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聲振(강성진) 전 삼보증권 회장 회고록
‘증권 반세기’ 역사증언

살아있는 한국증권사
‘증권 반세기’ 역사증언
姜聲振(강성진) 전 삼보증권 회장 회고록
아직도 ‘三寶(삼보)’ DNA는 살아있다 자부

한국 증권산업의 살아 있는 역사로 꼽히는 강성진(姜聲振) 전 삼보증권(三寶證券) 회장의 회고록 ‘증권 반세기’에 증권산업 비화가 나온다. (2014. 10 굿모닝북스) 장 전 회장은 올해로 여든아홉으로 지난 세월 증권업계 투신 55년에 걸친 체험과 감회를 역사증언 형식으로 기술했다.

60년대 경제기자 주요 취재원의 회고록

▲ 강성진 전 삼보증권 회장.

1960년대 초보 경제기자들은 삼보증권 사람들을 부러워했다. 상과대학 출신들이 삼보증권에 입사했노라고 우쭐대는 소문을 많이 들었다. 당시 귀동냥으로 삼보가 한국 증권산업을 선도하며 주식 대중화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도 들었다.
강 회장은 1964년 삼보증권을 인수한 후 금방 두각을 나타내어 경제기자들의 주요 취재원이었다. 증권업계 최초의 공채인재 공모가 주목을 끌었고 자본자유화와 주식 대중화 기사를 작성할 때는 삼보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었다. 이 무렵 초보 경제기자를 강훈(强訓)으로 내 몰았던 경제부장이 늘 강성진과 삼보증권의 성공담을 예시했던 기억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 뒤 세월이 흘러 1등 삼보증권의 이름이 사라지고 강 회장의 명성도 잊혀지고 말았다. 헤아려 보니 삼보증권이 대우증권으로 흡수된 지도 30년이 훨씬 넘었다.
어느 날 신촌 연대 가까이에 위치한 김동길 박사 댁에서 (사)태평양시대 강흥구 이사장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보니 뜻밖에도 강 회장의 장남이었다. ‘태평양시대’는 김동길 박사가 창업하여 이끌어 오다가 후계자로 강 이사장에게 물려주었다.
이날 첫 만남에서 그의 부친의 회고록 ‘증권 반세기’를 받아 흥미와 관심을 갖고 순식간에 대강의 줄거리를 읽었다.
회고록에 따르면 잘 나가던 삼보증권이 1983년 12월 대우그룹 계열 동양증권으로 합병되면서 ‘삼보’라는 상호를 존치시키기로 합의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대우증권’으로 개칭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삼보’는 없어졌지만 강성진 회장은 그 뒤에도 한국증권업협회장과 명예회장, 증권시장 안정기금 이사장, 증권동우회 회장과 명예회장을 역임하고 지난 2000년에는 삼보출신 사우들이 설립한 BNG증권 명예회장을 맡아 2013년까지 활약했으니 실로 증권 반세기이자 한국 증권산업의 산 증인이다.

충남토건 최준문사장 만나 증권인의 길

증권인 강성진 회장은 1927년 충남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의 중농집 7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나 부모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집안에서 천자문과 소학(小學), 대학(大學) 등 한문을 익힌 후 소학교를 나와 서울로 올라와 3년제 경성상고 상과를 졸업했다.
공부를 잘해 늘 1, 2등을 차지하여 졸업하자마자 성적순 배정에 따라 현 농협의 전신인 금융조합에 취직했다. 해방 직전인 1944년 아산 선장 금융조합 초임사원으로 뒷날 박정희 대통령의 생시 마지막 공식일정이던 삽교천을 건너 자전거로 출퇴근했지만 오래지 않아 8.15를 맞았다. 해방 뒤 2년만에 성균관대 경제학부에 지원, 심산 김창숙 학장의 특별 배려로 입학했지만 2년만에 6.25를 만나 학업을 중단했다. 성대 졸업은 나중에 명예졸업장으로 대신했다.
피난시기에는 인민군 천지 하에 숨어 지내듯 했지만 혈통보존을 위해 결혼도 하고 자녀도 출산했다. 그 뒤 휴전 직후 동아건설산업 창업주인 충남토전(忠南土建) 최준문(崔竣文) 사장을 만나 필생의 증권인생 길로 들어섰다. 당시 충남토건은 대천 방조제 공사를 수주하여 사세가 부쩍 확장되던 시기로 일제하의 금융조합 출신인 강성진을 경리과장으로 채용했다. 1956년, 충남토건이 동아건설산업으로 발전하여 서울 서소문동에 터를 잡을 때는 경리부장으로 함께 상경했다.
강 경리부장은 금융, 회계분야에 밝아 동아건설의 자금운용 실무책임을 맡아 최 사장의 신임을 받았다. 어느 날 최 사장이 동명증권을 인수하여 강 부장을 상무로 승진시켜 증권업무를 전담시켜 이로부터 증권 반세기가 시작된 것이다.

