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후손에게 복록

정역(鄭易)… 4朝 충성
600년 후손에게 복록
태종 이방원과 과거급제 동기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정역(鄭易)은 ‘한결같이 두터운 신망으로 4조(四朝 : 태조·정종·태종·세종)를 섬긴 인물로서 정역은 덕과 성품이 두텁고 무거우며 침착하고 웅대한 기상을 지닌 어진 신하로 나라의 기둥과 주춧돌이며 선비들의 모범이 되었다.’ [세종대왕이 내린 제문(祭文)]
그는 고려 말 이방원과 함께 문과에 합격하여 친밀한 벗이 되고 조선왕조 초기 국정 운영에 참여하면서 태종과 운명적 관계를 맺게 된다.

왕실과 사돈지간으로 권력반열 올라

개국 초반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태조의 5남 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정역의 딸을 숙의옹주로, 심온의 딸을 경숙옹주로 삼는다. 태종은 둘째 아들 효령대군의 배필로 숙의옹주를, 뒷날 세종이 되는 셋째아들 충녕대군의 배필로 경숙옹주를 들이니 왕실과 사돈지간이 되어 더욱 긴밀한 인간적 유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인품이 겸손한 정역이 세상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은 효령대군을 사위로 맞이하게 됐고, 그들은 죽은 후에도 지호지간의 가까운 자리에 유택을 마련하여 수백 년의 세월이 함께 흐른다. 서초구 서초동에 정역의 묘소가, 이웃 방배동에 효령대군 이보의 묘소가 있었으니 바로 그 근밀함을 설명해 주는 듯하다.
정역(鄭易)의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순지(順之), 호는 백정(栢亭), 시호는 정도(貞度)이며 할아버지는 소부소윤을 지낸 언이고 아버지는 판예의시사를 지낸 윤규(允珪)이며 어머니는 대사성을 지낸 설문우의 따님이다. 배위는 판종부시사 권사종의 따님이고, 큰아들 충경(忠敬)은 형조참판, 둘째아들 충석(忠碩)은 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손자 종(悰)은 문종의 사위이니 영양위로 단종의 매부이며 형조판서로서 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으나 단종 폐위 후 수양대군에 의해 광주에 유배되었다가 모반을 꾀하였다 하여 사약을 받고 죽었다. 또한, 셋째 손녀는 세종대왕의 8남 영응대군의 부인이다.
그는 고려 말 문과에 이방원과 동방(同榜) 급제하여 좌정언, 교주도 안념부사, 사헌부 지평, 참지의정부사 등을 역임하고 태종11년(1411)에 한성부윤으로 있으면서 명나라에 하정사(賀正使) 임정과 함께 부사(副使)로 다녀온 후 대사헌이 되었다. 이어 충청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판한성부사와 4조(이·호·형·병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였고 대제학을 거쳐 판중군도총제부사에 올랐다. 특히 판한성부사 재임시에는 업무 처리가 깨끗하고 옥사(獄事)의 심리가 공평하였는데,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고 정도(貞度)라는 시호를 받았다. 졸기(卒記)에 나타난 그의 인품은 ‘사람됨이 중후하고 근검하여 사치하지 않았으며, 비록 왕실과 혼인하여 벼슬이 1품에 이르렀으나 교만한 빛이 없고, 행정에 있어서는 너그러움과 간소를 위주로 하였다.’ 라고 적혀있다.

