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전 산화 이수장 동기를 만나고

호국의 성지, 현충원(顯忠院)
봄은 언제 오려나
베트남전 산화 이수장 동기를 만나고

글/ 金武一(김무일) (전)현대제철㈜ 부회장

수목등도화 사재능결과(樹木等到花 謝才能結果), 강수류도사 강재능입해(江水流到舍 江才能入海)!.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른다.’ 했다. 허망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우라는 뜻일 게다. 오늘 2월 1일은 49년 전, 베트남 전사상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기록된 1968년도 월맹정규군의 구정(舊正)공세날, ‘괴룡(怪龍) 제1호작전’중에 장렬히 산화한 임관 동기생 이수장 중위의 기일(忌日)이기에 아침 일찍 이곳을 찾았다.

임관동기 이수장 중위의 영혼을 찾아

이 중위는 주월 청룡부대 제 5대대 25중대 제 1소대장이었다. 베트남 최대의 명절인 구정의 휴전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월맹군은, 베트남 북부의 옛 왕도(구 왕도)인 ‘Hue’시로 부터 시작하여 남쪽 끝 ‘Mecong Delta’지역에 이르는 베트남전역의 정부 행정기관과 연합군에 대해 대규모 기습공격을 감행했다. 이에 ‘츄라이’전선에서 ‘호이안’지역으로 갓 이동을 끝낸 청룡부대는 이들과 맞닥뜨려 ‘괴룡작전’을 펼친다. 이때 최전선의 소대장이었던 이수장중위는 ‘호이안’시의 긴급 탈환작전에 투입, 곤경에 처한 부하들을 구출하려, 관통상을 입은 옆구리를 감싸 안은 채 혈혈단신으로 적진에 용감히 뛰어들었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의 꽃다운 나이였다.
그리고 ‘樹木等到花...’ 윗 구절(句節)은 서울 동작동에 자리 잡은 국립현충원을 찾아 유유히 흐르는 한강물을 바라볼 때마다 생각나는 불교 경전 ‘화엄경(華嚴經)’의 한 구절이다. ‘끝없는 광맥을 따라 묵묵히 캐 들어가는 한사람의 광부(鑛夫)처럼, 또는 넓디넓은 화엄(華嚴)의 바다를 향해 쉬지 않고 노를 젓는 부지런한 뱃사공처럼, 초연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평생을 헤쳐 나가야만 도(道)의 경지에 다다르리라.’고 해, 옛 전우들을 찾아 이곳에 올적마다 텅 빈 가슴과 차분한 마음으로 이 구절을 가슴속 깊이 되 뇌이면서 지난날을 떠 올려 보곤 한다.

▲ 베트남전에서 활약한 4인의 인사가 전우들이 묻힌 서울 현충원을 찾았다. 묘비번호 122번 ‘ 해병중위 고 이수장’ 의 묘비 앞에서 추모하는 모습. (왼쪽부터 필자 김무일, 이영세, 장수근, 박종환). <사진=필자제공>

전역후 수시로 찾은 숭고한 성역

이곳 현충원은 1955년 7월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고의 성역이다. 구한말과 건국 당시에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장병들을 서울 장충단공원 내 장충사(壯忠寺)에 안치 했었으나, 뒤이어 발발한 한국전쟁 중에 전사자가 갑자기 폭주하는 바람에 부득이 국군통합묘지의 필요성에 따라 설치케 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재가를 얻어 동작동에 설립하게 된 이 묘역엔 순국선열과 애국지사, 그리고 전투에 참가하여 용감하게 전사한 군인과 경찰관을 비롯한 군무원 등, 국가 또는 사회발전에 지대한 공로가 인정되는 국가유공자들이 이곳에 잠들고 있다.
현재 서울, 대전의 국립현충원과 경기 이천, 경북 영천에 소재한 국립호국원등, 국립묘역엔 18만4천여명의 전사자를 비롯한 애국지사의 묘소와 14만5천분의 위패를 포함해, 모두 32만9천여명의 숭고한 혼령(魂靈)이 이곳에 안장되어 있다. 그리고 오늘도 영광된 조국의 번영을 위해 기꺼이 내놓은 귀한목숨을 소중히 되새기며, 이곳 양지바른 언덕에 호국의 신(神)이 되어 발전된 조국의 모습을 자랑스럽게 지켜볼 것이다.
필자는 군 전역 후, 자동차생산업체와 철강제조회사에 재직하던 그때, 해외출장업무를 마칠 때마다 잠시 틈을 내어 그 나라를 상징하는 역사박물관이나 혹은 상설미술관, 음악당 그리고 청년들의 요람인 유수한 대학캠퍼스를 둘러보곤 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가장 우선적으로 찾아본 곳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국민과 조국의 영토를 굳건히 지키다 쓰러진 영혼들을 길이 보존하는 그 나라의 국립묘지였으며, 그곳에서 그들의 위대한 발자취를 직접 체험해 보려 노력했다.

