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계의 신임, 정도전과도 우의

조선조 초 건설행정
성석린, 초대 판한성부사
이성계의 신임, 정도전과도 우의

 

글/최종인 서울문화사학회 전문위원

 

▲ 어서각. <사진제공=필자>

고려는 이미 쇠망의 조짐이 연이어 드러나 혼미한 정국은 광풍의 계절로 쓸려가고 있었다. 급기야 위화도 회군으로 신진세력은 구세력을 압도하며 대세를 휘어잡고 역사의 변곡점에 진입하였다. 엄중한 시대변환의 회오리바람 속에서 이인임이 축출되고 최영에 이어 정몽주까지 역사의 현장에서 사라지면서 드디어 1392년 조선왕조가 개창된다. 이때 성석린은 일생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이하였다. 태조 이성계의 즉위교서에서 성석린과 그의 아우 성석용은 지난 날 이색 · 우인보 등과 함께 반란을 모의하여 화단을 일으킨 56명 중 한 사람으로 지목되어 본향에 유배되는 처벌을 받게 된 것이다. 고려 말 창왕 폐위와 공양왕 옹립 등 이성계와 정치적 행보를 같이 해온 입장이라 예기치 못한 뜻밖의 처분을 받았다 할 수 있겠으나, 성석린의 유배생활은 그리 길지 않았다. 얼마 후 삼사우복야라는 관직에 복귀하여 정사에 참여하였는데, 이는 이성계와의 두터운 친분은 물론 특히 정도전과의 돈독한 우의가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행정의 달인으로 판한성부사가 되다

고려 공민왕6년(1357)에 문과에 급제한 성석린은 관료생활 초기에 주로 사관(史官)으로 일했는데 당시 대학자인 이제현이 국사를 편수하면서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항상 글을 쓰게 하였다. 한때 신돈에게 미움을 사 해주목사로 나가 있기도 했으나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대부분 중앙관서에서 활동하면서 문·무반 관리의 인사와 고과, 국가의례, 외교, 교육, 재정, 왕명출납 등을 다루었다.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에 보면 전의주부·전리좌랑·전교부령·예의총랑·성균사성·삼사좌윤·밀직대언 등 여러 관서의 실무 또는 중간관리직을 역임하였는데, 중·하위직으로부터 차례로 단계를 밟아가면서 행정관료로서 다양한 실무경험과 능력을 쌓아간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경력이 훗날 여러 고위직을 거치며 국정을 총괄하고 다양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기반이 되었다.

▲ 왕지. <사진제공=필자>

조선 초기, 태조에 의해 성석린은 문하시랑찬성사에 임명되어 당시로서는 중요시하였던 우리나라의 풍수지리와 도참에 관한 자료를 정리하고, 새 도읍지의 선정 등 주요 국가사업에 참여하면서 여러 직책을 두루 지나 판개성부사를 한 다음 판한성부사가 되고 이어 평양윤과 서북면 도순문사를 겸직하였다. 세 개의 거점도시를 연이어 맡았는다는 점은 태조가 건국 초의 전국적 정권안정을 위해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인물을 선정하여 주요지역 행정의 책임을 맡겼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특히, 성석린이 새로운 수도 한성부의 행정을 책임지는 판한성부사에 임명되었다는 것은 고려 말부터 축적된 그의 다양한 행정경험과 능력이 발탁의 요인으로 꼽힐 수 있는데, 새 도읍지를 물색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을 뿐 아니라 판개성부사로서 수도행정을 꿰뚫고 있던 안목과 식견이 누구보다도 탁월하였음을 태조가 각별히 인정하였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석린이 판한성부사 재임 시기에 종묘와 경복궁, 도성 수축 등 수많은 건설 사업이 벌어졌음에도 실록에 공사에 관련한 기사가 거의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아마도 합리적인 건설행정을 하였고 가장 난제였던 재정조달과 인부의 동원과 관리에 무리를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아닌가 여겨진다.

