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런 대한민국] 광복정신 위에 불가능이 무엇인가

광복 제 71주년 경축
자랑스런 대한민국
광복정신 위에 불가능이 무엇인가
일본 평화헌법 개정시도가 큰문제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제 71주년 광복절 경축식은 모처럼 태극기와 자랑스런 대한민국 분위기 일색이었다. 박근혜 대통령과 독립유공자, 3부요인, 정계와 각계 대표, 주한 외교관, 학생, 다문화가족, 탈북자 등이 다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민국을 함께 외쳤다.

▲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 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비롯한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박대통령 광복정신으로 제2 성공신화

이 자리에서 독립 유공자 235명이 정부 포상을 받았다. 5명의 유공자는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훈장을 받고 만장의 축하 박수를 받았다.
△건국훈장 애국장 고 홍문선(洪文善), 1919년 3월 수원서 독립만세 운동하다 일제로부터 7년형(손녀 홍정희씨 수훈) △건국훈장 애족장 고 이창호(李昶鎬), 경기 이천서 독립만세운동하다 징역 1년형(외증손자 김민년 수훈) △건국포장 허창도(許昌道), 1944년 통영수산학교 재학 중 민족의식 고취활동하다 지역 10개월형(아들 허문성 수상) △대통령표창 조제언(趙濟彦), 1944년 하와이서 외교활동(딸 조덕봉 수상) △대통령표창 김태규(金泰圭), 1914년 해남, 장흥서 조선독립군 군자금 지원으로 징역 4개월형(손자 김영석 수상) 등.
독립 유공자에 대한 훈장수여 후 박근혜 대통령은 경축사를 통해 광복정신을 이어 받아 자랑스런 대한민국 발전사에 대한 자긍심을 살려 도전적, 진취적, 긍정적인 공동체 정신으로 새로운 성공신화를 이룩하자고 다짐했다. 이날 대통령의 경축사에는 자신감이 실려 있었고 청중들은 우리사회 내부의 자기비하와 부정적인 언행에 대한 지적 대목마다 박수로 환영했다. 대통령은 “우리가 못할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고 “우리는 할 수 있다”고 강조하여 큰 박수를 받았다.
박 대통령은 사드 배치는 자위적 조치로서 결코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핵과 미사일을 앞세운 어떤 대남도발도 성공할 수 없다고 단언하고 시대착오적인 망상을 버리고 정상적인 국제사회 일원으로 나오면 남북한 공동번영의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아베수상 전쟁책임 침묵, 일왕은 사과

광복 71주년이지만 일본은 패전을 인정 않고 지금껏 종전(終戰)이라 고집하며 아베 수상 정부는 현행 평화헌법의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평화헌법의 개정은 곧 옛 군국주의의 부활이 아니냐는 주변국들의 우려가 높지만 아베 수상은 못 들은 척 한다.
더구나 일본정부는 독도를 일본 영토라고 우기며 8월 15일 여야 국회의원 10명이 독도를 방문하자 절대로 수용할 수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일본 외무성과 주한 일본대사관 측은 사전에 국회의원단의 독도방문을 용납할 수 없다는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여야 의원들은 우리땅 독도방문은 엄연한 국정의 일환이라고 반박했다.

▲ 박근혜 대통령이 15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제71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고 조제언 독립유공자의 딸 조덕봉씨에게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독도 방문단에는 새누리당 나경원 의원, 울릉도와 독도 지역구 출신인 박명재 사무총장, 지뢰폭발 사고로 중상을 입은 이종명 의원, 더민주당 김종민 의원, 국민의당 장정숙 의원 등이 동참했다.
한편 일본에서는 이날 태평양전쟁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한 아베 수상이 “역사를 겸허하게 마주해 세계평화와 번영에 공헌하겠다”고 말했지만 전쟁에 관한 사과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또한 아베 내각 각료와 국회의원들은 한국과 중국의 강력한 유감 표명에도 불구하고 A급 전범들이 합사되어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는 쇼와육군이 전쟁을 일으켜 인접국에게 막대한 피해를 가져온 전범들에 대한 추앙으로 해석되고 인식될 수밖에 없다.
아베 수상과는 달리 지난 8월 생전 퇴위(退位)의사를 밝힌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지난 전쟁을 깊이 반성하며 전쟁의 참화가 되풀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고 말했으니 아베 수상과는 다른 입장으로 비쳐진다.

