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권 대표주자 ‘조기대선’ 이점 계산인가

민중운동 편승 퇴진운동
퇴진사유부터 명확히
야권 대표주자 ‘조기대선’ 이점 계산인가

글/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야당과 시위군중들 사이에서는 물론 여당의 비주류 쪽에서도 나오고 있다. 말 그대로 사면초가다. 그런데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은 박 대통령더러 자리를 내놓으라고 압박할 수 있는 ‘근거’다. 무슨 근거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라하는지를 아무래도 알 수가 없다. 요구하는 측은 명확히 알고서 그러는지 그것조차도 의문이다.

문재인의 ‘조건없는 퇴진운동’ 선언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가 지난 11월 15일 “박 대통령 퇴진운동에 나서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사진=공식 블로그사이트>

“박 대통령은 국민의 이름으로 탄핵의 길로 가야 한다.”
새누리당 비박(非朴)계 의원과 원외위원장, 시·도지사 등 70~80여명이 지난달 13일 국회에서 개최한 ‘비상시국회의’에서 김무성 전 당 대표가 한 말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헌법에 대통령 국민소환제가 있는가? 일단 취임한 대통령은 국회와 헌재에 의한 탄핵 이외의 방법으로는 내쫓지 못한다. 탄핵은 박 대통령이 ‘걸어야 할 길’이 아니라 국회의 의결에 의한 현직 대통령 축출 절차다.
더불어민주당에서는 추미애 당 대표가 14일 박 대통령과의 영수회담을 제의했고 대통령이 이에 응해서 15일에 일정이 잡혔었다. 그런데 국민의당, 정의당의 공격은 물론 당내에서도 강한 반발이 나오자 안 만나기로 했다. 며칠 사이에 세상이 엄청나게 변한 거다. 야당 대표가 자신이 제의했던 대통령과의 만남을 당당히 취소하는 장면이 연출될 정도로…. 만나면 최후통첩을 하려고 했다던가. 이미 퇴진하라, 하야하라고 윽박질러 왔으면서 굳이 만나 그 뜻을 밝히려 했다는 것은 무슨 악취미인가.
이어 문재인 민주당 전 대표가 15일 오후 ‘긴급기자회견’을 열어 “박근혜 대통령이 조건 없는 퇴진을 선언할 때까지 저는 국민과 함께 전국적인 퇴진 운동에 나서겠다”고 말했다. 날마다 자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데 새삼 무슨 ‘긴급’회견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는 대통령을 다시 압박했다. 12일 서울도심의 대규모 시위, 그리고 추 대표의 단독 회담 제의에 대한 야권의 일치된 반대에서 ‘확신’을 얻은 인상이다. 이 정도 되면 이제 ‘국민’을 내세우고 대통령 퇴진 압박을 공공연히 가해도 되겠구나 하는 계산이 선 것 같다. 좋게 말해서 신중하고, 좀 나쁘게 표현하자면 교활한 처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민중의 힘으로 합헌정부 무너뜨리려…

▲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박 대통령과의 양자 영수회담을 제의하고 일정이 잡히자 이에대한 취소를 요구했던 국민의당 박지원 비상대책위원장 겸 원내대표. <사진=박지원 의원 공식사이트>

입으로는 ‘국민’ 운운하지만 정치인들의 속셈은 뻔하다. 대통령을 빨리 몰아내야 60일 이내에 대선이 실시된다. 이 조건에서라면 자신의 입지가 가장 유리하다. 이런 계산 아닌가? 이 점에서는 민주당 문 전 대표나 새누리당 김 전 대표와 잠룡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양측 모두에 부담스런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문 전 대표로서는 새누리당이 해체 위기에까지 가 있는 상황에서 대선을 치른다면 차기 대통령직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고 여길 만도 하다.
그런데 박 대통령더러 물러나라는 소리는 요란스러운데 그 명확한 이유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언론에는 온갖 소문을 모은 기사들이 넘쳐나고 야당과 반 박근혜 단체들로부터는 공격과 압박이 거세다. 그런데도 법적으로 명확한 하야의 근거를 제시하는 측은 없다.
박 대통령이 국민에게 밉보일 행태를 보여 온 것은 사실이다. 지지했던 국민들조차 실망하고 자존심 상해하고, 모멸감에 떨 정도다. 그런데 미움을 받게 됐다고 해서 선거를 통해 뽑힌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면 임기 말까지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겠는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야 당연히 대통령직을 박탈당할 뿐만 아니라 상응하는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았다. 국회가 탄핵소추를 시도하려는 기미도 없다. 그러면서도 물러나라고 한다. 박 대통령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자신들이 차지하겠다고 저렇게 악다구니들을 하고 있는 걸 보면 하이에나가 따로 없다.
무리의 힘으로 제도를 무너뜨리고 대통령을 몰아내면 그 행위는 반드시 부메랑이 되어, 그 수혜자들에게 돌아온다. 이건 단언할 수 있다. 바로 말하자면 야당의 차기주자와 당직자들, 그리고 새누리당의 김 전 대표를 비롯한 박 대통령 퇴진 주장파는 내란을 획책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합헌정부를 헌법이 아니라 대중의 힘으로 무너뜨리려 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게 정당화될 때가 있다. 압제에 항거하는 국민적 저항, 혹은 혁명의 경우다. 그런데 박 대통령은 사려가 부족하고 사람을 잘못 썼다는 게 지금까지 확인된 그의 과오다. 범법 사실이 있는지는 앞으로 수사를 해봐야 알 일이다. 그는 국민을 억압하기는커녕 지금 되레 야당과 유력언론, 그리고 여당 내 반대파들에 의해 이지메를 당하고 있다. 시위 군중 속에서 ‘시민혁명’을 들먹이는 사람도 있다지만, 저항이나 혁명의 명분은 전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억지로 밀어내면 이것은 헌법에 대한 반란이다.
‘군중의 힘’과 관련, 13일자 조선일보닷컴이 흥미로운 기사를 실었다. 12일 서울도심에서 열린 박 대통령 퇴진 촉구 촛불집회 참여 인원은 주최 측 추정 100만 명, 경찰 집계 26만 명인데, 인근 지하철 역 이용객 수로 분석한 결과 100만 명이라고 주장할 만했다는 것이다. 나름대로는 객관적으로 분석하는 양 이런 저런 경우의 수를 감안해서 내놓은 것이지만 그렇게 말하려면 적극적인 시위 참여자와 환승 승객 및 구경꾼을 과학적 방법으로 구분해 내는 노력을 기울였어야 했다.
이 신문이 굳이 이런 기사를 실은 것은 “그만큼 많은 국민이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므로 퇴진 요구는 정당하다. 박 대통령은 물러나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의도일 터이다. 다른 신문도 마찬가지이지만 조선일보가 기를 쓰고 박 대통령을 밀어내려 하는 것은 ‘대통령도 밀어낼 수 있는 막강한 신문’임을 과시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 바탕에는 청와대에 대한 적개심이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하고….

