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년 유배형, 뒷날 복권 명예회복

명 황제가 ‘저 털보재상…’
황수재상 이원(李原)
말년 유배형, 뒷날 복권 명예회복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길은 멀기도 했지만 북경에 도착하여 황제를 알현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었다. 황제국의 거창한 의전 절차에 제후국의 사신은 잔뜩 주눅이 들어 높다란 자리의 황제를 우러러 보며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었을 터, 제후국 조선의 사신도 예외는 아니었을 게다. 때로는 황제의 비위에 거슬려 밉보이면 누명을 쓰고 불귀의 객이 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실제로 어느 사신은 표전문이 트집잡힌 데다 조선선비의 꼿꼿한 지조를 보이려 상복(喪服)차림으로 황제 앞에 나아갔다가 괘씸죄에 걸려 머나먼 오지인 운남성 대리로 귀양 가다가 죽은 일도 있다.

▲ 광모재(舊) 11世 용헌공 휘 원(原)의 묘재(성남시 도촌동 산83 옛 묘소 앞). (우측) ▲ 용헌공과 배위 전주최씨 쌍분묘(묘역정비 후)(경기도 광주시 목동 산 113)

그래서 중국 사행길은 책임이 막중하면서도 지난한 행로라 어느 누구도 선뜻 나서기가 쉽지 않았으면서도 한편 선진국인 명나라를 다녀오고 나면 환로(宦路)가 훤히 열리는 매력이 있기도 하였다.
태종3년(1403)에 승추부제학 이원(李原)이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중국 황제가 그의 출중한 용모와 유난히 많은 수염을 보고 “저 털보 정승은 다음에 다시 와야 한다”고 호감어린 농담을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황수재상(黃鬚宰相)이란 별명이 붙은 연유인데 이렇듯 황제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는 사례는 흔치 않은 일로서 당시로서는 대단한 화젯거리로 회자될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하겠다. 사실, 외교관으로서의 이원은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기에 세 차례나 중국에 다녀왔으며 조선으로 오는 칙사(勅使)의 접반도 원숙한 역량으로 무리 없이 해냈다.

새 왕조 기틀잡기에 적극 참여하다

여말선초의 혼미한 정국에서 신흥 사대부의 기류는 새 왕조의 탄생을 촉진하는 방향을 선택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등극으로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새로운 국가건설을 위한 사대부의 대거 참여가 있는 가운데 25세 청년 이원도 새로운 물결에 동참하여 통치기반 확립에 일익을 담당하게 된다.
고려 말 이미 과거에 급제하여 하급관리로 있다가 조선조에 들어 사헌부 지평을 시작으로 시사, 중승을 거쳐 좌·우부승지를 역임하고, 태종대에 좌명공신에 책록되면서 철성군에 봉해졌으며 사헌부대사헌, 경기도관찰사, 승문원제학 등을 맡은 후 명나라에 사은사로 다녀와서 평양부윤 등 외직에 나갔다가 경직(京職)으로 판한성부사를 비롯하여 예조·병조·이조판서와 판우군도총제부사 등 요직을 두루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세종대에 들어 좌의정이 되어 정탁과 함께 도성수축도감 도제조를 맡아 30만 장정을 동원하여 토성이었던 성곽을 석성(石城)으로 개축하였다. 특히, 빈전도감판사, 신경제조, 의금부제조, 위관, 봉책보 등을 맡은 것으로 보아 왕실과 관련된 사안의 처리에 임금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활동했음을 미루어 알 수 있다.

祖子孫三代 文翰으로 명성 떨쳐

이원(李原)의 자는 차산(次山), 호는 용헌(容軒), 시호는 양헌(襄憲)이며 본관은 고성(固城)이다. 고성의 옛 땅이름이 철성(鐵城)이어서 철성이씨로 부르기도 한다. 고성이씨는 시조 이래 대대로 벼슬이 이어졌는데 할아버지 이암(李岩)은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예서와 초서에 능해 명필로 유명하였고, 아버지 밀직제학 강(岡)은 일찍 죽었으나 공민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어 용헌공 이원이 조선조에 들어 통치기반 확립에 기여하여 공신의 반열에 오르니 삼대에 걸쳐 번성을 이어가면서 유력거족(有力鉅族)의 가문을 이루기 시작하였다. 또한 조선 유학의 거봉인 양촌 권근이 매부이며, 세조대의 공신 권람이 사위가 되고 시·서·화의 삼절(三絶)로 알려진 강희안이 손주사위이며 정현왕후의 아버지인 윤호가 외손자다. 배위는 양천허씨로 1남 2녀를 두었고 재취부인 전주최씨와 사이에 6남 4녀를 두었다.
그는 태어난 지 석 달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매부인 양촌(陽村)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이때 포은 정몽주가 그 모습을 보고 일찍 죽은 그의 아버지 강을 떠올린 듯 하늘이 무심치 않았다며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조선 초기 4대 왕에 걸쳐 국기(國基)를 다지는데 기여하면서 관료로서 출세가도를 달렸으나 정국운영 과정에서 파생한 곡절에 부딪쳐 신진세력들로부터 탄핵을 받는 등 어려움을 피할 수 없는 지경을 맞기도 했다. 비대해진 공신집단의 보수화에 비판적인 젊은 사대부들의 개혁적 성향은 기성세대에게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며 압박하였다. 개국 초기에 공신에게 주어지는 여러 가지 혜택을 누리는 것이 신진들의 눈에는 기득권에 안주하는 훈구원로들의 진부한 행태로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세종때 사헌부 탄핵으로 유배형

“불희경장(不喜更張)” … 훈구세력의 입장으로서는 개혁적 변화를 수용하기 어려웠을 터, 신구 세력 간의 갈등을 압축한 표현이다. 달갑지 않은 요구에 거부반응을 보이며 수렴하기를 주저하는 현상으로서 무상한 세월의 변화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역사에 자주 반복되는 현장에서 용헌 이원 또한 탄핵이란 형태의 고초를 겪게 되는 것이다. 당시 국가가 공신에게 주는 특전은 토지와 노비가 대부분이었으며 이것으로부터 갈등과 시비의 구실이 생기고 그것은 상대세력을 무너뜨리는 명분으로 이용되기 십상이었다. 정국이 안정되었던 세종대에 이원은 결국 부당한 관료선발과 노 비 불법취득 등으로 기군역명(欺君逆命)이란 덫에 걸려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여산으로 유배되고 그곳에서 세상을 마감하였다.
훗날, 태종묘정(太宗卯庭)에 배향되었으며 불천지위(不遷之位)로 예우를 받고 공신녹권과 모든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조정의 중신이었으며 대인군자의 풍모를 가진 인물도 시대조류에 떠밀려 자취가 사라지니 비정한 세월을 어길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자료협조 : 고성이씨서울종친회(용헌이원실기 외)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6호 (2016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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