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시민강좌, 정말 핵개발 시도했나
김태우교수, 자주국방 의지·추진력 감동

富國强兵(부국강병)의 지도력
박정희를 다시 본다
박정희 시민강좌, 정말 핵개발 시도했나
김태우교수, 자주국방 의지·추진력 감동

▲ '제2회 박정희 대통령 탄생 100주년 기념 시민강좌'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정말 핵을 개발하려 했을까. 월간조선과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이 지난 12월 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근대화의 국부(國父), 박정희를 다시 본다’는 시민강좌를 통해 박 전 대통령의 자주국방과 핵개발 시도에 관해 주제발표를 듣고 토론했다.

진보, 보수 박정희 평가의 오류들

이날 주제를 발표한 김태우(金泰宇) 건양대 교수는 통일연구원장을 지낸 핵전략 전공 정치학박사(뉴욕주립대)로 대학시절(영남대 경영학과)에는 유신독재를 비판하며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증오심을 폭발시켜 왔지만 뒤에 핵문제를 전공하면서 생각이 달라져 박 전 대통령의 치적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박정희에 대한 평가의 오류들을 진보와 보수계가 공유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정희를 민주화 잣대로만 평가하여 획일적,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평가나 그의 치적을 무조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 모두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말이다.
박정희의 집권기간인 1961년에서 1979년까지 시대적 환경이나 국가의 운명 등을 고려하여 그의 쿠데타와 경제개발 및 3선 개헌과 민주화 탄압 등을 균형 있게 평가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박정희는 부국강병(富國强兵)의 상징이었다. 그는 치산치수(治山治水)에서 수출과 건설, 경부고속도로, 새마을운동 등 경제개발 성과를 이룩하고 자주국방 의지와 민족문화 창달을 선도함으로써 조국 대한민국을 ‘강소국’의 반열로 근대화시켰다. 또 개인적으로는 근검절약하고 주변인물과 친인척들을 엄중히 관리하면서 끊임없는 애국심을 실천해 보였다.
반면에 비판가들은 박정희가 아니더라도 경제개발 할 수 있었다고 지적하며 그나마 서민과 노동자들의 피땀으로 이룩한 성과가 아니냐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조국근대화 관련 박정희의 지도력, 추진력, 의지를 평가해야 한다고 반박한다. 김 교수는 박정희가 태생적 서민형으로 먹걸리를 좋아하고 즐겨 마셔왔는데도 “10.26 당시 시바스리갈 이라는 양주 마시다가 총 맞아 죽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너무나 악랄한 저주이자 정치적 증오심의 표현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주한미군 철수론에 자극 자주국방 의지

김 교수는 박정희의 핵개발 시도 과정을 감동으로 해석한다. 김 교수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후 건설회사, 무역회사에 근무하다 대학원에 진학하여 동시통역을 전공한 후 33세 때 미국으로 유학했다. 뉴욕주립대에서 5년간 핵정책 및 핵전략을 전공, 정치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여 국방연구원에서 북핵문제를 연구하면서 박정희의 자주국방 의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박정희의 핵개발 시도는 거의 혁명적인 거사였다.
박정희가 집권한 1962년의 대한민국은 세계적으로 가장 가난한 약소국에다 북으로부터 끊임없는 도발을 받고 있었다. 이때 닉슨 독트린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겠다고 압박하자 박정희는 1970년 국방과학연구소(ADD)를 설립, 자주국방 의지로 155미리 곡사포를 비롯하여 박격포, 500 MD 헬기, 장갑차 등을 개발했다.
미국이 끝내 7사단을 철수시키자 그 대가 형식으로 군사원조를 받아내고 연례 한미안보협의회 창설, 방위산업육성 지원 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76년 지미 카터 대통령이 취임하자 다시 공군, 해군 일부를 제외하고 주한 미 지상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 이에 반발하여 주한미군사령부 참모장 싱글러브 소장이 철군반대로 강제 예편 당한 것이 이때였다.
뒤에 카터 대통령이 방한하여 박정희 대통령과 철군문제를 두고 논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지상군 전면 철수계획은 백지화되고 한미연합사가 창설되기도 했다. 그러나 주한 미 7사단 철수에 이어 미군의 베트남전 철수와 공산화를 보고 박정희의 자주국방 의지와 핵개발 프로젝트는 미국의 압력 속에 10.26 사태까지 극비로 진행됐다.

