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문화원, 백절불굴서 청출어람까지
마포나루, 마포종점, 아소당등 옛추억

황포돛배, 포구의 삶
마포토박이의 마포찬가
마포문화원, 백절불굴서 청출어람까지
마포나루, 마포종점, 아소당등 옛추억

▲ 마포나루에 정박중인 선박들 (1930년대)

서울 마포사람들의 마포찬가(麻浦讚歌)가 2014년 마포구청과 마포문화원에 의해 출간됐다. 1900~2013년까지 마포역사에 관한 ‘스토리텔링 사진집’으로 흑백사진이 태반이다. 마포 토박이들은 그들 삶의 역사를 백절불굴(百折不屈), 상전벽해(桑田碧海), 파란만장(波瀾萬丈)을 거쳐 오늘의 ‘청출어람’(靑出於藍)으로 미래를 향해 거듭 태어났다고 자부한다.

조선천지 물산의 집산지 포구의 삶

마포 토박이 삶이란 강변 포구(浦口)의 삶이다. 한강변에는 포구가 16개였다지만 마포구역에만 유독 마포나루, 서강나루, 양화나루 등 3개가 있었다. 이들 3개 나루를 통해 삼남지방의 곡물, 강원도의 목재까지 들어오니 ‘조선천지 물산의 집산지’였다. 심지어 전라도에서 잡힌 생선이 이곳 와서 소금에 절여 경상도 지역으로 팔려갔다.

▲ 마포나루 인근의 시장 상인들 (1940년대)

중국산 물산도 이곳을 통해 성안으로 들어갔고 노랑머리 선교사와 옆구리에 칼 찬 일본인들도 이곳 포구를 거쳐 조선에 입국했다.
황포돛배가 넘실대는 마포지역 한강을 토박이들은 마포강이라 불렀다. 강폭이 좁고 군데군데 모래성이 솟아 있는 마포강 중간에 갈매기 떼가 노니는 밤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무인도인 여의도에는 일제가 비행장을 만들어 일본헌병들의 차지가 됐다. 그러나 마나 마포강은 나루터, 빨래터, 낚시터, 놀이터로 마포 삶의 터전으로 대를 이은 토박이가 많고 강변 풍경을 노래하려는 전국의 시인묵객들이 몰려들어 마포문화가 형성됐다. 포구의 삶 속에는 4대문안 사람들에게 먹을거리를 날라다 준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이 물자를 운송하는 뱃길을 ‘착한 뱃길’이란 의미로 ‘선통물천’(善通物川)이라고 불렀다. 안산 자락에서 애오개, 아현동, 공덕동 로터리를 거쳐 마포 유수지로 흐르는 지천(支川)이 운하역할 한 ‘착한 뱃길’이었다.

▲ 1970년 4월 8일,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위치한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사진=국가기록원>

그러나 일제가 1923년부터 5년에 걸쳐 쌍룡산에 터널을 뚫어 물길을 돌려놨었다. 아현3동 재개발구역에서 숭문중고 정문까지 620m로 지난 1960년대에 일부 구간이 복원됐다고 한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기억되는 와우산(臥牛山) 고지가 겪은 6.25 전란이 또 하나 백절불굴 정신의 상징이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유엔군과 국군이 행주나루, 수색을 거쳐 마포로 전개하면서 안산과 연희고지, 와우산 고지를 탈환함으로써 1950년 9월 28일, 중앙청에서 이승만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이 수도 서울 탈환식을 갖게 됐다. 그렇지만 불도저 김현옥(金玄玉) 시장이 최단시일내로 완공했던 와우아파트가 1970년 4월 와르르 붕괴한 참사는 너무나 서글픈 그때 그 세월로 남아있다.