한국방문 희망, 일왕 퇴위전 초청의견

아키히토 일왕은 1989년 선왕 히로히토(裕仁)의 사망으로 천황(天皇)에 즉위하여 재위 27년을 기록했다. 그러나 지금은 82세의 노인으로 전립선암과 심장수술에다 폐렴, 부정맥 등을 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은 패전 후 맥아더 장군의 점령정책 하의 도쿄 전범재판에서 일왕의 전쟁책임론이 부각됐었지만 ‘살아 있는 신’에서 ‘인간선언’으로 부활하여 일본국의 상징, 일본국민 통합의 상징으로만 군림한다. 그동안 아키히토 일왕은 한국방문을 원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주일공사와 문공부장관을 역임한 언론인 이원홍(李元洪) 씨는 경제풍월 2016년 8월호 기고를 통해 “아키히토 천황(외교관계상 천황 호칭 사용)이 퇴위하기 전에 국내로 초청하여 독립유공자 묘역에서 과거 전쟁사에 대한 사죄 의례를 갖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원홍 전 장관은 아키히토 일왕의 국내 초청 사죄의례의 필요성에 대해 ①일본의 역사적 죄과를 알고 있는 유일한 천황 ②태평양전쟁 격전지를 돌며 전쟁수습 노력한 인품 ③황태자 시절 맥아더 장군의 요청으로 선교사 가정교사를 통한 기독교 교육 ④현행 일본 헌법 하에서 천황에 즉위하여 전쟁 없는 평화국가 소망을 밝혀 왔기에 그의 생전, 퇴위 전 방한 초청이 바람직하지 않겠느냐고 주장한 것이다.

일왕이 전쟁책임을 면한 배경

일본 언론인 한도 가즈토시의 쇼와사(昭和史, 박현미 역, 2010.8.15. 루비박스)에 따르면 일왕이 전승국인 연합국의 전범재판에서 기소를 면한 채 지금껏 천황제가 그대로 존속된 배경과 과정이 잘 나타난다.
쇼와육군은 끝까지 패전을 인정치 않고 ‘1억 옥쇄’(玉碎)를 주장했지만 일왕의 항복선언 한마디로 일본은 ‘1억 눈물바다’로 바뀌면서 금방 미 점령군에게 고분고분해졌다. 패전 직전까지 ‘귀신과 짐승 같은’ ‘귀축미영’(鬼畜米英)을 원수처럼 증오했었지만 미군 점령군이 상륙하기 전에 일본 내무성이 앞장서서 특수 위안부들을 모집하여 미군들에게 바친 것이 일본의 변신이었다.
맥아더 사령부의 점령정책이 개시되자 일왕에 대한 전범처리 문제가 최고의 관심이었다. 외무대신이 점령군 사령부에 접근하여 일왕에 대한 맥아더의 생각을 타진하고 궁내성 시종장이 면회를 신청하여 “천황폐하의 면담을 받아 주시겠습니까?”라고 묻자 맥아더가 ‘기꺼이’ 만나겠다고 응답했다.
이에 따라 쇼와 일왕은 사상 유례없이 경호원 없는 잠행방식으로 점령군 사령부를 방문 맥아더를 만났다. 일왕과 맥아더의 면담 내용은 비공개키로 했지만 맥아더 회상록, 통역사의 기록, 아키히토 황태자 시절 가정교사 일기 등을 통해 핵심사항이 드러났다.
이에 따르면 맥아더가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겠느냐”고 묻자 일왕은 “나를 어떻게 처리해도 좋다. 교수형에 처해도 상관없다”(You may hang me)고 전제하며 “전쟁을 바란 적은 없다. 나의 의견과 상관없이 도조 히데키 수상의 함정에 빠졌다”는 요지로 응답했다. 다만 “국민의 리더로서 신민(臣民)이 취한 행동에 모든 책임을 진다”고 말했다는 기록이다.
그로부터 점령군 사령부는 일본 군국주의 해체작업을 추진하고 연합국 측에서는 일왕의 전쟁책임을 강력 주장했지만 맥아더가 일왕이 스스로 신격을 부정하고 인간선언을 하도록 만들어 전쟁의 책임을 면하게 배려했다는 요지다. 이 같은 배경으로 히로히토는 맥아더가 한국전쟁 중 해임되어 귀국하기 까지 11차례나 면담기회를 가졌다. 1951년 4월, 쇼와 26년, ‘굿바이 맥아더’날 아사히신문 사설은 “패전으로 허탈할 때 민주주의와 평화주의를 가르쳐 주고 일본 국민을 밝은 길로 친절하게 이끌어준 맥아더님”이라고 칭송했다는 이야기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5호 (2016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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