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핵개발 정책(2)
국가안위 절박상황 결단
핵개발 포기후 경제강국 건설매진

글/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기획단 부단장

경제풍월 지난 1월호에 필자의 “박정희의 핵 개발 정책”에 대한 원고가 게재된 후 평소 핵 개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글을 읽으신 몇 분들과 대화를 가졌다. 시원하다는 평이었지만 보완과 보충 설명이 필요해서 이 글을 쓴다.

▲ 1973년 일선지구를 시찰하며 무기를 보는 박정희 대통령. <사진=국가기록원>

1. 박정희는 왜 72년에 핵개발 검토를 지시했나

한국의 1972년이면 60년대의 기적적인 경제개발로 세계 최빈국이라는 굴레를 벗고 중진국의 문턱에 막 들어설 때였다. 경제지표는 1인당 GNP 278불, 수출 11억 3천만 불이라는 보잘것없는 것이었다. 이런 국력으로 핵개발 운운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71년에 한국은 자주국방 구축의 초보단계로 방위산업에 착수하여 72년에는 고작 M-1, 칼빈, 박격포, 로켓트와 수류탄과 지뢰 그리고 각종 탄약 시제 생산에 성공하여 양산단계에 들어갈 찰나에 있었다. 중화학공업화 정책도 시작하기 1년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어떤 이유로 핵 개발 검토를 지시했을까!
60년대 말을 거쳐 70년에 들어와서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한국으로서는 불리하게 냉혹하리 만큼 돌변했다. 1969년에 미국에는 닉슨 행정부가 들어서고 그 해 6월에 “아시아 각국의 방어는 당사국의 책임 하에 있다”라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미국이 월남전에서의 패전과 철수로 국민의 전쟁 혐오 심리를 반영한 것인데 실제로 이 정책의 적용을 받은 것은 한국 밖에 없다. 북한이 침범해 오면 한국의 방어는 한국이 책임져야 된다는 것이었다. 미국은 한국의 “선 보장 후 감군” 요청을 무시하고 71년 2월 한국주둔 2개 사단 중 1개 사단인 7사단(2만 명)을 철수 시켰다. 후속으로 1970년 7월내에 나머지 주둔군도 모두 철수시킨다고 협박했다. 60년대 비교적 조용하던 북괴의 한국 침공 준동이 심해갔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68년 1월의 청와대 습격사건(1.21사태), 1월23일 미 정보함 푸에블로호 납치 행위 그리고 1개 중대의 울진, 삼척지구 침투사건 등이 일어났다. 이리하여 박 대통령은 적화통일을 노리고 있는 김일성의 야욕에 대하여 미국의 확고한 안보 보장을 기대할 수 없게 되어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는 자주 국방구축을 고려치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72년 9월 초 대통령 주재 하에 국방장관, 합참의장, 대통령비서실장이 참석한 국가안보회의에서 박 대통령의 최고 실세였던 이후락 중정부장이 김일성의 핵개발 시도 첩보를 보고하면서 국제정세도 설명했다. 중동의 화약고 당사국인 이스라엘과 이집트와 리비아 등이 핵개발에 착수했고 국가 간 적대국인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추가하여 남미의 브라질과 칠레 그리고 일본이 핵개발에 합류했다는 정보 보고를 하였다. (현재 이중 핵을 보유한 국가는 이스라엘 인도와 파키스탄 3개국이며 이들 국가는 국제적으로 인정하지 않은 핵보유 자체 선언국 임) 대한민국이 처한 국제적 정세 하에서 장기적 안목에서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는 핵개발을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검토지시를 내린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도 국가안보를 생각하는 박 대통령의 신념을 볼 수 있다. 이리하여 오원철 수석비서관은 지난 1월의 원고에서와 같이 “81년까지 플루토늄 탄을 생산한다.”는 결론을 내린 건의서를 보고 드렸다.

