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섭 회장, 머슴살이서 사업가로
온갖 밑바닥 체험 불굴의 투혼기록

▲ ㈜라프 이태섭 회장. <사진=(주)라프>

가난과 절망을 이겨낸
꿈과 의지의 인간승리
이태섭 회장, 머슴살이서 사업가로
온갖 밑바닥 체험 불굴의 투혼기록

자신에게 주어진 태생적 운명을 거부한 사나이 이태섭(李泰燮)의 인생 고백록 ‘가난을 넘어, 죽음을 넘어’ ‘나의 인생, 나의 도전’(2015.7, 서영출판사)이 그의 출생의 비밀에서부터 절벽의 고비를 넘고 넘어온 진솔한 기록의 증언이다. ㈜라프 이태섭 회장의 과거는 서글프고 일면 부끄럽지만 오늘의 그의 꿈과 소망과 믿음은 너무나 당당하고 투명 정대하다.

‘김태면’이 ‘이태섭’으로 자란 슬픈 사연

이 회장은 충남 부여군 남면 송암리 송암부락 산촌마을에서 먹을 것도 없는 집안에 6남매 가운데 남자아이 장남으로 태어나 부모는 늘 집밖으로 나돌아 태어나자마자 외할머니 댁에 맡겨져 부모님 얼굴이나 사랑을 전혀 모르고 자라야만 했다.

▲ 어린 시절 이태섭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갈 수 없었기에 점심시간이 가장 괴로웠다. <사진=(주)라프>

위로 누이 둘과 아래 동생과 함께 네 자매가 외할머니 댁에 맡겨졌다. 외할머니는 부모의 출가에 대해 제대로 일러주시지 않았다.
아버지는 돈 벌러 서울로 가서 언제나 “곧 돌아온다”고 말하고 구박받던 어머니는 잠시 외출했다고 변명했다. 철부지 시절이 지나면서 겨우 눈치를 채고 보니 이태섭 소년은 왜 호적에도 오르지 못한 버려진 자식인가를 알게 됐다.
아버지는 미남형에다 여러 가지 재능이 많았지만 김삿갓처럼 한량(閑良)으로 떠돌았다. 어머니는 어려운 살림에 견디지 못해 가출했다가 나중에는 개가(改嫁)하고 말았다. 이 회장 남매가 아무리 기다려도 다시 돌아오지 않을 부모님 이야기를 외할머니께서는 숨기며 다독거렸다.
이 회장의 아명(兒名)은 ‘태면’으로 불렸다. 족보가 있는 통천김씨 집안의 귀중한 자식이었지만 늦은 나이인 아홉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입학하려고 보니 호적에 등록이 안 돼 있었다. 외할머니가 이런저런 어려운 살림에 출생신고를 생각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하는 수 없어 호암부락 이장과 상의한 끝에 여럿이 신원 보증하여 입학절차를 밟았다.
이 과정에 뭔가 잘못됐는지 통천김씨네 김태면이 엉뚱한 ‘이태섭’으로 바뀌어 초등학생이 될 수 있었다. 마을 친구들은 ‘태면아’라고 불렀지만 학교에서는 ‘이태섭’으로 불렀다.
학교 가는 10리 길은 늘 배 고프고 추운 길이었다. 이태섭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갈 수 없었기에 점심시간이 가장 괴로웠다. 운동회날이나 소풍날은 부모님 손길을 잡고 오는 친구들을 보면서 너무나 부럽고 자신은 쓸쓸했다. 학교가 끝나 집으로 오면 단짝친구처럼 기다리고 있는 지게를 지고 땔감나무 하러 다니는 것이 일과였다.
집에서나 학교에서 편하게 공부할 여건이 못 됐지만 5학년 때는 또래들보다 ‘키 큰 아이’로 반장을 맡아 담임선생님의 격려와 지도도 받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이 회장은 반장했던 일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그럭저럭 초등학교를 졸업했지만 꿈의 중학교 진학은 생각할 형편이 되지 못했다. 부모사랑 없이 자란 이태섭은 벌써 그만한 눈치가 있었기에 외할머니 댁 살림에 기탁하여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로 했다.