명동 거래소 시절의 난동과 파동

1958년, 동명증권이 명동 메트로호텔 옆에 사무실을 두고 있을 때 증권거래소는 난장판 지경이었다. 이 무렵 증권사가 60개 넘게 난립했다가 1년만에 40여개사로 줄어들곤 했으니 증권시장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투자자들이 수시로 난동을 부리기도 했고 한·일 국교 정상화를 ‘굴욕외교’로 규정하여 정치권의 반대운동도 극렬했다.
이 같은 혼란기를 거쳐 강성진 상무는 1962년 영화증권 사장을 거쳐 1964년 삼보증권을 인수하여 증권업계에 1등주의 자부심을 쌓아 올렸다. 삼보증권 인수 1년만에 영업실적 제1위를 기록했으니 그 사이 증권 관련 전문적인 분석력과 장기적인 안목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회고록에는 동명증권 시절 동아건설이 대한통운을 인수한 과정의 일화가 나온다. 강성진 상무가 동명증권을 떠나자 최준문 사장이 직접 증권업무를 맡아 대한통운주 매수작전 끝에 이를 인수했다는 이야기다.
당시 통운주(通運株)는 한전주(韓電株), 중석주(重石株)와 함께 3대 자산주로 투자의 대상으로 꼽혔지만 최 사장이 통운주를 매수하다가 결국 인수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최 사장이 통운주 매수작전에 너무나 열중하여 지병인 신장병 악화로 1985년, 65세의 나이로 안타깝게 별세했다는 이야기다.
대한통운은 1930년, 일제시 조선비곡창고㈜로 발족하여 전국적인 물류조직을 두고 있었지만 1962년 내륙운수 최대인 한국운수와의 합병으로 국내 최대 종합물류회사로 발돋움했다. 그러나 대한통운의 거대조직 사운(社運)은 순탄치 못했다. 동아건설 그룹에 편입된 후 창업주의 장남 최원석(崔元碩) 회장 시절 리비아 대수로 공사 수주시 대한통운을 공동담보로 끌어넣었다가 그룹이 파산할 때 함께 부실기업으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그 뒤 대한통운은 CJ그룹이 인수하여 CJ대한통운으로 팔자를 고쳤다.

증권계 큰손, 풍운아 윤응상회장과 악연

강 회장은 증권인생 반세기 속에 증권계의 큰손이자 풍운아로 불린 윤응상 회장을 만난 것이 일종의 악연이라고 말했다. 윤 회장은 강 회장보다 12년 연상의 증권인으로 일본 중앙대 법학과를 나온 박식에다 호탕한 성품으로 증권업계를 쥐고 놀았다.
윤 회장이 자유당정부 군부 실력자인 김창룡 특무부대장, 헌병사령관 원용덕 장군 등과 잘 어울렸으니 그의 행동반경의 폭을 짐작할 수 있다. 또 동양통신 발행인으로 언론계서도 활약하다가 이를 성곡 김성곤(金成坤)에게 넘기고 증권사의 설립, 인수, 매각 등 바람을 일으켰다. 윤 회장이 소유 또는 지배한 증권사가 10여개에 달했지만 모두 매각하거나 파산했던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이 때문에 강 회장은 윤 회장과의 질긴 인연을 가장 후회스러운 대목이라고 적었다. 그의 무리한 매수작전이나 공매 공세 파장을 겪었기 때문이다.
1962년 2월, 한전주 ‘책동전’ 때는 윤 회장이 자기 주식이라고 위임하여 이를 팔고 나면 새 주인이 나타나 곤욕을 치렀다. 5.16 정부 실세들의 4대 의혹사건의 경우도 증권을 전혀 모르는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윤 회장의 손에 놀아난 사건이 아닐까 짐작한다.

