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지원 의존 타성… 정부도 책임

자구(自救)노력해야 금융지원
한진해운 성의 부족
정부지원 의존 타성… 정부도 책임

글/ 최택만(편집위원,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박근혜 대통령은 13일 한진해운 사태와 관련해 “이번 일을 계기로 한 기업의 무책임성과 도덕적 해이가 경제 전반에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오는지 모두가 직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청와대에서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한진해운의 경우 자구노력이 매우 미흡해서 구조조정의 원칙에 따라 채권금융기관의 자금지원이 중단되고 법원의 기업회생절차가 개시됐다”며 이같이 밝혔다.
박 대통령은 모두발언에서 “기업을 올바로 회생시키기 위해서는 경영에 권한과 책임이 있는 주체가 먼저 뼈를 깎는 자구노력을 하고 실질 개선을 추구하는 경우에 채권금융기관의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며 구조조정의 원칙을 명시했다. 이어 “그렇지 않으면 채권금융기관들이 함께 부실화돼 우리 경제와 금융시스템이 불안해질 뿐만 아니라 결국 그 부실을 처리하기 위해 소중한 세금을 쏟아붓게 될 것”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특히 한진해운을 직접 겨냥해 “해운이 마비되면 정부가 어쩔 수 없이 도와줄 수밖에 없다는 안일한 생각이 이번에 국내 수출입기업들에 큰 손실을 줬다”며 “정부의 방침은 기업이 회생절차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서 정부가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는 식의 기업 운영방식은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이라고 일침을 가했다.

▲ 한진해운 사태… 지금부터라도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끔 정부 부처간 유기적인 협력과 한진의 성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 사진은 싱가포르에 가압류된 한진해운 컨테이너선 한진로마호. <사진=한진해운>

한진해운 현대상선 운명 가른 ‘현대증권 매각’

한진해운이 법정관리로 드러간데 반해 현대상선은 회생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현대상선이 경영을 잘해서 회생한 것은 아니었다는 게 금융권과 외부전문가의들의 공통된 시각이다. 두 회사의 운명을 가른 것은 현금을 확보할 수 있는 알짜 매물의 보유 여부였다. 현대그룹은 때마침 불어닥친 ‘대형 투자은행(IB) 열풍’에 힘입어 KB금융지주와 한국투자금융지주의 경쟁을 유발, 현대증권 지분 22.56%를 1조2573억원이라는 비싼 가격에 팔았다. 덕분에 현대상선은 3조3000억원 규모의 유동성 확보를 골자로 한 기존 자구계획안 외에도 새롭게 1조 이상의 유동성을 마련할 수 있었다. 유동성 문제가 해결된 현대상선은 현재 구조조정을 원활하게 진행 중이다.
반면 한진그룹에는 현대증권같은 ‘알짜 매물’이 없었다. 한진그룹은 올해와 내년에 걸쳐 4000억원 가량의 유동성을 한진해운에 공급하겠다는 자구계획안을 내놓았지만, 주채권은행인 KDB산업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을 만족시키지 못해 결국 법정관리로 향하게 됐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모두 구조조정이 늦어져 심각한 위기로 연결됐다”며 “다만 결정적인 순간 내놓을 수 있는 ‘알짜 매물’이 현대상선을 살렸다”고 말했다.
당시 해운사들이 조언을 구했던 외부전문가 A씨는 “늦어도 2014년에 지금 수준의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했어야 했다”며 “그러나 꾸물거리다가 ‘골든타임’을 놓쳐버렸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올해초 금융당국의 조선·해운산업 구조조정 발표 후 두 해운사도 본격적인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뒤라 한진해운은 파산 위기에 처했다. 현대증권 매각 덕에 현대상선만 기사회생의 기회를 잡았을 따름이다.

“경기만 살아난다면”…헛된 희망에 날린 골든타임

왜 해운사들은 구조조정 ‘골든타임’을 놓친 걸까? 이에 대해서는 오너의 결단 부족과 명분에 집착한 채권단과 정부의 안일함을 질타하는 목소리가 높다. 금융권 고위관계자는 “현대상선과 한진해운 모두 오너를 비롯한 경영진들이 80~90년대식 ‘장밋빛 환상’에만 젖어 있었다”며 “경기만 풀리면 모든 게 나아질 거란 생각에 구조조정을 꺼려했다”고 꼬집었다. 그는 “회사 규모가 작아지는 것에 대해 오너의 거부감이 너무 강해 제 때 구조조정을 하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한 해운전문가는 “당시 두 해운사는 해운업 전성기에 맺어놓은 고액 용선료 계약, 고유가, 불경기 등으로 고전하고 있었다”며 “근본적인 구조조정이 필요한 때였다”고 말했다. 그는 “돌이켜보면, 2014년 및 2015년에 다소나마 실적이 호전된 것이 오히려 ‘독’이 됐다”고 덧붙였다.
지난 2012년 9886억원, 2013년 714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낸 현대상선은 2014년에 당기순이익 218억원으로 흑자전환됐다. 그러나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꺼린 탓에 지난해 다시 6270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올해 상반기에도 606억원의 당기손실을 기록했다. 한진해운도 2012년 -6380억원, 2013년 -6802억원에서 2014년 -4233억원으로 적자폭이 줄어든 뒤 지난해 30억원 흑자를 나타냈다. 그러나 곧바로 크게 무너져 올해 상반기 4731억원의 당기손실을 냈다.
한해 실적 호전은 경영진에게 잘못된 전망을 심어주고 “‘대마불사(大馬不死)’ 신화를 믿고, 필요한 최소한도의 구조조정만 하여 오늘의 불행한 사태를 맞았다. 2~3년 전에 지금처럼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했다면 현재의 위기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법정관리 후 물류대란

