄곧 야권 지도자로서 일관했다.
소석의 정치일생에는 YS·DJ·JP 등 세칭 3김시대와 40대 기수론의 난류를 관통한 역경이 있었지만 5.16과 12.12 신군부에 의한 두 차례 최장기간 정치규제의 여파로 끝내 집권에 성공하지 못한 채 ‘작은 정치’를 졸업하고 ‘큰 정치’로 말년을 보냈다.
이 같은 고인의 일생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빈소에서 “YS와 DJ보다 먼저 집권할 수 있었던 뛰어난 경륜에도 불구하고 좌절하고 만 것이 너무나 아쉽다”고들 회고했다.

두차례 정치규제… 끝내 선비의 지조 고수

고인은 생시에 청백리 집안의 내력과 대대손손 이어져 온 선비정신을 유난히 강조하셨다. “40대 기수론 가운데 유일하게 대통령을 못 하셨다”고 지적할 때도 선비론으로 대꾸하셨다.
소석의 선대는 전의(全義)예안(禮安) 이씨로 연산군 때 낙향하여 지조와 의리를 생명처럼 중히 여기는 가훈 아래서 자랐다. 이 때문에 5.16 정치정화법으로 가장 늦게까지 규제되어 정치적 망명생활 끝에 귀국했을 때는 YS와 DJ가 야권 지도자로서 역량을 키워 40대 기수론으로 앞서 나갔다. 그렇지만 소석은 건국세력의 막둥이에 신세대의 맏형이라는 신념을 앞세워 ‘참여하의 개혁’, ‘중도 통합론’ 등의 정치철학으로 일관했다.
소석은 박정희 정권과의 투쟁과정에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지나친 흑백론을 배격했지만 YS와 DJ 진영에서는 ‘사쿠라’론으로 공격하여 결국 40대 기수론에서 밀려난 셈이다. 그렇지만 소석은 “매화는 일생동안 추위에 자라지만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매일생한 불매향’(梅一生寒 不賣香)의 선비지조를 지켰노라고 강조했다.

▲ 1946년1월이철승반탁전국학생총연맹중앙위원회위원장(고려대정치학과)이반탁학생대회에서개회사를하고있다.

소석은 10.26 후 신군부에 의한 2차 규제를 겪고 1985년 12대 의원에 당선되어 7선으로 현역정치를 마감한 후 ‘대한민국 정통성 수호운동’, ‘탈북자 구원운동’ 등으로 ‘큰 정치’를 주도하면서 김대중, 노무현의 반미·용공·친북정권에 의한 ‘도둑맞은 10년’, ‘제나라 역사도 모르는 상놈의 정권’과 투쟁하는 애국세력의 선두에서 활약했다.
이 같은 소석의 일생은 어느 누구도 말하기 어려운 ‘대한민국과 나’를 회고록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고이소 총독 면담, 항의후 학병으로

소석은 전주 북중을 거쳐 인촌이 교주이던 보성전문에 입학하여 법과 단임 안호상(安浩相) 박사가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창문을 닫고 우리말로 몰래하는 강의를 들었다. 이 무렵 총독부가 학병지원을 강요하자 반대운동을 주도하다가 경성제대 철학과 이혁기와 함께 경무대로 찾아가 고이소 총독을 면담하고 “식민지 조선 청년이 왜 학병으로 끌려가야 하느냐”고 항의했다.
조선 주둔군 사령관 출신의 고이소 대장은 황국신민(皇國臣民), 내선일체(內鮮一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등을 앞세워 학병지원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라고 답변한 후 경무대를 나와 일경의 눈을 피해 뒷길로 숨어들었다. 이 무렵 일제는 전문대학의 폐교방침을 흘려 대학마다 학병지원 난리가 났다.
실제로 소석이 많은 학우들과 함께 학병으로 끌려간 후 보성전문대학은 ‘경성척식경제전문’, 연희전문대학은 ‘경성공업경영전문’ 등으로 격하시켰다.
이철승 이등병은 오사카 병참부대(말부대)에 배치되어 미군기 공습 때는 말을 피신시키는 임무를 맡았다. 이때쯤 일본군 중장 복장의 영친왕이 부대를 방문하여 조선학병 20명과 면담했다. 그 뒤 8.15로 일제가 패망했을 때 이철승은 화물선을 잡아 여수항으로 귀국했다.
해방정국의 대학은 좌익계가 거의 지배하고 있었다. 보성전문도 좌익계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어 이철승이 유도부와 권투부 학생들을 규합하여 학생회 준비위원장으로 추대되어 좌익계를 진압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전국학련, 반탁학련을 구성, 남로당 간부 습격 등 화려하고 용맹스런 구국 학생운동사를 펼칠 수 있었다.

