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습니까’

조선 개국공신 정탁(鄭擢)
역성혁명 불길 지펴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겠습니까’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간절한 「외침」이 혁명을 촉발하다

고려 말의 암울한 정국은 앙샹레짐(구체제)을 고수하려는 세력과 묵은 적폐를 혁파하여 세상을 바꾸려는 세력 간의 민감한 대립으로 혁명 전야의 긴박함이 맴돌고 있는 정황이었다. 정몽주를 중심으로 하는 수구세력이 혁신세력의 핵심인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 하자 광흥창사 정탁이 이방원에게 외쳐 말하며 결심을 촉구한다.
‘백성의 이해가 이 시기에 결정되는데 … … … 왕후장상이 어찌 따로 혈통이 있겠습니까?’
정탁의 간절한 이 외마디는 곧 조영규의 행동으로 옮겨져서 죽은 판개성부사 유원을 조상하고 나오는 정몽주를 습격하게 된다. 말이 목덜미에 칼을 맞으며 안장에서 떨어진 포은이 도망치자, 조영무 · 고여 등이 쫓아가 가차 없이 주살하고 만다. 결국 왕씨 옹립을 고수하여 고려를 지켜내려는 수구파가 와해되고 신진 사대부에 의한 역성혁명의 서막이 올려 진 것이다.
1392년 7월 16일 배극념·조준·정도전 등 50여 명의 대소신료와 한량기로들이 국새를 받들어 이성계의 저택으로 가서 왕위에 오를 것을 청하고, 다음 날, 남은과 정희계가 공양왕을 폐하는 교지를 가지고 궁궐에 나아가 선포하면서 이성계는 백관의 추대를 받으며 수창궁에서 즉위하게 된다.

▲ 춘곡(春谷) 정탁(鄭擢)의 묘소.

조선 개국 1등공신이 되다

정탁(鄭擢)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여괴(汝魁) 또는 축은(築隱), 호는 춘곡(春谷), 시호는 익경(翼景)이다. 고려 의종 때 중랑장을 지낸 시조 정극경의 9세손이며, 판사 책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제학 포다. 아버지는 정당문학 추(樞)이며 어머니는 좌리공신 청주한씨 대순의 딸이고, 부인은 삼중대광 전의이씨 사안(思安)의 딸이다. 예문춘추관 태학사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황제에게 억류돼 유배 중 죽은 정총의 아우이기도 하다.
정탁은 고려 말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춘추관 수찬, 사헌부 규정, 좌정언을 거쳐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한 뒤 광흥창사가 되었다. 이때 역성혁명의 결정적 계기가 된 극적 발의를 한 공로로 개국공신 1등에 책록 되었고, 이듬해 사헌부 지평, 성균관 사예를 거쳐 교주강릉도 안렴부사로 나가 대장군이 되었다가 성균관 대사성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우·좌승지, 중추원학사 등을 역임하고 도평의사사로 청성군에 봉해졌으며, 이해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을 도와 정사공신 2등이 되었다. 또 예문춘추관태학사, 정당문학, 삼사우사, 판한성부사를 역임하고, 한때 살인죄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으나 공신이기에 풀려나 개성유후가 되었다. 1408년 태조 이성계가 죽자 고부청시사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다음 해 세자좌빈객, 참찬의정부사가 되었다. 1412년 명나라에 정조사로 다시 다녀왔으며 이후, 청성부원군에 진봉되고 세종3년(1421) 진하사로 명나라에 또 다녀온 후 우의정에 올랐으며, 죽은 후 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3형제… 탁(擢)의 맏형, 총(摠)

청주정씨 족보에 보면 정당문학을 지낸 추(樞)에 세 아들이 있다. 맏이가 총, 둘째가 증, 셋째가 탁이다. 한 가문의 형제가 함께 조정에 나아가 중책을 맡아 나랏일을 보는 경우도 흔치는 않은 일이다. 이들 형제는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동생은 목숨을 보전하여 귀국하였으나 형은 꼿꼿한 조선 선비의 자세를 지키다가 머나먼 땅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사신으로 간 모든 사람들이 명나라 황제가 내린 의복을 모두 차려 입었으나 정총만은 마침 신덕왕후의 상중이라 상복(喪服)을 입은 것이 황제의 비위에 거슬려 표·전문을 핑계로 그를 중국 땅에 묶어 둔 것이다.
정총은 고려 말 문과에 장원하여 춘추관 검열에 이어 대간, 응교, 사예를 거쳐 대호군에 이르고 형조·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정당문학에 이르렀다. 조선 개국에 동참하여 개국공신 1등으로 서원군에 봉해지고, 정도전과 함께 [고려사]를 편찬하였다. 태조4년(1395)에 예문·춘추관 태학사로서 왕의 고명(誥命) 및 인신(印信)을 줄 것을 청하러 명나라에 파견되었다가 표문의 내용이 불손하다 하여 황제에게 트집을 잡혀 환국하지 못하고, 중국 땅에서도 남쪽 오지인 운남성 대리위라는 곳에 유배도중 만리 객지에서 원통하게 생을 마감했다. 글씨를 잘 썼으며 자신의 청절(淸節)을 매미에 비유하여 “매미는 맑고 고결함이 뭇 벌레와는 달라, 그 생애는 이슬을 마시고 바람을 읊는다”라 하는가 하면 “높은 가지에서 마음대로 큰 소리 내지 말라, 거마제비가 뒤에서 노려보고 있을까 두렵구나” 라며 청절로 인해 자신이 현실에서 배제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그의 자는 만석(曼碩)이고 호는 복재(復齋)이며 시호는 문민(文愍)으로서 문집으로「복재유고(復齋遺稿)」를 남겼다.

태조·태종 擢, 명·선조 琢은 동명이인

청주정씨 문중사에 한글 표기로는 같으나, 한자로는 생존 시대가 다른 두 사람이 있다. 태조-태종 때 ‘뽑을’ 탁(擢)자의 익경공과 2백년쯤 지나 명종-선조 때 ‘쪼을’ 탁(琢)자의 정간공이 바로 그들이다. 해마다 원주시에서 주관하는 강원감영제(江原監營祭)에 단골로 등장하는 인물들로서 익경공은 교주강릉도안렴사로서 제1대 강원관찰사를 지냈고, 정간공은 제200대로서, 두 분 모두 관찰사 행차 행렬에서 볼 수 있다.
정탁(鄭琢)의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이며 현감 원로(元老)의 증손이고 이충(以忠)의 아들로서, 퇴계 이황의 문인으로 사마시를 거쳐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정언, 헌납 등과 교리로 춘추관기주관을 겸직하며 [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조좌랑과 응교 등을 거쳐 대사헌에 올라 진하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또, 우찬성으로서 사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좌찬성으로서 왕과 세자를 호종하였다. 또한 곽재우·김덕령·유정·한백겸 등 출중한 인물들을 발탁하여 왜란 극복에 기여하게 하였으며, 특히「논구이순신차(論救李舜臣箚」라는 글로 2차 국문에 직면한 충무공 이순신의 운명을 살려낸 일화로 유명하다. 이후 우의정과 좌의정에 올랐고 판중추부사에 이어 영중추부사가 되어 호종공신 3등으로 서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봉조하에 이르렀다. 퇴계와 남명을 동시에 사사(師事)한 사람들 중 정승자리에 오른 유일한 인물로서 경서(經書)는 물론 천문, 지리, 병법 등에 박학다식하였고, 경북 예천의 도정서원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문집으로「약포집」「용만견문록」「용사일기」등을 남겼다.
(자료협조 : 청주정씨대종회, (사)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정만용감사, 원주시 문화과)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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