한진해운 법정관리의 후폭풍은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 13일 현재 한진해운 선박 가운데 압류나 해상에서 대기 중인, 비정상 운행 선박은 총 93척(컨테이너선 79척, 벌크선 14척)으로, 한진해운 전체 선박의 70%에 달하고 있다. 항만 사용료나 하역료를 지급하지 못해 입출항이나 하역이 거부되고 있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선박을 압류당하는 사태도 벌어지고 있다. 더욱이 입항 거부가 속출하는 가운데 선원과 탑승객들이 선박에 갇혀 졸지에 표류자 신세로 전락해 건강과 안전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에 따른 직접적인 피해 규모도 산업은행의 손실액을 포함해 2조원가량으로 늘어났다.
한진해운의 기업회생절차(법정관리) 신청으로 국내외에서 물류대란이 빚어지자 법조계에서는 한진그룹이 최소한의 준비조차 하지 않고 법정관리를 신청한 것은 문제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기업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 외부 자금조달이 막히기 때문에 보통 한두 달 분의 운영자금은 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2011년 대한해운과 2013년 STX팬오션이 법정관리를 신청했을 때도 이 정도의 자금은 있었다고 한다. 대한해운은 약 600억 원, 팬오션은 1000억 원가량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특히 팬오션은 법정관리 신청 2개월 전부터 알짜 자산인 미국 곡물터미널 운영회사 EGT 지분 매각에 들어가 법정관리 개시 초기 300억 원을 조달하기도 했다. 두 회사는 법정관리 신청 후 선박을 억류하거나 입출항을 금지하려는 채권자에게 이 운영자금을 지급해 물류 혼란을 막을 수 있었다.
한진해운은 달랐다. 운영자금은커녕 내부 현금이 바닥나 용선료, 항만 이용료 등으로 7000억 원가량을 연체하고 있는 상태다. 사실상 파산 상태에서 법정관리를 신청했다는 얘기다. 법정관리를 덜컥 받아들인 법원은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한진해운 회생을 위해 가용할 만한 내부 자산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한진이 ‘기간산업인데 정부가 도와주겠지’라는 막연한 기대로 아무 대책도 마련하지 않은 것은 문제다. 한 해운사 대표는 “채권단에서 지난 6월부터 법정관리에 보내겠다고 신호를 보냈는데 한진그룹은 석 달간 뭘 했는지 모르겠다”며 “법정관리 신청 시점을 놓쳤다”고 말했다. 한진해운 등기이사인 조양호 회장은 자율협약에 들어간 지난 5월 이후 한진해운 이사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다.

관계당국의 책임

정부 역시 책임론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해양수산부는 ‘물류대란’ 대책 마련에 허둥대기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법정관리 여파를 과소 계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엔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법적으로 어려운 ‘현대상선 합병론’과 ‘우량 자산의 현대상선 인수론’을 제기해 혼란을 부추겼다.
정책당국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해운경기 침체로 해운 산업 구조조정 작업이 본격화됐지만 큰 그림을 그리지 못한 채 허송세월했다. 업황 부진으로 2개의 국적 선사를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면 사전에 두 회사를 합병하거나 다른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물류대란으로 일어나고 있는데도 정책당국과 한진해운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다. 이는 물류업무 대책은 해수부가 주무부처이고, 구조조정은 기재부가 주무부처이지만, 이번 물류대란의 대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이 두 부처 간의 협의 및 지휘는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난 6월 “산업경쟁력 강화 장관회의”를 발족하였지만 이번 물류대란으로 별다른 기능을 못하고 있다.
지금부터 라도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게끔 정부 부처간 유기적인 협력과 한진의 성의 있는 자구책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사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철강 화학 등 5대 취약업종 구조조정의 경우 사전에 치밀한 계획과 사전 협의를 통해 대란이 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정부부처간 책임 떠넘기기와 해당 업체의 자구책 지연 등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것만이 구조조정에 따른 국민 세금의 낭비를 최소화하는 길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6호 (2016년 10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