▲ 1963년 박정희 의장이 일선지구 6군단 시찰를 위해 헬기에 탑승했다. <사진=국가기록원>UCI

2. 플루토늄 탄과 사용 후 핵연료 재처리

현재 세계에서 생산하고 있는 핵무기는 핵분열 탄과 핵융합 탄이 있다. 핵분열 탄에는 우라늄(235)과 플루토늄(239)이 있으며 핵융합 탄에는 수소탄이 있다. 핵 보유 5개국(미, 영, 불, 러, 중)은 이들 모두를 보유하고 있다. 제2차 대전시 일본에 투하된 것은 히로시마에 우라늄이며 나가사키에 플루토늄이었다. 북한은 핵분열 탄인 우라늄과 플루토늄 그리고 수소 융합 탄의 전 단계인 수소핵증폭탄을 실험했다. 우라늄탄은 우라늄 광석에 있는 우라늄(235)을 90% 이상 농축하여 만드는데 농축시설에 막대한 투자비가 소요된다. 플루토늄 탄은 원자력발전소에서 발생하는 사용 후 연료를 재처리 하면 플루토늄이 발생한다. 원래 목적은 원자력 발전소 연료로 재 순환시켜 사용하는 것인데 여기서 고순도의 플루토늄(239)을 추출할 수 있다. 이것이 플루토늄 탄이 된다. 따라서 플루토늄은 원자력 발전로가 있어야 하고 여기서 발생된 타다 남은 연료를 재처리 하여야 한다. 따라서 재처리 기술이 필수적이다. 투자비 등 모든 분야에서 플루토늄 탄은 “過大한 投資를 要하지 않고 우라늄탄 보다는 쉽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핵개발보고서에서 약간의 기술도입과 국내기술개발로 생산 가능한 “플루토늄 탄을 택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국내에서의 플루토늄 탄의 생산가능 여부는 “재처리 기술”의 확보에 달려있다. IAEA의 제재가 없다고 가정하면 기술도입이 가능하지만 불가능 시 자체적으로 기술개발 하는 도리밖에 없다. 이 경우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며 기술 개발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같은 기술을 개발하는 것이므로 특허에 걸리게 된다. 북한과 같이 폐쇄된 나라는 기술도용으로 생산이 가능하지만 한국과 같이 국제협약을 준수하는 나라는 막대한 특허료를 지불하거나 기술사용이 불가능한 경우가 발생한다.
한국은 핵연료로서의 재처리 문제를 떠나서 플루토늄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 하여 다시 발전로 원료로 순환시키면 생산 원가도 싸지고 사용 후 핵연료의 보관문제도 해결된다. 그러나 IAEA에서 재처리에 관한 한 핵탄두로 사용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지금 핵연료의 재사용으로 원가도 절감시키고 사용 후 핵연료의 보고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플루토늄을 생산하지 않는 재처리 방법인 열처리 공정을 개발하고 있다.
이미 설명 드린 바와 같이 한국은 핵개발 기술 확보를 위하여 정하여진 계획대로 1975년 초에 프랑스의 “상고방(SGN)사와 재처리 기술도입 계약을 체결하였다. 핵 개발 추진을 위하여 설립된 한국핵연료공단은 SGN사와 기술도입을 진행하였다. 계약체결 후 약 1년 6개월만인 76년 1월 23일에 SCN사의 계약을 파기했다. 미국의 한국에 대한 원전건설계획을 비롯하여 경제원조 중단 협박으로 프랑스로부터의 기술도입은 무산되었다. 그렇다고 우리는 완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조직체도 존립하여 있었고 여기에 상당한 기술 인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기술개발 한다는 각오였다.