▲ 어린시절을 보낸 외할머니집 앞에서…<사진=(주)라프>

머슴살이 거쳐 상경 구두닦이, 자전거배달

이 무렵 이태섭의 큰누나는 돈 벌려고 서울 구로동 수출 공단으로 취직해 가고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누이도 뒤따라 상경했다. 홀로 남은 이태섭은 외할머니와 상의하여 60대의 상부잣집 머슴으로 들어갔다.
머슴 넷에 식모 둘을 두고 있는 대농(大農)으로 논밭 외에 인삼밭을 경영하여 밤낮없이 일이 연속됐다. 겨우 16세의 어린 나이지만 몸이 건장하여 몸 아끼지 않고 ‘상머슴’으로 손색없이 일했다. 나이 든 선임 머슴들도 좋아하고 격려해 주었다. 1년간 열심히 농사일을 하고 세경으로 쌀 세 가마니 상당을 받았다.
당시 시세 돈으로 2만4천원에 해당하니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남아 있는 여동생과 외할머니께 얼마큼 드리고 1만5천원을 깊숙이 간직하여 서울로 올라왔다. 구로동의 큰누나를 만나기 위해 용산 시외버스 터미널에 도착했지만 갈 길이 막막했다.
구로동 가는 버스길을 물어봤지만 안내해 주는 사람마다 달라 우선 대합실에 앉아 이런저런 궁리하고 있으니 많은 건달들이 접근해 왔다. 이들이 시골 촌놈으로 얕보고 온갖 수작을 부려 목숨과도 같은 돈 1만5천원을 뜯기고 말았다. 결국 건달들의 세계에 동참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손쉬운 일이 구두닦이였다. 손님들의 구두를 찍어오는 ‘찍세’로 시작하여 닦아주는 ‘딱새’로 익숙해 졌다. 그러나 수입이 시원치 못하면 오야봉의 성화가 극성이라 멀리 남대문시장까지 갔다가 뜻밖에도 작은이모를 만날 수 있었으니 행운이었다.
작은이모는 식품가게 운영으로 자리를 잡고 있었지만 소원이던 어머님 소식은 전혀 모른다고 딱 잡아뗐다. 그로부터 이모네 식품가게에서 자전거 배달하며 숙식하니 배불리 먹을 수 있어 좋았다. 자전거 배달에 익숙해지자 돈 벌려고 서울로 와서 언제까지나 밥만 먹고 자전거 배달만 하겠느냐는 회의가 들었다.
수소문 끝에 운전기술을 배우면 자립하기 좋다는 권유를 받고 이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업소개소를 통해 버스회사 조수로 팔자를 고쳤다.

▲ 졸업식 때의 아픔을 회상하며 42년만에 모교 정문 앞에 선 필자. <사진=(주)라프>

운수사업 승승장구 11년에 부도로 1년형

운수회사인 제일고속을 찾아가니 아직 운전면허가 없으니 조수업무부터 견습하라고 지시했다. 온갖 잡역으로부터 운수회사 안팎 업무를 3년간 배우고 나니 사장이 운전면허를 딸 때가 됐다면서 격려하여 독립기회를 얻었다.

▲ 운수회사 사장이 되다. <사진=(주)라프>

직접 사장이 4.5톤 트럭 구입을 안내하여 1981년 21세 나이에 꿈에 그리던 트럭 주인이 됐다. 이로부터 밤낮없이 거의 ‘독종’이라는 별명을 들어가며 열심히 노력하니 2년만에 트럭이 10대로 늘어났다.
이에 ㈜동아특수통운이라는 회사를 설립하여 트럭을 52개까지 늘리니 손색없는 운수회사 사장이 되어 돈 벌어 출세하겠다며 무작정 상경한 꿈을 성취한 기분이었다.
동아특수통운은 승승장구 기세였다. 젊은 사업주의 도전과 성취욕은 아무런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주변에서 화장품 사업에 투자를 권유하여 5억원을 망설임 없이 투자했다. 막상 투자를 하고 보니 경영난 악화로 투자금 회수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할 수 없어 아예 화장품 회사를 인수하고 보니 밑 빠진 독이나 다름없었다.
이 무렵 운수사업마저 대형 인사사고로 고전을 겪게 됐다. 이로부터 사채시장에 의존하다 보니 1992년 5월 어음부도 사건으로 도산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창업 11년만에 무려 22억8천만원의 빚을 지고 무너졌으니 승승장구에 도취했던 과신의 실수인 셈이다.
부도란 기업인에게는 경영부실이라는 치욕이자 사망언도나 다를 것이 없다. 경찰의 수배령이 내린 상황이라 당장 눈앞이 캄캄하여 진퇴를 분간하기 어려웠다. 고향친구로 ‘의형제’ 결연한 손철상 상무에게 회사정리를 부탁하고 우선 도피했다. 귓전에 빚쟁이들의 원성이 들려오니 신경쇠약으로 숨어 지내기도 어려웠다.
자수할 생각도 해봤지만 용기가 나지 않아 자살로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고향 부여행 버스를 타고 내려가 막걸리 한 병을 들고 거닐다가 노인어른을 만나 “젊은이가 그러면 못 쓴다”는 충고를 들었다. 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여주며 재기하라는 격려에 감동하여 꾸벅 절하고 다시 서울로 올라왔다. 그렇지만 어디 가서 무엇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는지 막막했다.