1등주의 삼보인재는 아직도 활약

강 회장은 삼보증권 인수 후 외형확장으로 업계 선두를 달려온 1등주의 시절을 회고하며 주식 대중화 시대를 앞당기기 위해 전국 지점망을 구축한 것이 앞만 내다보며 달려온 시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시기에 오일쇼크 후유증이 덮치고 크고 작은 창구사고가 잦았다.
한창 약정고를 확장하고 있을 때 내부에서 시재금 부족이라는 투서가 나왔다지만 강 회장은 사세 확장기의 대수롭지 않은 사고로 여겼다. 그러나 검찰과 증권 감독원의 조사가 심상치 않은 사태임을 경고했다. 급히 회사채를 발행해 시재금 부족문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제시했지만 당시 재무부가 난색을 표시했다.
하는 수 없어 강경식(姜慶植) 재무부 장관을 만나 회사를 팔아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우그룹 김우중 회장과 협의 끝에 동양증권과 합병으로 처분키로 했다. 합병조건으로 고객들의 계좌 100% 인수와 삼보인들의 고용승계 보장을 요구하여 대우 측의 동의를 받았다. 당시 삼보증권직원 740명, 동양증권 575명이었다. 합병이후 상호는 삼보증권으로 삼기로 합의했다.
이 결과 1983년 12월 삼보증권은 강성진 경영 19년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합병사가 대우증권으로 새 출발하면서 삼보증권 이름도 사라지고 말았으니 여한이 남을 수밖에 없다.
강 회장은 ‘삼보’의 1등주의 DNA는 아직껏 살아 있노라고 회고록을 통해 강조했다. 지금도 매월 삼보 동우회 모임을 갖고 살아 있는 삼보 DNA를 보고 위안을 받는다는 심정을 밝혔다.
△인수 공모부 명호근 부장 : 쌍용투자증권 사장, 회장 역임 △국제부장 국흥주 동아일보 해직기자 출신 : 쌍용투자증권 국제부장, 런던 사무소장 역임 △과장 이원익 : 쌍용투자증권 뉴욕지점장, 쌍용투자자문 사장 역임 △과장 구자삼 : 대우증권 런던 법인장, 현 대학교수 △대리 서부택 : 씨티뱅크증권 사장 역임 △대리 황철관 : 쌍용투자증권 도쿄지점장 역임 △1981년 신입사원 송윤빈 : 대우증권 취리히 지점장, 노루홀딩스 CFO 역임 △초대 조사부장 최덕근 : 고려증권이사 역임 △2대 조사부장 손우헌 : 쌍용템플턴투자신탁 사장 역임 △조사부 박병택 대리 : 한솔투자자문 이사 역임 △조사부 박병택 대리 : 한솔투자자문 이사 역임 △조사부 신입사워 신성호 : IBK증권 대리 역임 △신입사원 신후식 : 대우경제연구소 연구원, 경제학 박사, 국회입법 조사관 역임 △채권부장 배영춘 : 명동 채권시장 황제 명칭 △과장 이승배 : 고려증권 소공지점장, 전국 최고 약정고 기록, 삼보출신 투자자문회사 설립 △과장 남상명 : 산은증권 상무 역임 등.
△명동거래소 시절 김성규 이사 : 우풍상호신용금고 대표 △조선일보 해직기자 출신 김영용 기획실장 : 전자신문 사장, 한국경제인문 사장 역임 △박명남 상무 : 한신공영 회장 역임 △이철영 기조실장 : 사모펀드 회장 △오세호 상무 : 한신증권 사장 역임 △이연우 영업부장 : 고려증권사장 역임 △김재홍 여의도 지점장 : 쌍용화재보험 사장 역임 △임철규 기획실 차장 : GNB증권 초대사장 역임 △공채 1기 전영상 : 한일투자금융 사장 역임 △기획실 대리 김남인 : 대우증권 전무, 아시아 인베스트먼트 대표 역임 △인천지점 여직원 류미경 : 메리츠증권 부장, 장연순 대우증권 부장

길거리 ‘삼보’ 글자만 봐도 가슴 두근

▲ '증권 반세기- 강성진 회고록’

강 회장이 회고록을 통해 수많은 삼보출신들의 명단을 기록한 것은 그만큼 사라져 버린 삼보에 대한 깊은 애정과 아쉬움을 안고 노후를 보내고 있다는 심정을 말해준다. 삼보 DNA, 1등주의에 대한 회상이 너무나 간절하다는 사실이다.
강 회장은 증권투자 철학으로 일확천금을 철저히 경계하고 상식수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투자가 도박일 수 없다는 지론이다. 최고수준의 투자 전문가로서 강 회장은 이 세상에 “완벽한 안전투자는 없다”고 말한다. 최고 일류기업 주식도 떨어질 가능성이 있고 채권도 역시 마찬가지라고 설명한다.
투자는 곧 리스크이고 대가는 수익이라는 논리다. 투자의 주체는 투자자, 상장기업 증권사 등이나 이 가운데 증권사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로 증권인들의 역할과 사명을 강조한다.
강 회장은 ‘해질녘이 가장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는 인생의 황혼을 뜻 깊게 보내라는 말이지만 지나고 보니 모두가 소중했던 나날이라고 회상한다.
강 회장은 지금도 길을 지나다 ‘삼보’라는 글자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심장이 뛴다고 고백했다. 삼보가 합병으로 소멸된 지 30년이 훨씬 지났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는 여전히 삼보가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삼보직원들과 함께 했던 시절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깊은 감회를 회고록 마지막 대목에 기록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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