3. IAEA의 감시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IAEA에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 당시에 핵개발을 시도하였다는 딱지가 붙었다. 북한의 핵실험이 있을 때마다 한국의 자구적 안보의 견지에서 한국도 핵을 생산하는 핵 주권 국가가 되어야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한국은 IAEA의 일등 감시대상 국이 되어있다. 이와 관련하여 IAEA의 사찰로 호된 시련을 겪은 실례를 하나 들겠다. 2000년 대 초에 KAERI(한국원자력연구소)가 LASER로 동위원소분리기술을 이용하여 의료용·산업용으로 활용되는 가돌리늄과 사마륨을 동위원소 별로 분리하는 연구를 수행하다가 연구원들의 호기심으로 과학실험실 차원에서 우라늄 분리실험을 하여 0.2gr의 농축우라늄을 만들어 냈다. KAERI로서는 2004년 6월 과기처에 보고하는 한편 IAEA와의 협정에 의거 IAEA에도 보고하였다. 여기서 일본의 JAEA가 위주가 되어 약 1주일간에 걸쳐 IAEA의 호된 사찰을 받았다. LASER에 의한 우라늄 농축도 농축 우라늄 생산의 한 가지 공법이기 때문이었다. 사찰 결과는 “실험실에서 연구원들의 호기심으로 수행한 일”로 결론을 내림으로서 IAEA의 의혹이 해소되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제목의 김진명씨가 쓴 소설은 한국의 핵 개발이라는 일급 비밀프로젝트를 상상하여 꾸며낸 완전한 픽션이라는 것을 먼저 밝히고 그 허구성을 몇 개만 지적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이 실존했던 박정희 대통령과 이휘소 박사이기 때문에 사실처럼 보인다.
이휘소 박사는 필자와 화공과 동기동창으로 경기고에서 검정고시로 서울대에 수석 입학했다.
(실제로는 당시 서울대는 과별 모집이었으므로 대학 수석입학이라는 제도가 없었음, 서울대에서 경쟁률이 가장 높았던 화공과 수석 입학이었음) 그는 입학 후 2학년이 되자 도미하여 마이애미 대학에서 전공을 물리학으로 바꾸고 U-Penn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대학에서의 강의와 페르미 연구소에서 이론 물리학 부장으로 일하는 동안 소립자론으로 세계적인 물리학자가 되어 노벨물리학 수상 후보라고 불리게끔 되었다. 핵개발과는 전혀 관련이 없지만 존경받는 학자이며 연구가였다. 미국의 핵개발은 국방과학연구소(DSTL) Los Alamos 연구소에서 맨해튼 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추진하였으며 이휘소 박사의 페르미 연구소가 담당한 것이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생명부지의 인사한테 사신을 보내는 일은 하지 않는다. 계통을 중시한다. 핵개발이면 핵개발을 담당하는 경제 2(필자 근무)비서실에서 처리토록 한다. 핵개발은 시스템 공학에 속한다. 어떤 개인 한 사람이나 도면 한 장으로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다. “허벅지를 째서 여기에 도면을 가지고 와서 박 대통령께 드렸다”는 말도 있을 수가 없다. 미국의 CIA가 미국이 반대하는 핵개발에 이휘소 박사가 협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교통사고를 가장하여 살해하였다는 말도 허구이고 단순 사고임을 경찰당국에서 발표했다.
따라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소설은 소설로서 성공한 소설이지만 내용은 진실이 아님을 밝혀둔다.

4. 박정희의 핵 개발 시나리오

지금 대한민국이 처한 국제 정세 하에서는 핵탄두 개발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비밀이든 공개적이든지 한국은 핵 개발을 할 수 없다. 북한이 핵에 대하여 핵을 핵으로 대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다. 북 핵에 대비하는 방법은 미국을 비롯한 국제적 공조에 의한 방어수단에 의지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핵 위협에 대하여는 핵보유국인 UN 상임이사국인 5개국(미, 영, 불, 러, 중) 외에도 핵을 가지고 있지 않은 많은 국가들이 국제 공조체제에 의지하고 있다. 북한의 핵 도발은 한반도뿐만 아니라 미, 일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므로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고 미, 일 나아가서 전 세계의 공통 문제이다. 한국이 만약 적화된다고 한다면 이것은 자유세계에 대한 위협이므로 미국과 자유세계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북한은 국민소득 2천여 불에 지나지 않는 세계최대 빈국이면서 세계적으로 6위의 핵개발국가이다. 대한민국은 핵개발은 하고 있지 않지만 국민소득 3만 불을 바라보는 세계 5위의 공업대국으로 세계10위권의 부국이다. 북한은 국민생활은 도탄에 빠져 있는데도 전쟁만을 노리고 있지만 대한민국은 국민의 복지를 위주로 하며 평화를 존중하는 국가이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 이래 세계화로 경제개발에 경주하여 부자나라가 되었고 북한은 핵과 미사일을 비롯한 전쟁물자만을 생산하는 폐쇄국가가 되어 세계적으로 비난 받는 독재국가가 되었다.
70년대 중반 한국은 핵개발을 시도하였지만 미국의 경제원조 중단 압박에 따라 핵개발은 포기하고 경제건설의 길을 택하여 세계가 존경하는 경제 강국이 되었다. 대한민국은 외부적으로는 핵개발은 포기하였지만 조직체와 많은 기술인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므로 핵은 생산 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핵 개발 능력은 구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부 식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긴급 필요시 6개월 내지 1년 내에 핵을 생산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시나나리오가 박 대통령의 서거로 수포로 돌아갔음은 유감이 아닐 수 없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0호 (2017년 2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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