정권 안정의 중재자 - 정승시절 이야기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벌어진 골육상쟁의 정변에 충격을 받고 태조 이성계는 아예 그의 본거지인 함흥으로 내려가 버렸다. 왕통의 정당성에 흠결이 있다고 생각한 태종 이방원이 부왕의 환궁을 위해 이른바 함흥차사를 계속 보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아끼는 신하 박순의 목숨조차 앗고 번심에 빠져있던 이성계에게 문안사로 성석린이 어미 소와 송아지를 끌고 나타났다. ‘음메’하는 새끼의 울음에 뒤를 돌아다보는 어미의 모습을 이성계의 가슴에 녹아 들어가도록 한 것이다. 부자지간의 정을 은유적으로 연출한 성석린의 권유에 이성계는 마음을 바꿔 그동안의 완고한 분노를 풀고 한양으로 향하게 된다. 파국의 위기로 치달았던 왕실의 위기는 이와같이 슬기롭게 수습되었다. 당시 어머니가 돌아가 시묘살이를 하던 성석린이 사안의 중대함을 판단하고 나서서 그가 아니었으면 누구도 할 수 없는 역할로 원만하게 매듭지은 것이다. 왕권이 확립되어 조선 초기의 정치적 안정은 반석 위에 올랐으며, 성석린은 국방·지방행정·재정·외교 등 국정의 지표를 담은 [시무20조]를 품계하여 국가운영의 기틀을 잡도록 기여하였다. 한편, 성석린은 25년간 정승으로 재직하는 동안 일상적인 내정 외에 명나라에 사은사로 갔을 때 강대국 명과의 관계 개선을 이루어내는 외교적 큰 성과를 거두었으며, 당시 표전문제로 억류되어 있던 정탁·김약항 등을 석방시켜 귀국토록 하였다.

학문과 덕망의 최고봉-성군(聖君)의 스승

▲ 성여완과 독곡 성석린 신도비. <사진제공=필자>

관료로서 성석린의 행적은 초년시절 사관 등 낮은 관직으로 시작하여 일인지하만인지상의 영의정에 이르기까지 현란하기 이를 데 없지만, 학자 · 문장가 · 문학가 · 예술가(서예)로서도 조예가 깊어 대단히 높은 경지에 다다랐다. 그는 공맹의 경학(經學)에 통달하고 필법(筆法)이 신묘, 정교하였으며 고매한 인품과 탁월한 경륜으로 당대의 선비들로부터 한결같이 군자(君子)로서 칭송과 존경을 받았다. 태조의 건원능비에 권근이 글을 짓고 성석린이 글씨를 썼으며 수백 편의 시문이 그의 문집인 「독곡선생집」에 남아 있다. 서거정(徐居正)은 “이 책에는 웅장한 기개와 고결한 문사로 넘쳐 흘러 드높은 도덕, 위대한 훈업, 풍부한 문장이 능히 한 시대를 울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매우 아름답게 표현했다.
고려에서 3대, 조선왕조에 들어 4대의 임금을 섬긴 성석린은 태종 때 세자부(世子傅)를 맡아 충녕대군의 스승 역할을 하였다. 세종대왕이 찬연한 업적을 남긴 데에는 세자시절에 군왕의 자질을 보양하기 위해 성석린으로부터 받은 교육이 그 밑바탕에 있을 것이다. 성군의 도리에 대해 끊임없이 진강한 그의 얼과 혼이 임금에게 감화되어 우리나라 역사에 빛나는 세종대왕이 탄생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였을까 성석린이 86세로 장수하고 서거하자 세종은 그의 공적을 기리고 정혼(貞魂)을 위로하는 간절한 제문을 내렸다.

성석린의 가문

고려 후기 창녕성씨는 현달했던 문벌로서 성석린의 아버지 성여완은 당대의 명현으로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을 지켜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고 말년에 은둔하였다. 성석린이 불과 네 살 때 문음으로 사온승동정이란 벼슬을 받은 것만 봐도 가문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듯 고려의 절신(節臣) 가문에서 곧 이어 조선왕조의 명신(名臣)이 출현할 수 있었던 데에는 왕조교체의 대의와는 별도로 시대가 필요로 한 인물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성석린의 본관은 창녕이며 자는 자수(自修), 호는 독곡(獨谷)이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다. 판도판서 공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판도총랑 군미이고 아버지는 창녕부원군 여완이며 어머니는 밀직지신사 나천부의 딸인 경안택주 금성나씨이다. 배위는 문혜공 안원숭의 딸인 순흥안씨이고, 장남 지도(志道)는 검교호조참의였고 차남 발도(發道)는 판한성부사 그리고 형조·공조판서와 의정부좌참찬을 지냈으며 큰 사위는 유후를 지낸 조휴이고 작은 사위는 고려종실 왕탄이다. 세 아우가 있었는데, 둘째 석용은 보문각대제학을 지냈고 셋째 석연은 예조·호조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을 지냈으며 네째 석번은 낭장이었다. 이들 형제의 아호는 모두 곡(谷)자가 붙어 석린이 독곡(獨谷), 석용이 회곡(檜谷), 석연이 상곡(桑谷)으로 3형제가 모두 대제학을 지내어 세상의 부러움을 샀으며 우애도 매우 두터운 것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방손(傍孫)으로 사육신의 한 사람인 매죽헌 성삼문은 석용의 증손이며, 성균관에 배향된 동국18현의 한 사람인 유학자 성혼은 석연의 6대손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09호 (2017년 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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