▲ 신무기를 시찰하는 박정희 대통령(1972년). <사진=국가기록원>

핵개발 의지, 혜안, 강단, 애국심 감동

박정희는 플루토늄 획득을 위해 재처리 기술을 확보해야 한다고 판단하여 국내 연구역량을 축적하고 1974년에는 프랑스와 원자력협력 협정을 통해 재처리시설 도입을 추진했다. 이는 결국 미국정부의 끈질긴 압력으로 취소됐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까지 핵개발 의지는 중단하지 않았다.
또 미사일 개발도 성공하여 1978년 4월 충남 안흥해안에서 시험발사에 성공하자 박 대통령이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박정희 서거 후 미국정부는 전두환 신군부 정부를 압박하여 핵개발 기반을 말살하고 말았다. 국방과학연구소 소속 연구원 800명을 해고시키고 원자력연구소를 ‘에너지연구소’, 한국핵연료㈜를 원전원료㈜로 개칭하여 핵이나 원자력이란 용어마저 사용 못하게 압박한 것이다.
이로부터 한반도에서 핵과 미사일은 북한의 독무대가 되어 이 시각 현재 ‘서울 불바다’, ‘청와대 초토화’ 등 핵공갈을 당하고 있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박정희의 핵개발 의지는 군사적, 정치적으로 실패했지만 그의 강인한 의지, 과학자 육성, 기술개발 축적 등은 결코 실패라고 볼 수 없다. 박정희가 핵개발을 추진코자 돌진한 과정이나 앞을 내다 본 혜안, 의지, 강단, 애국심 등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박정희 다음의 대통령들은 어느 누구도 이 같은 부국강병의 의지나 전문성을 계승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월성원전 1~4호기에 캐나다의 캔두형 가압 중수로를 도입했다. 이 캔두형 원자로는 사용후핵연료 양이 많아 재처리시 고순도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박정희의 핵개발 의지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구미공단에 있는 LIG넥스원은 미사일과 어뢰를 생산하는 방위산업체이지만 이 역시 박정희가 설립을 권고한 금성정밀이 모체이다.
‘박정희가 정말 핵을 개발하려 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은 이 같은 사실을 통해 다각도로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박정희 이후 핵개발의지 계승했다면…

주제 발포에 이은 토론에서 조갑제닷컴 대표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자주국방 관련 어록을 인용하면서 박 대통령의 머릿속에는 늘 ‘전쟁지도’가 입력되어 있었다고 해석했다. 또 박정희가 프랑스의 재처리시설 도입을 추진하다 미국정부로부터 온갖 압박 속에 좌절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박정희의 핵개발 의지를 높이 평가했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김태우 교수의 주제발표처럼 박정희의 핵안보 전문성과 핵개발 의지를 후임자들이 계승했더라면 지금처럼 한국의 핵입지가 초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논평했다. 서 교수는 박정희의 핵개발이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한미연합사령부 설치로 지금껏 한미군사협력의 굳건한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서 교수는 오늘의 국내 핵무기 관련 기술은 당장 우라늄 농축기술, 플루토늄 추출기술 개발이 가능한 수준이라고 지적하며 북한이 우리보다 수십 년이나 뒤진 수준에서 핵을 개발했노라고 핵보유국이라 주장한다고 비교했다.
프랑스 핵연료 재처리 시설도입 계획을 둘러싸고 한미간 갈등이 깊어지고 있을 때 박 대통령은 1975년 6월 7일, 미국 시사평론가 로버트 D 노박과 인터뷰를 통해 “우리는 핵무기 개발능력을 갖고 있으나 개발계획에는 착수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만약 미국의 핵우산이 철수한다면 자구책으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갈 것이다”라고 분명한 의지를 표명했다.
박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이 미국 언론에 보도된 후에 작성된 미 국무부의 정책건의에 따르면 당시 미국정부는 한국은 물론 프랑스와 캐나다에 대해서도 압력을 행사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9호 (2017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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