전국학련 의장으로 학생운동 대표

전국학련은 대표의장 이철승, 공동의장단에는 서울대 채문식, 연희전문 이동원, 유학생동맹 대표 박용만 외에 각 대학 대표단으로 구성됐다. 이승만 대통령 부처가 이철승 의장을 만나 전국학련을 격려해 주고 백범은 ‘반탁승리’(反託勝利) 휘호로 격려해 주었다.
전국학련은 대한민국 건국을 전후하여 좌우익 대결에서 혁혁한 발자취를 남기고 제 역할을 끝냈다. 그러나 6.25 전쟁이 나자마자 소석은 육본으로 달려가 참전을 지원하고 학도병을 모집, 낙동강 전선에서 ‘군번 없는 학도병’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

▲ 이철승 신민당 야당대표로서 박정희 대통령과…(1977). (사진=국립영화제작소 대한뉴스 동영상 캡쳐. from 국가기록원)

소석의 정치인생은 고향 전주에서 3대 의원으로 등원하여 3선을 기록하며 4.19 후에 출범한 장면 정부의 소장파 리더로 부상했다. 줄곧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국가안보와 대북정책 분야에서 영향력 있는 젊은 국회의원으로 1961년 3월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출국한 것이 장장 7년간의 정치망명 길이었다.
유엔총회 한국대표로서 임무를 끝내고 도쿄에서 5.16 쿠데타 소식을 들었다. 당시 도쿄에는 한일회담 수석대표인 유진오 고대 총장이 머물고 있었고 정치권에서는 이재형, 곽상훈, 모윤숙, 유진산, 양일동, 박준규 의원 등이 각각 다른 일정으로 체류하고 있었다.
소석은 5.16 소식을 듣자마자 국방위원으로 안면이 있는 박정희(朴正熙) 소장을 떠올렸다. 포병대령 시절의 박정희는 군기가 엄정하고 청렴하다고 들었다. 그러나 쿠데타를 일으켰으니 구 정치인에 대한 검거가 있을 것으로 예측하고 귀국을 거부했다. 그 대신 박정희 소장에게 사신을 통해 “참신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공약을 철저히 지키라고 당부했다.
그 뒤 5.16 정부가 소석의 여권을 말소했다는 소식을 듣고 망명길로 나서 친지들의 도움으로 세계 각국을 순방하고 월남 파병사령부도 방문했다. 미국에서는 펜실베니아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과를 수료할 수 있었다. 소석은 5.16 정부의 정치정화법이 만료된 후 가장 마지막으로 양일동, 신도환, 윤길중씨 등과 해금됐다. 그 뒤 정계로 복귀하여 8~10대 의원을 역임하고 신군부의 정치규제를 거쳐 12대 의원으로 7선을 기록했다.
이보다 앞서 1976년에는 신민당 대표 최고위원으로 당수를 역임했다. 유진오, 김홍일, 유진산, 김영삼에 이은 5번째 신민당 당수였다. 1980년 2차 정치활동 규제기간에는 진안 추동지역 산장에 ‘소석헌’(素石軒)이라 써 붙여 놓고 표고버섯, 군밤, 땔나무 등 탈속생활을 경험했다. 이곳 추동 산골은 임진왜란 시 말 훈련장소로 마곡(馬谷)으로 불렀으니 일제 시 학병으로 끌려가 오사카에서 말부대에 근무한 인연과도 닿는 기연인 셈이다.
아호 소석(素石)은 보성전문 학생운동 시절 현상윤(玄相允) 총장의 ‘고집불통 검은돌’이라는 현석(玄石)에 맞서 ‘고집불통 흰돌’의 소석으로 정했노라고 들었다. 당시 학생운동권은 좌익계가 지배하여 몸집이 좋은 운동선수들의 스카웃이 절실했다. 그러나 현상윤 총장은 ‘학업 우선주의’를 내세워 운동선수 스카웃을 철저히 반대했다.
이 때문에 소석은 계동의 인촌댁과 가회동의 현 총장댁을 찾아다니며 호소했지만 고집불통의 ‘현석’께서 허락지 않았다. 보다 못해 인촌의 부인께서 현 총장에게 간곡히 당부하여 운동선수들을 스카웃함으로써 좌우익 대결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소석 이철승의 일대기>

▲ 소석 이철승 의장의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1922.5.15 출생. 전주 북중(1942), 고대 정치학과 졸업(1949),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원 국제정치학과 수료(1963)
△1946년, 반탁전국학생 총연맹 위원장, 전국학생총연맹 대표의장 △1954년, 제3대 의원 이후 4·5대 국방분과위원 △1961년 대한체육회장, 제15차 유엔총회 한국대표, 대한역도연맹 회장, 5.16 정치규제 해외망명 △1964년, KOC 위원 △1966년, 아시아 역도연맹회장 △1969년, 3선개헌반대 범국민 투쟁위 조직위원장, 한국인권투쟁위원장 △1970년, 신민당 입당 △1970년,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 △1971년, 8대 의원 △1973년, 9대 의원, 외무분과위원, 국회부의장, 한불의원협회장 △1975년 제30차 유엔총회 한국대표 △1976년 신민당 대표 최고위원 △1978년, 10대 국회의원 △1980년, 정치쇄신법 규제 △1984년 한국반탁반공학생운동기념사업회 총재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1986년, 88서울올림픽 조직위원 △1987년, 자유민주총연맹 총재 △1991년 통일준비국민협의회 공동의장 △1993년, 민족정론지 회장 △1994년, 자유민주민족회의 상임의장 △1996년, 서울평화상문화재단 이사장, 헌정 정각회 회장 △1998년, 대한민국 건국 50주년 기념사업위원회 회장 △1999년, 국군포로·탈북자 대유엔 인권외교 △2005년, UN평화군 성전추모 연합회장,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대표의장 △2006년, 대한민국 건국단체 총연합회장 △2007년, 대한민국 헌정회 회장 △2008년, (재)대한민국건국기념사업회 회장 △2009년, 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0호 (2016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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