사채로 망한 악몽 씻고자 사채굴 체험

▲ 자살을 하려고 왔던 둑방길을 다시 찾아가 회상에 젖은 이 회장. <사진=(주)라프>

경찰의 추적을 받고 있는 부도범(不渡犯) 처지로 서울시내 어디에 숨을 곳이 있는가. 고려대 구로병원 영안실이 눈에 들어왔다.
영안실에는 조문객들로 붐비니 섞여 있을 수가 있었다. 먹다 남은 음식이 있어 허기를 채우기도 안성맞춤이었다. 자정이 넘으면 조문객들이 떠나가니 빈 소파에서 잠을 잘 수가 있었다.
아침이면 문병객으로 가장하여 병원으로 갔다가 시간을 보낸 후 저녁이면 다시 영안실을 찾아 노숙자 생활을 익혔다. 그러나 청소 아줌마들의 눈치가 보여 한 곳에 눌러 있을 수가 없어 여러 대학병원 영안실을 찾아다녔다.
한참 지나고 보니 노숙자 생활로 탈출구를 찾을 수 없다는 판단에 이르러 회사로 손철상 상무에게 전화를 하니 곧 찾아뵙겠다고 응답했다. 이튿날 작은이모와 함께 손 상무가 찾아와 자수하는 방법 밖에 도리가 없겠다고 조언했다. 운수사업 확장할 때 트럭구입 관련 보증을 섰던 작은이모도 자수해야 재기할 것 아니냐고 당부했다.

▲ 교도소 전경. <사진=(주)라프>

결국 부도 1년 5개월만인 1993년 10월 자수하여 실형 1년형을 선고 받아 복역 후 출소하니 부실경영주 전과자(前科者) 신세가 됐다. 교도소 수형생활은 고통과 참회의 시간이었지만 결코 낭비한 세월만은 아니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살길을 찾아야겠다고 세상만사를 공부하는 기회가 됐기 때문이다.
잘 나가던 운수사업이 사채로 망한 악몽을 씻고자 궁리 끝에 제 발로 사채소굴을 찾았다. ‘신흥대부’라는 간판을 보고 사장을 찾으니 40대의 부산사투리 오야봉이 “이런 곳에서 일하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운수사업 이전부터 온갖 밑바닥 삶을 체험했던 이야기로 “어떤 일이든 시키는 대로 할 수 있다”고 약속했다. 오야봉이 6억4천만원의 빚을 반드시 갚겠다는 약정서에 서명하라고 해서 응낙했다. 회사가 부도나기 직전, 급전(急錢)을 돌려쓰기 위해 어음할인 했던 빚이었다.
행색이 너무 초라했던지 사장이 운동화와 운동복을 사 입혀 주고는 고참들을 따라 견습 실습하라고 지시했다. 2~3명으로 편성된 조(組)별로 사채 원리금을 받으러 출동하면 폭언 폭행이 예사이고 인정사정이 없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받아내는 모습이 바로 ‘조폭의 세계’였다.
한 달쯤 견습이 끝나자 “혼자 나가 작업성과를 가져오라”면서 어느 볼트회사를 소개해 줬다. 사채꾼 스타일로 가방을 끼고 거드름을 피우며 찾아가자 구멍가게형 회사 사장이 형편이 안 된다면서 ‘죄송’ ‘죄송’하다는 말만 했다. 어쩔 도리가 없다고 생각되어 귀사 후 솔직히 보고 하니 무서운 전주(錢主)의 본색이 드러났다. 고참이 미리 멀리서 지켜본 후 고자질을 했는지 그 따위 방식으로 언제 돈을 받아 오겠느냐며 죽도록 매질을 했다.
사체를 갚아 새 삶을 찾아보겠다는 꿈마저 암담하게 느껴지고 말았다.

