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톡]

대통령의 유폐
군중 재판(mob justice)

글/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대통령은 유폐 상태다. 새해 첫날 기자 간담회를 가진 것으로도 온갖 비난과 억측이 난무한 것을 보면, ‘유폐’임에 틀림없다.
먼저 범법 사실이 드러나고, 검찰이 이를 수사해서 기소하면, 법원이 그 유무죄를 판단한다는 게 일반 시민의 법 상식이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달랐다. 언론들이 때론 대하소설, 때론 옴니버스 구성 기법으로 범법사실이라는 것들을 대단히 다이내믹하게 그려 냈다. 이의 신빙성은 군중의 대규모 촛불집회가 뒷받침했다. 검찰이나 특검은 언론과 군중집회에서 주장된 사실들을, 전문용어로 정리하기에 바쁘다. 헌재 또한 이미 제시된 단죄의 구조와 용어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박 취임이후 줄곧 진보진영의 저항

이번 탄핵사태는 언론들이 뇌관에 불을 댕긴데 따른 민심의 대폭발에서 비롯됐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 정부에 대한 공격의 에너지는 18대 대통령 선거 때부터 축적돼 왔다. 선거 후 상황이 정리되기는커녕 오히려 확대됐다. 사법적 판단 및 징벌과정이 진행되는 다른 한편에선 국회 국정조사가 실시되었지만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통해 사태가 진정되기는커녕 의심의 대폭발·대확산 계기만 되고 말았다.
여기에 윤창중 청와대 대변인의 ‘교포여학생 성추행 의혹사건’이 터졌다. 취임 첫해 5월 박 대통령의 미국방문길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성추행 사건’을 국내 유력 언론들의 ‘악랄한 모함’이라며 한창 반격전을 전개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부가 겪었던 타격이 회복될 일은 아니다.
이어 채동욱 검찰총장이 혼외자 논란에 휩싸였다가 결국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듬해 6월부터는 ‘노무현-김정일 정상회담 대화록과 NLL포기’ 논란이 정계에서 재점화 되어 한동안 정국을 뒤흔들어 놓았다. 이 논란은 새누리당의 공세로 격렬해졌지만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리더 및 관련자들의 교묘한 언술과 필사적 반격이 오히려 새누리당을 궁지로 몰아넣는 결과를 낳았다.
취임 이듬해 4월, 박 대통령과 그 정부에는 치명적이었던, ‘세월호참사’가 발생했다. 유족과 이들을 돕는 단체들, 거기에 야당까지 합세해서 박 대통령에게 ‘살인자’라는 이미지를 씌우고, 당일 ‘7시간의 미스터리’를 온갖 형태로 재구성해 주장하면서 집요하게 압박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심대하게 훼손된 국정 장악력 견인력을 거의 회복하지 못한 채 진보진영의 거센 저항에 휘둘려야 했다.
이 와중에 ‘이석기의 RO’ 사건이 불거졌다. 수사 및 재판 결과 이 전의원은 사법적 징벌을 받았다. 그리고 통합진보당은 헌재에 의해 해산되었으며 소속 의원들은 그 직을 상실했다. 이 또한 박 대통령을 비롯한 보수정권의 입지를 강화하는데 기여하기 보다는 진보세력들의 저항력만 키워준 셈이 됐다.
이해 11월에는 세계일보의 이른바 ‘정윤회 문건’ 보도가 정국을 강타했다. 이 사건의 수사 과정에서 ‘청와대 3인방’ 또는 ‘10상시’ 논란이 불거졌고 ‘불통 대통령’의 이미지는 더 굳어졌다. 대통령은 전혀 타협적이지 않았다. 보호해야 할 사람, 지켜야 할 비밀에 있었던 것인지, 물러서기 싫다는 고집이 체질화한 것인지는 지금도 파악하기 어렵다.

리퍼트 테러 이후 민중총궐기 계속

2015년 3월 5일엔 마크 리퍼트(Mark Lippert) 주한 미국 대사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민화협)가 주최한 조찬 강연회에 참석했다가 사회운동가라는 사람에 의해 테러를 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5월부터 12월까지는 온 나라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공포’에 시달렸다. 이해 10월 이래 계속된 중고등 역사 교과서 국정화 시비도 박 대통령에겐 대단한 부담이 되었다. 민노총 등의 주도로 11월 14일 이후 계속된 일련의 ‘민중총궐기’와 이 와중의 백남기 씨 사망사건 또한 박 대통령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저항이었다.
‘박근혜·새누리당 정권’의 파국은 지난해 4·13총선 참패로 그 처참한 양상을 드러냈다. 패인은 분명했다. 박 대통령이 당시 새누리당 유승민 원내대표에 대해 격한 어조로 비판하고 나선 것이 발단이었다. 2015년 5월 29일 국회가 공무원연금법 개정안과 함께 국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는데 후자가 문제였다. 시행령에 대한 수정·변경 요구권을 국회가 갖는 내용의 개정안에 대해 박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대통령은 6월 25일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에 대해 날선 비판을 가했다.
다음날 유 당시 원내대표는 “대통령께 거듭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며 저희들에게 마음을 푸시고 마음을 열어주시길 기대한다”고 사과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마음은 이미 닫힌 후였다. 결국 유 의원이 원내대표직을 물러났지만 당내 친박·비박간의 대립구도는 더 견고해졌다. 그 결정판이 4·13총선 공천파동이었다.
목불인견의 공천난장판 끝에 치른 선거에서 승리를 기대했다면 그건 터무니없고 염치없는 과욕일 것이었다. 모두가 예상한 대로 새누리당은 참패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는 빛은 없었다. 8월 9일 열린 전당대회에는 박 대통령까지 참석해서 친박 후보들에 대한 세몰이를 했다. 결과는 친박계에 의한 지도부 싹쓸이였다. 이야 말로 민의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조선일보 우병우, JTBC 태블릿PC 의혹보도

