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봉 정도전의 아들
정진(鄭津) 이야기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2016년 8월 25일 한국프레스센터 국제회의장에서 『정도전과 동아시아 신질서 구축』이라는 주제로 삼봉국제학술대회가 개최되었다. 조선왕조의 설계자로 칭송되는 삼봉 정도전의 국가경영에 관해 한·미·일·중 4개국 학자들이 참여한 학술대회로 부문별로 나누어 발표된 내용이 관심자들의 뜨거운 주목을 받았다.

▲ 희절공 신도비

새로운 국가의 신질서를 구축할 설계는 했으되 군권(君權)과 신권(臣權)간의 충돌이 야기한 권력투쟁에서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제거되어 그 포부를 펼치지는 못했으나 역사무대에서 사라졌던 삼봉의 경세(經世) 구상이 600년이 지난 오늘날 다시 세인의 관심을 받으며 연구의 대상이 된 것이다. 정도전의 족적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것인지는 당시 그의 직함에 그대로 드러난다. 태조 이성계의 절대적 신임 하에 국가경영의 최고 책임자로서 개국공신이며 1품의 숭록대부의 위상을 갖고, 최고 정책기구의 수장인 판도평의사사, 인사행정을 총괄하는 판상서사사, 수문전의 태학사, 왕을 교육시키고 역사를 편찬하는 지경연예문춘추관사, 최고 군사책임자인 판의흥삼군부사, 세자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이사 등 막강한 권력을 손 안에 쥐고 건국 초기의 각종 제도와 국정의 미래 향방을 견인하는 막중한 지위에 있었다.
이러한 정권 창출의 실력자가 정변으로 사라졌음에도 목숨을 부지해 살아남은 아들이 바로 정진(鄭津)이다.

곤욕의 시절을 넘어

고려 말 역성혁명이 있기 전 권신들에 의해 정도전이 아들과 함께 탄핵을 받고 삭직이 된 적이 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아버지 삼봉과 아우들이 죽임을 당하는 불행을 겪었으나, 정진은 마침 태조대왕이 안변의 석왕사에서 선조를 제향하는 삼성재를 봉행할 때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태조에서 정종으로 왕위가 바뀌고, 비로소 이방원이 등극하여 완전히 정국을 장악했다지만 아직도 불안했던 모양이다. 이미 주동자가 제거된 1차 왕자의 난 때를 떠올리는 무리들이 간관 권숙을 사주하여 난적(정도전·남은)의 뿌리를 뽑아야한다는 음해를 하므로 정진은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고 만다. 따라서 모든 직첩이 회수되고 사실상 유배나 다름없는 8년여의 모진 세월을 겪게 되었다.
1411년에는 목은 이색의 신도비문을 중국에서 받아온 것이 국체와 관련된다 하여 이를 조사하는 과정에 하륜의 간계에 의해 불똥이 부친(삼봉)에게 향하여 관작이 회수되고 자손이 폐서인되자 죄 없이 또 다시 관계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 희절공 정진 묘소. <사진출처=기사 하단표기>

염정(廉正)한 관료활동

고려 말 우왕 6년(1380)에 양촌 권근이 주관한 성균시에 합격하여 낭장으로 시작하여 사재령이 되었다가 영주지주사를 거쳐 전농시정으로 있을 때 모함을 받아 삭직되었다. 조선이 개국되자 막강한 실세 권력자의 아들임에도 스스로 지방관인 연안부사에 부임하였을 때, 사람들이 ‘훈가(勳家)의 자제이니 교만하고 자부심이 많아서 서무(庶務)는 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오히려 겸손하여 자신을 억제하고 정사에 부지런하니 고을사람들이 탄복하여 칭송하였다고 한다.
태조1년(1393)에 판사재감사가 되고 공조전서가 되었다가 형조전서로 옮겨졌다. 이때 아내가 그 남편을 죽이고 첩에게 덮어 쉬우는 살인유기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아내로부터 자복을 받아내어 공정한 옥사를 처결한 일이 왕조실록에 소개되어 있다.
이어 원종공신으로 도승지를 지내고, 경흥부윤으로 승진하였다가 원주목사가 되었고 이듬해 중추원부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때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서 관직이 삭탈되고 전라도 수군에 충군되어 장기간 관직을 떠나 고난의 시절을 보내게 된다.
태종7년(1407) 좌정승 성석린의 천거로 판나주목사에 기용된 이후, 판공주목사가 되었는데 목은 이색의 신도비 문제로 또 다시 관계를 떠났다가 1416년 인녕부윤으로 돌아와 성심으로 정종을 모시고 다음 해 판안동대도호부사로 나갔다.
세종1년(1419)에는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그해 겨울 판한성부사에 제수되었다. 다음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한양 천도이후 처음으로 청계천 준설작업을 시행하였고 수문을 넓히고 돌다리를 건설하는 등 치수에 업적을 남겼다. 이어 평안도관찰사를 지내다 다시 판한성부사를 역임하고 공조판서가 되었다가 개성유후사 유후, 군자감제조를 거쳐 형조판서가 되었다. 형조를 맡으면서 세종대왕의 장인 심온이 태종 때 죽은 후 소헌왕후의 친정어머니인 안씨가 천안(賤案)에 올라있음을 풀어주도록 진언하였고, 이에 임금이 노루 한 마리를 하사하는 아름다운 일화가 남아 있다.

▲ 희절공 단서녹권(사진 좌측)와 회절사(우측).

희절공 정진의 졸기

형조판서 정진의 부고를 듣고, 세종은 각별한 애도의 뜻으로 3일간 조회를 멈추며 부의와 함께 손수 치제문을 지었고, 의정부 우찬성을 추증하며 봉상시에서 올리는 시장(諡狀)을 기다리지 않고 친히 희절(僖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조심하여 두려워함을 희(僖)라 하고, 청렴을 좋아하여 스스로 억제함을 절(節)이라 한다” 는 시호의 의미로 보아 그의 평생에 일관된 정신이 돋보이며 임금이 내린 제문(祭文)의 그 절절함을 옮겨본다.
“몸을 바쳐 신하가 됨에 ~ ~, 생각하건대 경은 천성이 곧고 순수하며 품행이 온화하고 근신한지라 맑고 깨끗함으로 몸을 지키고, 청렴하고 조용하여 외화가 없었도다. ~ ~ 내직과 외임을 두루 맡으면서 밤낮으로 정성을 다하고, 형조에서 옥사를 판결할 때 반드시 원통함이 없게 하여 나라가 모범되게 안정에 이르도록 하였으니 ~ ~ ~ 어찌 갑자기 병사하여 나에게 서러운 회포를 무겁게 하는고. ~ ~ 슬프다. 인명은 비록 운수에 매이어서 길고 짧은 수한을 어찌할 수 없으나, 은전은 어찌 생사에 차별하랴. 조문하고 위로하는 예의를 마땅히 베푸노라.”
<자료협조 : 봉화정씨 문헌공파종회 정진수 총무이사, 정광순 홍보위원장>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8호 (2016년 1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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