흥선대원군의 我笑堂터는 서울디자인고로

마포구 염리동 150번지, 또는 서강로 44로 불리는 지역에 흥선대원군의 아소당(我笑堂)이 있었지만 지금은 사라지고 말았다. 이곳은 당초 대원군의 장손 이준용의 별장이 있었지만 1895년 역모혐의로 강화도 교동으로 유배되자 대원군이 분노하여 장손을 따라 유배가겠노라고 나섰다. 당시 운현궁에 유폐되어 있던 대원군이 마포 현석리에 미리 배를 준비시켜 놨는데 경무청 순사들이 달려와 저지하는 바람에 장손의 별장으로 끌려가 연금상태에서 ‘아소당’이라 이름 붙였노라고 한다. 아소당은 대원군 몰락 이후 일제하에서는 용산 인쇄국이나 궁내부 직원들이 체육대회 장소로 이용했다고 하지만 6.25 후에는 동도공업고교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서울디자인고 교정으로 바뀌었다.

아소당(我笑堂)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오부오신임불경(吾負吾身任不輕)
-나의 집, 나의 몸이 맡은 것이 가볍지 않은데
퇴공한일주준경(退公閒日酒樽傾)
-벼슬에서 물러나와 한가로이 술잔만 기울이네

종지왕사개오몽(從知往事皆吾夢)
-지난 일을 생각하면 모두가 한바탕 꿈인 것을
유괴여년임세성(惟愧餘年任世情)
-오로지 남은 생애 세속에 맡기자니 부끄럽네

리극산촌리담호(理山村俚談好)
-나막신 신고 산촌을 걸으니 시골 덕담이 좋아
문선계류고시성(聞蟬溪柳古詩成)
-냇가 버들 그늘에서 매미소리 들으며 시만 짓네

세론백세안배지(世論百歲安排地)
-세론은 어찌 나를 물러난 신분이라고 말하나
아소전생우차생(我笑前生又此生)
-전생도 이생도 생각하면 절로 웃음만 나네
마포문화원 발행 마포찬가 제일강산
(第一江山) 서호팔경(西湖八景)에서

당인리 발전소, 세계 첫 지하발전소로 변신중

▲ 선통물천 준설공사 모습 (1964년)

마포에는 서울지역 유일의 당인리 화력발전소가 있어 오랫동안 수도서울의 전기를 공급해 왔다. 일제가 1930년 제1호기, 1935년 제2호기를 준공하여 왕궁과 총독부에 전기를 공급하고 서대문에서 청량리까지 전차를 움직일 수 있었다.
8.15 때 우리나라 전원의 80% 상당이 북한에 위치하여 당인리 화력은 너무나 중요한 발전소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을 시찰한 사진이 마포찬가에 소개되어 있다. 자유당 정부의 상공부장관이 취임하면 제일먼저 이곳 발전소를 방문하여 격려한 후 영월화력을 방문했다.
해방당시 남한의 발전설비는 영월화력 10만kW, 청평수력 3만9천kW, 당인리 화력 2만2천kW였지만 설비노후로 발전량은 5만kW 남짓했다. 이 때문에 북으로부터 4만8천kW를 유상(有償)으로 공급 받고 있었지만 김일성이 총선거를 방해하려다 안 되자 ‘5.14 단전’(斷電)으로 남한 전역을 캄캄절벽으로 만들었다.
이 같은 슬픈 역사를 안고 있는 당인리 화력은 세월의 발전에 밀려 지금은 세계 최초, 최대의 지하 발전소로 거듭나는 공사가 진행 중에 있으며 지상에는 친환경 도심공원과 문화센터가 들어설 예정이다.
마포 염리동 36번지 일대에는 일제시 일본인이 운영한 통운(通運)이 위치하여 ‘마루보시’(丸星)로 불리었다. 아현동 언덕마을에는 통운물자를 하역하는 짐꾼과 관리인들의 사택이 있고 마굿간과 목동들도 기거하여 ‘마루보시’로 통했다. 마루보시 마을은 해방과 6.25를 거치면서 피난민과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시민들의 터전이 됐다. 이 일인 통운회사는 나중에 ‘조선운송’으로 해방을 맞아 적산(敵産)으로 분류되어 국영관리로 넘어갔다가 대한통운으로 발전하여 오늘의 CJ대한통운으로 팔자를 고쳐 국내 최대이자 글로벌 물류전문으로 한국형 택배(宅配) 비즈니스를 상징한다.