▲ 지난 19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는 朴대통령 퇴진을 위한 4차 촛불집회가 열렸다. <사진=경제풍월DB>

아테네 광장의 군중정치 교훈

민주정치는 자칫 중우정치, 폭민정치로 변질될 수 있다. 이런 인식은 멀리 고대 국가 때부터 널리 퍼져 있었다. 아테네의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 대표적이지만, 당시 일반 시민들의 생각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정치는 직접 민주정치였다. 다시 말해 광장(Agora)에 모인 군중의 정치였던 것이다. 군중은 특히 ‘분노의 자극’에 취약하다. 분노가 공명작용을 일으키면 급속하게, 걷잡을 수 없이 번져 나간다.
아르기누사이 해전(Battle of Arginusae, 406 BC)은 펠로폰네소스 전쟁(BC 431〜BC 404년)에서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대해 마지막으로 이긴 전투였다. 그렇지만 싸움에 크게 이기고도 그 지휘관들은 처형당해야 하는 기이한 상황을 초래한 전쟁으로 기록되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이 해전에서 최후의 승리는 아테네에 돌아갔다. 스파르타군의 지휘관 칼리크라티데스는 사망하고, 그의 삼단노선 70척이 수장되었으며 나머지는 도망쳤다. 아테네 측의 손실도 물론 컸다. 아테네 함대의 사령관 8명은 장시간의 토론 끝에 테라메네스로 하여금 생존자를 구조하게 하고 7명은 스파르타함대 추격에 섰다. 그런데 폭풍이 닥쳐 오히려 아테네 군사 2000명이 목숨을 잃었다. 테라메네스도 생존자 구조에 실패했다.
아테네의 민회(에클레시아)는 승전의 기쁨보다는 희생의 충격에 휩싸였다. 테라메네스는 생존자를 구출하지 못한 책임을 모면하고자 다른 장군들을 격렬하게 비난·모함했다. 물론 그들도 물러서지 않고 강하게 항변했다. 날이 어두워져서 거수 투표를 할 수가 없다는 이유를 들어 테라메네스는 회의를 다음날로 미루자고 제의했다.
이튿날 아침 회의가 속개되었을 때, 검은 옷차림의 여인들이 무리를 지어 프닉스(Pnyx: 노천 의사당)로 통곡을 하며 걸어왔다. 전사자의 어머니·아내·딸임을 주장하는 이들은 울부짖는 목소리로 복수를 호소했다. 민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사령관들은 해명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게다가 테라메네스의 지지자 한 사람이, 사령관들 모두를 한꺼번에 처형하자고 제안했다. 시간이 너무 걸린다는 이유였는데, 이 일괄재판 및 처형안이 받아들여졌다. 이들은 전쟁에 이기고도 자국의 시민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테라메네스가 밤 시간 동안 매수한 가짜 유족이었다.
이날의 광기 속에서 유일하게 냉정을 지킨 사람이 있었다. 24시간 동안의 의장(500인 평의회, 즉 불레의 의장은 임기가 하루였다. 당연히 민회의장도 겸했다)을 맡았던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집단재판 및 처벌의 방식이 불법이라며 투표에 붙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민회는 박수로 재판의 규칙을 바꿔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했다.(드니 랭동, 소크라테스와 아테네)
만약 박 대통령이 시위군중, 야당과 조선일보, 그리고 여당 내 퇴진 요구파에 굴복해서 물러날 경우, 이 나라의 헌정체계는 심대한 타격을 받게 된다. 법에 없는 방법으로 대통령을 몰아낸 나라가 되는 것이다. 그 대단히 위험한 선례에 대가가 없을 리 없다. 이후에 들어설 정부, 그것을 이끌 대통령들은 핑계가 생길 때마다 대중과 언론의 위협, 야당의 선동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정권 성립에 결정적 기여를 했는데 대가를 바라지 않겠는가.
이렇게 훼손되는 헌정체제를 바로 잡으려면 또 얼마나 긴 세월과 얼마나 많은 희생이 필요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힌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8호 (2016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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