▲ 인수해 수리중인 찜질방 앞에서…<사진=(주)라프>

살기 풍기는 겁박 속 2년만에 사채결별

오야봉이 다시 고참들과 동행하여 한 번 더 실습해 보라고 지시하여 그 회사를 찾아갔다. 고참들이 숙달된 행태로 협박 공갈하니 사장이 구석에서 얼마큼의 돈을 내 놓았다. 그러나 고참이 발길로 걷어차며 죽일 듯이 겁박하자 사장이 깊숙한 곳에서 교육보험계약 통장과 도장을 내 주며 계약을 해지하여 사채빚을 몽땅 회수했다.
이 과정에 참여하여 시종일관 지켜 본 소감으로는 도저히 못할 짓이라고 느꼈다. 오야봉도 “너는 안 되겠으니 이번 기회에 장기(콩팥)나 팔아 빚 갚고 나가라”고 지시했다. 실제로 오야봉이 병원까지 끌고 가 장기매매를 서약하라고 강압하니 죽음의 두려움을 느낀 살기(殺氣) 앞에 오금을 펼 수 없었다.
이에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다. 중소기업들을 대상으로 이자를 다소 낮춰 빌려줬다가 제때에 받는 ‘박리다매’ 방식으로 해보겠다고 약속했다. 과거 운수사업과 화장품 사업으로 거래한 중소기업들이 많다는 사실도 메모로 제시했다. 오야봉이 이를 듣고 나름대로 주판알을 굴려보더니만 “책임지고 잘 해보라”고 허락했다.
이튿날부터 지면 있는 기업인들을 찾아 앞으로 꼭 재기하여 신세를 갚겠다고 약속하며 사채를 빌려주니 약정대로 이자와 원금을 꼬박꼬박 갚아주어 좋은 실적을 쌓을 수 있었다. 이에 오야봉이 매우 흡족하여 처우도 개선해 주고 약정했던 빚도 일부 탕감해 주는 선심을 베풀었다. 그로부터 2년만에 약정서 빚을 청산하고 사채소굴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길고 험난했던 이야기다.

성북동 찜질방으로부터 화려한 재기

이제 홀가분한 기분으로 본래의 왕성한 사업가 이태섭으로 되돌아가 재기하여 명예를 회복할 수순이었다.
약간의 종자돈과 친지들의 신용을 담보로 부동산 시장을 기웃거려 봤다. 부동산 경매시장 물건들을 잘 살펴보라는 권유도 있었다.
부동산 분야는 교도소 생활 1년간 나름대로 연구도 하고 출소 후 책을 찾아 읽고 신문을 탐독하여 칼럼도 쓰고 경매물건 감별과 투자수익 계산법도 익혔다. 이때 어느 경제신문 기자와도 사귀고 독자들의 상담도 받아봤다.
어느날 성북동에 유찰(流札)을 거듭하고 있는 좋은 물건이 나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건평 1,300평에 달하는 찜질방 빌딩으로 유찰을 거듭하는 과정에 48억대로 떨어졌다. 이를 경매낙찰로 잡았으니 부동산 사업 발판을 확보했다. 이때 고마운 분의 획기적인 도움이 나타났다. 나염공장을 경영하는 어느 사업주가 차용증도 받지 않고 18억원의 거금을 통장으로 입금시켜 주어 은행 보증대출을 합쳐 이를 인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곳 첫 재기의 사업장을 과감히 리모델링하면서 쉼터를 만들고 공연장마저 꾸몄으니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휴식공간으로 탄생했다. 관내 노인들을 정기적으로 초청하여 무료서비스 하고 등도 밀어드리니 금방 친절 찜질방이란 소문이 퍼져나갔다. 더구나 인기 연예인 초청행사를 유치하자 손님이 늘 바글바글 끌었다.
찜질방에서 수익이 나타나자 일부는 빚 상환하면서 새로운 서비스와 편익시설에 투자하고 일정분은 반드시 경노잔치 등에 활용하는 원칙으로 오늘의 ㈜라프 부동산 컨설팅 사업군을 일으킨 화려한 재기(再起)스토리를 엮어 낸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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