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노장에 ‘그랜토리노’ 감독·주연

할리우드 ‘살아있는 전설’
클린트 이스트우드
팔순노장에 ‘그랜토리노’ 감독·주연

글/ 朴美靜 편집위원(박미정 스카이뷰커뮤니케이션즈 대표)

▲ 영화 '황야의 스트렌저(1973)' 포스터

할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주연을 맡은 ‘그랜 토리노’는 아주 쉽고 자연스러운 스토리여서 모처럼 안락한 기분으로 영화에 몰입할 수 있지만 끝내는 사람을 울리고 마는 그런 영화다. 영화인생 62년차, 미수(米壽)의 노장이 팔순 시절 숙수(熟手)의 솜씨로 ‘이것이 나의 영화다’라고 속삭이듯 외치듯 자유자재로 만들어 관객의 공감을 끌어냈다.

‘황야의 무법자’ 만든 ‘살아있는 전설’

미국에서도 처음엔 6개의 개봉관에서만 상영했다가 입소문이 퍼져 한 달 만에 3천개 가까운 미국 곳곳의 극장에 이 영화의 간판이 붙었다. 개봉 5주차엔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했을 정도로 호응을 받았다.
언제 적 클린트 이스트우드인지... ‘황야의 무법자’로 다가온 그였지만 언제부터인지 그는 점점 생활 속에 녹아드는 그래서 자연스럽고 그래서 더 친밀감이 느껴지는 영화를 우리에게 선사했다. 조금은 냉랭한 분위기의 마스크지만 그것이 바로 매력이기도한 그는 젊었을 때나 중년시절 그리고 이제 황혼의 장년기에 접어들어서도 여전히 매력과 카리스마를 뿜어내고 있다.
강단 있으면서 반듯해 보이는 인상에서 동양적 분위기도 느껴진다. 언뜻 기억나는 그의 예전 영화들 ‘용서받지 못한 자’ ‘사선에서’ ‘앱솔루트 파워’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밀리언달러 베이비’ 등을 거쳐 오면서 매력적인 한 남자 배우의 변해가는 모습을 지켜봐왔지만 그는 나이 들어가는 배우의 초라함보다는 오히려 당당하면서도 더 다정한 분위기로 스크린을 장악해왔던 것 같다. 그만큼 영화팬들에게 정서적으로 위안을 준 배우도 드물 것이다.

▲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 주연을 맡은 ‘그랜 토리노’ (우측) ▲영화 ‘그랜 토리노’ 의 한장면

포드 자동차 ‘그랜 토리노’

‘그랜 토리노’는 1972년 미국 포드사가 만든 자동차 이름이고 영화는 이 차를 둘러싼 이야기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고 영화관에 갔기에 더 큰 감동을 느꼈나보다. 팔순의 노장은 그랜 토리노를 통해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 같다. 삶과 죽음, 부모와 자식, 상처받은 사람들의 치유법, 다문화 국가인 미국이 안고 있는 여러 문제점들에 대해 그는 아주 쉬운 화법으로 우리에게 호소하듯 말하고 있다.
대체로 한 분야에서 대가의 경지를 이룬 사람들은 그 분야가 어떤 것이든 쉬우면서도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 역시 대가의 솜씨가 빚어낸 작품답게 보는 사람을 안심하게 만들고 하나도 어렵지 않게 말하면서도 진한 울림을 남기고 있다.
1930년생으로 1955년 영화계에 데뷔한 그는 6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영화판에서 안 해본 것이 없을 정도로 ‘영화의 모든 것’을 해봤고 그 영광을 누려왔다. 그의 다재다능함은 할리우드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그루’로서 ‘영원한 현역’으로서 여전히 그 ‘아우라’를 뿜어내고 있다.
그는 2008년에도 두 편의 영화를 제작 감독 주연하는 기염을 토했다. 젊은 영화감독들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막판 스퍼트’를 내고 있는 듯하다. 일부에선 ‘그랜 토리노’가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지상에서 감독·주연을 맡는 마지막 작품일 것이라는 말도 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2016년까지 10여 편의 영화를 제작연출하며 진정한 노익장을 과시했다.)
그 자신 “이 영화는 내 나이의 이야기이고 나한테 딱 맞는 역할이었다”고 말했듯 ‘그랜 토리노’에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의 영화인생을 살면서 터득한 모든 것이 자연스레 녹아있다.

6.25에 참전했던 괴팍한 주인공이야기

영화의 주인공 월트 코왈스키는 1950년 한국전에 참전했고, 자동차회사를 다니다 은퇴한 뒤 아내마저 먼저 보내고 매사가 못 마땅한, 괴팍한 ‘독거노인’의 삶을 살고 있다. 더구나 그가 살고 있는 주택가는 이제 점점 퇴락해 제3 세계 이민자들이 속속 모여들어 그를 아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베트남이나 라오스 태국에 살던 ‘몽족’ 일가가 새로운 이웃인 것이 월트는 영 못마땅하다. 월트는 아들내외나 손자 손녀와도 화목하게 지내질 못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은 홀로된 아버지를 요양원 같은 곳에나 모실 궁리만 하고 있다. 이런 건 요즘 한국의 실상과도 비슷한 것 같다.
내년에 대학생이 되는 손녀는 할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그랜 토리노 자동차를 물려달라고 칭얼대기나 한다. 이러니 월트가 ‘정붙이고’ 살아갈 존재는 그와 함께 늙어온 데이지라는 강아지밖에 없다. 옆집은 북적대는 대가족에다가 와글와글 시끄럽다. 이것도 월트를 화나게 만든다.
그러던 어느 날 월트는 자신의 애장품인 그랜 토리노를 훔치려는 옆집 소년 타오를 발견하고 혼찌검을 낸다. 그 사건으로 오히려 타오와 월트 노인은 거의 가족처럼 친해진다. 오죽하면 노인은 “내 자식보다 이 동양놈들과 더 통하니...”라고 말할 정도가 된다. 몽족 불량청소년들은 타오를 끌어들이려다 실패하자 타오와 그 누나를 괴롭힌다.
월트는 그 몽족 남매를 괴롭히는 불량배들을 영원히 격리 시킬 궁리를 한 끝에 어느 날 밤 행동으로 옮긴다. 영화를 보실 분들을 위해 줄거리는 여기까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에서 장엄한 희생, 아름다운 헌신, 위대한 휴머니즘이 어떤 것이라는 걸 우리에게 낮은 목소리로 말한다. 인류평화 같은 거창한 슬로건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참된 인생이라는 것을 전한다. ‘존재’ 자체로 젊은 세대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주는 ‘진정한 어른’의 모습이 어떤 거라는 걸 ‘영화언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이런 원로가 필요하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1호 (201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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