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 변호사 자원봉사의 실례

[이코노미톡]

판사 임용 여성 상위 시대
여판사 업무량 걱정마오
미국 여 변호사 자원봉사의 실례

글 / 宋貞淑(송정숙) 편집위원 (전 장관, 전 서울신문 논설위원)

신임 판사 임용 비율에서 여성이 앞질렀다. 그 일이 화제가 되었을 때 한 남성 법조인이 조심스럽게 이런 의견 말했다.
〈판사가 판결을 앞뒀을 때의 업무량은 살인적으로 많다. 산더미 같은 자료들을 며칠 씩 밤새워 검토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때로는 여관 작업도 예사로 해야 한다. 그런 일에서는 여자 판사들이 업무량을 감당하지 못해서 곤란한 경우를 얼마든지 보았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이제부터의 과제다.〉
그런 말을 들으며 얼마 전 집안 청년이 들려준 미국의 두 여자 변호사 이야기가 생각났다.

미국 여자 변호사의 이야기

하나는 그 청년이 학위를 위해 미국의 W주립 대학에서 강사를 하고 있을 때 일이다. 어느 날 주(州) 법원에서 연락이 왔다. 한국인이 소송 당사자인 사건이 생겼는데 그의 통역을 좀 해줄 수 없느냐는 것이었다.
연락을 한 사람은 소송인인 한국인을 맡은 주 법원의 관선 변호사였다.
통역해야 할 일이 까다로운 법률 용어 같은 것일 터인데 그것을 해낼 자신이 없으므로 청년은 처음 망설였다.
그러자 변호인은 말했다. 법적 책임이 따르는 일이 아님은 물론이고 다만 변호인인 자신이 그 소송인을 이해하고 법적 이익을 위해 변호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으니 도와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 뜻의 말을 하며 성실하게 부탁을 했다.
우리 청년이 가진 관선 변호인에 대한 선입견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변호사를 사지 못하는 소송인을 맡아 형식적으로 변호를 하는 관선변호인은 소송인을 이해하거나 사건을 잘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일 따위는 별로 하지 않고, 판결이 날 순간에 가서 그저『판사님의 선처를 부탁한다』는 말이나 몇 번하고 나면 결과에는 별 관심도 없는 정도의 역할이라는 것이 청년이 가진 선입견이었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달랐다.
사건의 내용인즉 한국사람 하나가 언어 연수를 왔다가 눌러 앉은 경우 일어난 일이었다. 이 한국인은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사람인데 중간에 연수를 왔다가 불법으로 눌러 앉아 있다가 그곳 홈리스로 떠도는 여인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하나 낳았다. 아이를 낳고 나자 마음이 변한 아이 엄마는 이혼을 요구하며 아이는 주 정부에 내주는 쪽을 택했다.
미국은 홈리스를 하나의 정신 질환으로 분류하여 그런 어머니는 아이를 기를 자격을 주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한다. 이 아이 엄마는 그 가계(家系)에 그런 판정을 내릴 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는 경우였다.
그러면 아이 아버지가 기르게 할 수도 있는데 아이 엄마는 자신은 홈리스인 주제에 아이를 그 아빠에게는 줄 수 없다는 주장을 법정에서 한 것이다. 아이 아버지가 아버지 될 자격이 없다는 주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법정에 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이 아버지라는 사람은 언어가 짧은 것은 물론이고 관선 변호사나마 잘 만나지도 않고 덮어놓고 「예스!」만 해서 일이 많이 불리해져 있었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그가 아주 딱했지만 어떤 생각을 가졌는지 어떻게 방어를 해야 할지 도무지 말을 안 해서 소송을 진행할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 말을 하며 변호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미국의 어떤 법이 당신네(한국) 나라의 관습이나 인권을 이해하고 포용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안 되는 일이 아닌가 싶어 그를 이해하기 위해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나이 지긋한 여자 변호사의 그 폭넓은 법조인적 교양과 지성에서 우러난 성의가 너무 감탄스러워서 유학생 청년은 열심히 도왔고 마침내 법정에서 이겨 아이는 아버지가 기를 수 있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한국인 소송당사자는 너무 나태하고 소극적이고 주눅이 들어 있었지만 그 관선 변호인은 전혀 개의하지 않고 많은 노력을 해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그 판결에서 승소했을 때 통역한 청년을 끌어안으며 기뻐했다.

탈북민의 법정투쟁 변호

▲ 대법원 전경. <사진=경제풍월DB>

이 청년은 그 후 A주로 옮겨가 대학에 봉직하다가 다시 한 번 한국인을 위한 법정 통역을 맡는 경험을 했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밀입국한 북한 탈북민을 변호하는 일이었다.
연락을 해온 것은 인권변호사 단체였다. 그들은 부당하고 난처한 일에 처한 힘없는 소송 당사자를 돕는 법정의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그 대표가 역시 여성이었고 나이 든 성숙한 변호사였다.
처음 그 변호사가 지목한 사무실로 찾아갔을 때 청년은 너무 놀랐다. 그 잘 사는 미국에서 에어컨 시설도 없는 바라크 같은 건물에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낡은 선풍기가 전부인 사무실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산더미 같은 서류를 쌓아놓고 그들은 일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북한을 탈출하여 온갖 역경을 겪으며 멕시코까지 와서 불법 이민무리에 끼어 미국으로 들어왔다가 붙잡혀 강제 수용 당한 탈북민을 도와 미국의 시민권을 얻어주는 일에 자원봉사 변호를 맡은 것이다.
이 일을 자기들 일로 선택한 일을 너무도 뜻 깊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법정 투쟁은 참으로 힘든 작업이었다. 청년은 이 「운명적인 일」에 여름 방학을 바치며 그 인권 변호사들을 도왔고 그들의 활약에 너무나 깊이 머리를 숙였다.
이 재판에서 이겼을 때의 그 변호사들의 기쁨이란 대단했다. 땀에 젖어서 엉망이 된 얼굴에 기쁜 눈물이 범벅이 되어 『우리가 이겼다!』며 청년을 끌어안고 환호를 했다. 청년도 울어버렸다. 너무 고마웠다. 이 일은 북한 탈북민이 미국 국적을 얻는 최초의 예가 되었다.
두 변호사의 이야기를 하며 청년은 말했다.
『이런 사람들이 미국의 힘인 것 같아요.』
그러는 청년의 말에 나도 동감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91호(200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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