제2 한강교 개통으로 상전벽해 개시

마포의 상전벽해 역사란 5.16 후의 제2 한강교 기공으로부터 이야기된다. 그 시절 마포 토박이들의 회고에 따르면 자고 나면 옆집에 또 이삿짐이 들어와 서울이 점차 만원(滿員)시대로 접어들고 있었다. 염리동, 만리동, 아현동, 공덕동, 노고산동 언덕배기 등에 날로 토막집, 판잣집, 가건물이 다닥다닥 달라붙어 살았다.
고향 떠나 무작정 상경 후 1년 내내 고생하다 명절이면 귀향하는 보람이 최상의 즐거움이었다. 고향 가는 꿈속에 서울역 광장에서 밤새워 기차표를 장만하는 고생도 즐거움에 속한다. 그러나 당일 기차 출발에 앞서 좌석을 먼저 차지하기 위해 뛰어가다 1960년 1월 26일 새벽 수십 명이 압사하고 수많은 중경상자가 발생했다.
1962년 5.16 정부의 제2 한강교(현 양화대교)의 기공은 실로 혁명이었다. 당시 기공식 참석 인파 사진을 보면 “마누라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 산다”는 마포사람들의 삶을 이해할 수 있다. 1965년 제2 한강교의 개통으로 상습 진창동네이던 동교동, 서교동, 합정동 일대의 교통이 뚫리고 김포와 영등포와도 소통이 됐다. 곧이어 마포대교, 성산대교, 서강대교가 완공되고 당산철교가 개통되니 대교 5개가 신 마포시대를 활짝 열어줬다.
반면에 신 마포시대와 함께 ‘마포종점’은 옛 추억으로 사라졌다. 서울의 전차는 1899년 서대문~청량리간 첫 구간이 개통됐다가 1907년 서대문~마포구간 개통으로 마포종점 추억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포나루 새우젓 사러 아낙네들이 전차타고 종점까지 다녀오고 인근 마포주물럭과 순대집이 번창했다. 그러다가 1968년 11월 전찻길이 철거되자 마포종점도 절로 사라지고 쌍방울 자매의 ‘마포종점’ 노래로만 남아있다.
도로교통이 번잡해 지면서 육교시대가 열려 동교동, 성산동, 공덕동 로터리 등에 육교가 설치되어 대중교통 혼잡을 피해 건너다녔지만 어느덧 육교 철거시대로 세월이 바뀌고 말았다. 이명박 서울시장 때 3.1 고가도로 철거와 청계천 복원 이후 ‘육교는 가라’는 세월의 변덕 따라 아현고가도 철거되고 시내 곳곳 일부 남아 있는 육교들도 철거날짜가 잡혀 있다.

▲ 제2한강교 기공식 참석 인파 (1962년). <사진=국가기록원>

밤섬 폭파, 경성감옥소 끔찍한 기억

마포 토박이들은 도화동의 경보극장, 공덕 오거리의 마포극장을 추억한다. 그러나 마포의 파란만장은 대대로 사람이 살고 있는 밤섬 폭파를 끔찍한 사건으로 회상한다. 1968년 2월, 여의도 윤중제 건설용 골재 조달을 위해 밤섬을 폭파함으로써 62가구 443명이 고향을 떠나 육지로 소재됐다.