조상의 복록이 내린 해주정씨 문중

20세기 후반에 대한민국은 경제발전으로 국토의 모습이 상전벽해와 같이 달라지면서 도시 개발로 나라 전체가 부동산 바람에 휘말리며 희비가 엇갈리는 세태가 되었다. 특히 그동안 농지나 산림으로만 여겨왔던 토지가 갑자기 금싸라기 땅으로 변하자 각 성씨의 문중마다 대대로 내려온 유산을 잘 보전했던 집안은 그야말로 횡재수가 터져 조상 덕을 본 데가 한 두 곳이 아니다. 정부에서 지급된 토지보상금으로 종중의 숙원 사업을 추진할 소중한 자산이 확보된 것이다. 그래서 조상을 추모하고 현창하는 여러 가지 사업이 문중마다 벌어지고 후세를 위한 육영사업에도 관심을 갖게 돼 종친회의 역할이 활발해지고 있다.
서울 강남지역의 한가한 농촌이었던 정곡마을. 해주정씨 집성촌이었던 이 마을도 강북에 있던 법조기관들의 이전 대상지로 선정되면서 조상이 내린 복록이 눈 내리 듯 소복이 쌓이게 된다. 아마도 조상을 잘 섬겨왔기에 받은 마땅한 은총이리라 여겨진다.
정도공 정역의 묘소 아래, 후손들이 세거해왔던 일대에 법조단지가 들어서면서 해주정씨 종중에서는 옛 마을의 이름을 따 정곡빌딩이라는 우람한 외관의 건물을 동서로 마주보게 건축했다. 이를 바라보면 실로 해주정씨 문중의 위상이 한껏 돋보이는 듯한 데, 건물 앞에는 지금도 정곡(鄭谷)이라는 표석이 서 있고 그 뒤에는 정도공 묘소를 이전하면서 남게 된 신도비가 서울시 지방문화재로 보존되고 있어 고금(古今)의 두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장면이라 하겠다.
정역의 묘는 원래 서오릉에 자리를 잡았었는데 세조 때 경릉(덕종)이 들어오는 바람에 과천현 동쪽(서초동)으로 옮겼다가 1984년 법조단지가 이곳으로 정해지자 300년 된 신도비만 남겨놓고 다시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오계리로 이장하였다.

해주정씨의 후예, 정문부와 북관대첩비

일본이 2차 세계대전 전몰자의 위패를 모아 둔 대표적 사당이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다. 그 경내 한 구석에 외롭게 세워져 있던 비석이 재일 한국연구원장 최서면에 의해 다시 발견돼 [북관대첩비]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곧 조선일보에 정문부의 행적이 기록된 비석임이 보도되자 한 때 세인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적이 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을 당하여 국운이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고 민생이 도탄에 빠졌을 때 관민합작의 의병대장으로 왜적을 무찌르는데 공적을 세운 문무겸전의 영웅이다. 그는 함경도 회령에서 왜적에 투항하여 가등청정에게 왕자를 넘겼던 국경인 등 반역도당을 참살하고 왜군을 축출하여 북관 땅을 수복하였으며 전쟁의 승기를 잡는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바다에서 충무공 이순신의 승전보가 괄목할 만하고 육지에서 권율장군의 전공이 돋보일 때 조선시대 내내 벽궁한 지역이었던 함경도에서 정문부는 맹활약한 것이다.
정문부의(鄭文孚)의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이며 정도공 정역의 후예로 부사를 지낸 정신(鄭愼)의 아들이다.
선조 21년 문과에 급제한 후, 북평사(北評事)로 나아가 대활약을 하고, 임란이 끝난 뒤 예조참판, 전주부윤 등을 지냈으나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비겁자들의 모함을 받아 억울한 누명을 쓴 채 옥에서 고문을 받다 생을 마감하였다. 죽은 뒤 신원(伸寃)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문집으로 [농포집]을 남겼다.
북관대첩비는 임란이 종식된 후 100여년이 지나 숙종 때 임진왜란 당시 함경도에서 활약한 충의공 정문부와 휘하 의병들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길주군 임계 땅에 세워졌다. 훗날,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가 한국으로 다시 환송되어 남한에는 정문부 묘소 등 네 곳에 복제비가 세워지고, 북한에 인도되어 길주에 원래대로 복원되었다.
해주정씨 문중사에 쟁쟁한 인물들이 기라성 같지만 유독, 충의공 농포 정문부를 거론한 이유는 남충무(南忠武) 북충의(北忠毅)라고 할 만큼 그 공적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위상이 특출할 뿐만 아니라, 작금, 한국과 일본 간의 대립과 경쟁이 치열한 이 시대에 북관대첩비의 환송이 가져다주는 의미가 각별한 소회를 주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4호 (2016년 8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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