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문고, 상동교회에 그의 정신 흔적

조선조 벼슬의 사표
어진 정승, 상진(尙震)
상문고, 상동교회에 그의 정신 흔적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조선왕조의 으뜸 재상을 꼽는다면 두 말 할 것 없이 황희 정승이다. 그러면 그에 버금가는 어질고 신망이 두터운 명재상이 있었다면 누구일까? 아마도 명종 때 영의정을 지낸 범허정 상진(尙震)이 아닐까한다.

▲ 은산 내지리에 있는 목천 상씨 선산 제각에 모셔져 있는상진 선생의 영정.

우선 조선 중기 문신이며 학자인 영의정 홍섬이 짓고 중종의 부마 송인이 글씨를 쓴 그의 신도비에 있는 인물평을 인용한다.
“우리나라의 재상 가운데 공명을 세우고 일생을 마친 사람은 어느 시대에나 없지 않으나 여러 대의 조정을 거치면서 신상에 재앙을 당함이 없이 덕을 지니고 장수하여 세상을 마치도록 임금의 은총을 받은 사람은 오직 범허정 상진 한 사람뿐이다”

청렴, 강직의 조선벼슬 사표

일생 동안 관후한 인품으로 청렴하게 살았다는 그에 관련해 일화, 두 가지를 소개한다.
첫째 이야기 … “상진이 어느 날, 길을 가다 두 마리의 소로 밭을 가는 농부를 만나 심심파적 삼아 물었다.
「여보시오, 어느 쪽 소가 힘이 더 세오?」
농부는 일을 멈추더니 상진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가만히 말했다.
「검은 소입니다」
「그 얘기를 귓속말로 할 건 없지 않소.」이에 농부가 대답했다.
「짐승이라고 저 못한다는 소리를 좋아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농부의 이 말에 상진은 크게 깨달아 그 후로 남의 결점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인생관이 몸에 배어 남에게 싫은 소리를 않았기에 훈구세력과 외척세력 간의 예민한 정치적 파벌 싸움 속에서도 원만한 인간관계를 늘 유지할 수 있어 무탈하게 운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둘째 이야기 … “상진이 영의정으로 있던 어느 해 여름 장마로 곳간이 내려앉았다. 사시사철 비워 있었지만 늙은 종이 「개축을 할까요?」라며 여쭈었다.
「곳간이 좋으면 채우고 싶은 욕심이 생길 터인즉 기왕 무너진 김에 깨끗이 치우고 관상수나 심으렴.」” 하고 말했다.
어떠한 관직에 있다 하더라도 이해관계가 작용하면 마음이 흔들릴 듯도 하지만 재물에 대해 철저히 담백한 입장을 유지한 평상심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특히, 아들이 과거에 붙지 못하여 음서(蔭敍)로 벼슬을 얻을 수 있음에도 이를 마다한 일로 보아 얼마나 강직한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청백리를 매우 소중히 존대하던 조선사회에서 이도(吏道)의 사표(師表)라 할 만한 행적이라 하겠다.

▲ 상문고등학교 전경

백제 유민촌서 나와 3정승으로 출세

상진의 본관은 목천(木川), 자는 기부(起夫), 호는 송현(松峴)·범허정(泛虛亭), 시호는 성안(成安)이다. 상(尙)씨의 집성촌이었던 충청도 천안 목천 지역은 백제의 유민이 많아 고려 초기 왕건에 저항하였던 까닭으로 축성(畜姓)으로 성이 바뀌어 한동안 상(象)씨로 불리기도 한 적이 있었다. 고려시대 한 때는 번성한 씨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 상진 이전에는 과거 급제자가 한 명도 없을 정도의 한미한 향리 집안 출신으로 그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고향인 충청도 부여를 떠나 한양의 명문가 출신 매부인 성몽정(成夢井)의 집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상진은 2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3년 후 별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예문관을 거쳐 29세에 예조좌랑에 발탁되었다. 33세에 호조와 병조의 정랑을 지내고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서는 사간원 장령, 사헌부 지평을 거쳐 성균관과 홍문관의 직임을 맡았으며 대사간이 되었다. 이어 동부승지, 형조판서,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한성판윤, 공조·호조·병조판서를 역임한 후 의정부 좌·우찬성을 거쳐 57세에 우의정에, 2년 후 좌의정에, 그리고 66세에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인 영의정에 올라 그야말로 입지전적 출세를 하였다. 주요 업적으로는 소장 관료시절 지방 관리의 탐학을 제거하고 농촌진흥책을 제시하였고, 부민고소법을 실시하여 민원을 살피는데 각별하였다. 우의정 때 저화의 사용과 수협법의 실시를 주장하고, 영경연사 때는 청렴하고 문장이 뛰어난 이황을 천거하였으며 좌의정 때는 서얼방금법의 개정을 주청하여 인재 등용의 문을 넓혔다. 그리고 영의정 재임시에는 임꺽정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좌의정 이준경과 더불어 사림을 등용하는데 힘썼다. 70세에 기로소에 들어가 공로가 많은 노 대신에게 주는 궤장()을 임금으로부터 하사받고 영중추부사라는 명예직을 끝으로 벼슬자리를 마감했다. 상진은 72세에 운명하면서 유언하기를 「나 죽은 다음에 업적을 이것저것 적을 것이 없이, 거문고 타기를 좋아해 술에 얼큰히 취하면 감군은곡(感君恩曲) 타기를 즐겼다고 적어라.」라고 말했다 한다. 임금의 아낌을 받으며 참으로 겸허하게 살아온 인고(忍苦)의 인생 역정을 압축한 표현인 듯싶다.

강남 상문고와 강북의 상동교회

▲ 신도비

상진은 한성판윤을 지냈을 뿐 아니라 관직 생활 대부분의 세월을 한양에서 보냈는데 지금 서울에 그를 기억할 만한 장소가 두 곳 있으니 강남의 상문고등학교와 강북의 상동교회다.
강남, 서초구 방배동 그의 묘소가 있는 터에 상씨 문중에서 상진의 음덕을 기리기 위해 상문고등학교를 설립했다. 많은 영재를 배출하여 명문 학교로 발전하고 있는 이 학교의 교정에는 그의 신도비가 서울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우람한 이 비석에는 일생동안의 업적과 사상이 3000여자의 행장에 담겨 새겨져 있다.
강북, 남대문과 한국은행의 중간쯤에 남대문시장으로 들어가는 언덕배기의 언저리에 상진의 집터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일대가 상정승골(尙政丞洞)이라 불렸다. 구한말에 개신교 계통 상동교회가 여기에 세워졌는데, 상가건물의 간판에 묻혀 교회라고 할 만한 분위기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오랜 역사를 품은 채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100여 년 전 조선의 운명이 가물거리는 촛불과 같을 때, 뜻있는 애국지사들이 은밀히 모여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던 장소이기도 하다.
자료 협조 : 상병욱(목천상씨대종회장), 상동규(시인, 「상진의 생애와 사상」저자), 황준역(상문고 법인실장)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3호 (2016년 7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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