▲ 마포형무소 정문 (1957년). <사진=국가기록원>

그중 일부가 지금껏 마포의 토박이로 살고 있다니 살아 있는 마포의 삶의 역사다.
밤섬은 이때 폭파로 사라졌지만 한강물길의 자연섭리에 따라 지금 다시 부활했다. 모래가 퇴적하여 자연숲이 형성되고 온갖 철새들의 기착지로 변해 서울시가 1999년 생태경관 보존구역 제1호로 지정했다. 다만 민간인 출입이 통제되어 자연과 철새들의 보금자리로 변했으니 옛 밤섬주민들은 귀향할 수 없는 신세다.
마포는 상습 침수, 홍수 지역으로 천재의 형벌을 많이 받은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일제하인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래 경제개발시대 초기까지 홍수피해를 많이 겪었다.
을축년 대홍수는 용산 철도관사의 1층이 물에 잠기고 경부선 열차운행이 중단된 사상 유례없는 참사였다. 당시 뚝섬과 마포는 전역이 완전 침수되고 영등포 일대도 물에 잠겨 경성방직의 광목도 몽땅 젖어 뗏목으로 실어다 여의도 잔디밭에 말렸다고 한다. 당시 홍수 피해액은 조선총독부 1년 예산의 50%가 넘어섰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덕동 105번지에 있던 경성형무소도 마포의 파란만장 역사의 단면이다. 일제는 서대문형무소가 넘치게 되자 1912년 마포에 경성감옥을 설치했다가 1923년 경성형무소로 개칭했으며 8.15 후 마포형무소, 마포교도소를 거쳐 1963년 안양교도소로 이전했다. 5.16 직후에는 부정축재자로 지목된 많은 기업인들이 이곳에 수감됐다가 국가기간산업 건설에 기여한다는 목적으로 석방되어 경제개발 5개년 시대에 동참했다.
마포형무소 터에는 아현동에 있던 경서중학교가 이전했다가 지금은 서울지법과 지검 서부지원이 들어서 판검사 등 법관들이 교도소에 잡아넣을 사람들을 심판하는 무서운 곳으로 되돌아간 셈이다.

청출어람 대미는 난지도의 생태공원화

청출어람(靑出於藍)이란 쪽에서 푸른색이 나오지만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후대가 선대를 앞서 미래를 지향한다는 마포사람들의 자부심을 말한다.
마포 뒷골목에는 아직도 옛 설비가게나 전파사 등이 일부 남아 있고 옛 우물터도 곳곳에 남아 있다. 공덕시장 자리는 옛 미나리꽝으로 6.25 때 피난민들이 천막과 판잣집으로 기거하면서 재래시장을 일궈냈다. 이와 함께 마포나루 옛 물산 집산지 특성을 살려 족발집, 순대집과 막걸리집이 들어섰다.
이 같은 옛 흔적과 함께 마포는 ‘책 많이 읽는 동네’로 자부한다. 1980년 아현동의 국립중앙도서관 분관이 이곳으로 이전된 이후 도서관이 15개로 늘어나고 마포문화원을 중심으로 문인들의 문화활동이 매우 활발하다.
마포문화원이 지난 2009년 8월 간행한 마포찬가 ‘제1강산 서호 8경’에 따르면 마포 강변 일대에는 옛 정자가 35개에 달했다. 이곳 정자에 양녕대군, 효령대군, 월산대군, 흥선대원군 등이 나들이하며 시를 짓고 풍류를 즐겼다.
마포를 노래한 옛 선비들의 한문시 수백 수가 이 책 속에 수록되어 있다. 강희맹, 권람, 권근, 기대승, 김종직, 남효온, 박세채, 변계량, 서거정, 신숙주, 신흠, 이규보, 이색, 정도전, 정약용 등 고려와 조선조 고관대작들과 큰 선비들이 모두 마포를 예찬한 사실이 한시에 나타나 있다. 또 세종대왕과 대군들의 한시도 함께 수록되어 있으니 마포예찬을 수긍하지 않을 수 없다.
반면에 누에를 닮은 ‘잠두봉’이 절두산(切頭山)으로 바뀐 사연은 마포의 슬픈 역사이다. 1866년 천주교도 박해 때 이곳에 머리가 잘린 순교 100주년 기념관이 건립되고 성당도 들어섰다. 지난 1966년 육영수 여사가 이곳을 방문한 기념사진이 소개되어 있고 1972년에는 김종필 총리가 김수환 추기경과 함께 김대건 신부 동상 제막식에 참석했다. 또 1984년에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하여 이곳에서 순교자 103명의 성인(聖人)의식을 집전했었다.
마포찬가의 청출어람 대미는 난지도의 생태공원이다. 쓰레기동산이던 난지도에 가스가 분출하여 화재가 발생하던 흉물이 월드컵경기장과 함께 하늘공원, 노을공원 등 아름다운 생태공원으로 거듭 태어났으니 세계적인 성공사례가 아닌가. 2014.2 마포구청, 마포문화원 발행. 273페이지, 비매품.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6호 (2016년 10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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