7월에 조선일보가 우병우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 비서관의 비리의혹이라는 것을 기사화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이 반격하고 나섰다. 그는 조선일보 송희영 주필이 대우조선해양으로부터 초호화 접대를 받았다고 폭로했다. 그 자료의 출처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대개들 청와대쪽을 주목한 게 사실이다. 전선은 급격히 거의 전 언론계로 확대됐다. 박 대통령의 언론 기피 성향과 정치보복에 대한 일부 언론사의 불안감에 기인했을 수 있다. 곧 미르재단·K재단 설립 운영관련 의혹 기사가 유력지들에 의해 쏟아져 나왔고, 최순실의 이름도 등장했다.
박 대통령으로서는 그러잖아도 약화일로에 있던 리더십에 일대 위기가 닥쳤다고 판단했음직 하다. 그는 10월 24일 오전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임기 중 개헌 완료 의지를 천명했다. ‘원포인트 개헌’이라는 것으로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안간힘이 오버랩되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개헌론은 혼란한 정치권을 단일 과제 속에 정렬시킬 수 있는 묘책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 저녁 JTBC가 ‘최순실의 컴퓨터’ 기사를 내 보냈다. 대통령의 연설문을 최 씨가 수정했다는 이전의 언론 보도 내용을 결정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가 제시된 것이다. 개헌 이슈는 단 몇 시간 만에 사라지고 최순실 테블릿pc 쓰나미가 역으로 청와대를 덮쳤다. 박 대통령은 다음날 급급히 해명 담화를 발표했지만, 오히려 타오르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되었다.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9일 국회의 탄핵소추로 인해, 업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헌재의 결정을 기다리는 처지가 됐다. 국회 국정조사 위원들의 호통소리가 의사당 천장을 울릴 정도였다. 큰 칼 높이 쳐든 특별검사팀의 말발굽소리는 지축을 흔들고 있다. 거리에서는 토요일 마다 퇴진을 요구하는 촛불집회가 개최된다. 최근엔 탄핵반대를 외치는 태극기 집회가 더 기세를 올리는 분위기이지만 처음 한동안은 촛불집회가 주는 위압감을 이겨내기가 아주 힘겨웠을 듯하다.

▲ 소크라테스의 죽음, 자크루이 다비드(1787년). <사진저작권=퍼블릭도메인>

군중분노와 특검, 헌재의 판단 몫

돌아보면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른 데는 적대적 시민사회단체들과 야당들의 집요한 공격, 주요언론사들과의 전선 형성, 대형 사건사고, 청와대와 여당의 정치력 부족 등이 직간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요인들이 때론 개별적으로 때로는 무더기로 박 대통령 정부를 몰아 붙였음은 우리 모두가 지켜본 그대로다.
물론 가장 큰 책임 몫은 박 대통령 자신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다만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에로의 정치리더십 변환이 이뤄지지 않았고, 정치력이 부족했다는 등의 세평이 탄핵의 사유가 될 수 있을 것인지는 헌재가 판단할 일이다. 박 대통령이 감당해야 할 사법적 책임의 유무나 그 크기 또한 특검과 헌재가 대답해야 할 몫이다.
지난달 5일 헌재에서 열린 탄핵심판사건 첫 변론에서 박 대통령 측의 서석구 변호사는 소크라테스와 미국 앤드루 존슨 전 대통령의 예를 들며 국회 탄핵소추의 부당성을 역설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의 변론은 해외 유수의 언론들에 의해서도 인용 보도된 모양인데, 뉴욕타임스의 경우 지난달 5일자 지면에 “Impeachment Trial of South Korea President Called Mob Justice”라는 제목으로 서 변호사의 변론 내용을 보도했다. 대통령에 대한 탄핵심판이 서 변호사에 의해 ‘군중 재판’으로 규정됐다는 뜻이다.
어쨌든 기원전 399년, 70세의 소크라테스는 시인 멜레토스, 정치인 겸 장인 아뉘토스, 변론가 뤼콘 등 3인에 의해 고소당해 법정에 섰다. 나라의 신을 믿지 않고,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대단히 주관적이고 추상적인 죄명이었다. 재판관 501명으로 중하규모의 법정이었다. 국사범으로 판단되었다면 1501명의 대형 법정이 마련됐을 것이다. 따라서 고분고분한 자세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가볍게 풀려날 수도 있었겠지만 그는 당당함을 버리기보다는 죽음을 택했다. 군중이 화풀이 섞인 선고를 하고 만 것이다.
만약 군중의 분노가 탄핵소추의 주 요인이 되었고, 그것이 헌재 결정의 향방을 가르는 최대의 동인이 된다면 민주정치는 혼란과 위기에 직면할 수가 있다. 자유민주법치주의를 이념적 바탕으로 하는 대한민국의 국회와 헌법재판소는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다. 그 믿음이 허물어진다는 것은 국가적 국민적 비극일 것이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0호 (2017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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