꺼지지 않는 불꽃 되어...

어느 해였던가?. 철강산업의 본거지인 북유럽지역의 출장업무를 끝내고 귀국항공편을 탑승하려 러시아를 경유하게 되었는데, 문득 학창시절에 탐독했던 ‘보리스 파르테르나크(Boris Parternak.1890-1960)’의 불후의 명작인 ‘닥터 지바고’를 떠 올리며, 그곳의 산야에 펼쳐진 아름다운 대자연의 신비를 눈에 담는다. ‘모스코바’의 붉은 광장과 ‘평화의 종’, 그리고 마치 양파를 얹어 놓은 듯한 ‘바실리’성당의 자태는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이 ‘로마노프’왕조의 화려했던 옛 영화(榮華)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마침 환승시간에 여유가 있어, ‘크렘린’궁전 인근에 위치한 무명용사의 묘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그런데 쌀쌀한 겨울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웨딩드레스차림의 커플들이 곳곳을 거닐기에, 마치 우리나라의 결혼풍습처럼 촬영차 왔겠거니 하며 무심코 지나치는데, 함께 수행하던 송윤순 전무가 한마디 거든다. ‘촬영이 목적이 아닌듯 한데요?.’ 한다. 확인해보니 놀랍게도 결혼식을 끝낸 신혼부부들이 친구들과 함께 제일 먼저 찾는 곳이 바로 이곳이란다. 충격이었다. 순간 애국심이 넘치는 이들 젊은이들의 반듯한 모습을 가슴 뭉클하게 바라보면서, 언젠가는 이들이 다시금 옛날의 영광을 되찾을 날이 올 것이라고 예단해 보았다.
지난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과의 전쟁에서 산화한 이곳 무명용사들의 묘지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66년 6월 건립)’이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힘차게 타 오르고 있었다. 어느 계층이나 성별, 연령을 초월해서 기쁠 때나 슬플 때마다 맨 먼저 찾는 곳이 바로 이 무명용사의 묘지라는 사실은 그들의 자존심이며 또한 애국심일 것이다. 히틀러의 침공을 목숨 걸고 격퇴한 구국(救國)용사들을 섬기는 그들의 이 같은 관습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이러한 훌륭한 관례를 앞세워 체제수호를 위한 교육으로 승화 시켰겠지만, 그날의 인상 깊었던 그 장면이 필자에게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에 까지도 기억에 생생히 남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암담한 현실을 견주어볼 때, 우리가 본받을 바가 과연 무엇인가를 똑똑히 가늠해 보는 것일 게다.
그러면 또 다른 선진국들은 어떠한가?. 미국 버지니아주의 ‘알링턴’국립묘지는 ‘포트맥’강을 사이에 두고 워싱턴DC와 마주보고 있는데, ‘여기에 오직 하느님만이 알고계신 미국의 위대한 용사가 영광 속에 영원히 잠들어 있다.’ 라는 문구가 가슴을 벅차게 한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그들의 전몰장병기념일(Memorial Day)에 이곳에서 펼쳐지는 헌화(獻花)행사는 실로 범 국가적이다.
그리고 이 행사에 참석코자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참배객들의 끝없는 행렬 또한 감동적이다. 어디 그뿐인가, 이러한 추념행사는 몇 날 몇 밤을 두고 미국전역에서 엄숙히 거행된다. 특히 도심복판에 위치한 미해병대의 ‘이오지마’상륙작전을 재현한 성조기 계양장면의 동상과, 뉴욕의 중심가에 세워진 한국전쟁 때의 장진호전투를 조명하는 부조물 앞에서 거행되는 추모행사를 접할 때마다, 그들의 국가를 위한 충성심에 고개 숙여 감탄할 뿐이다.
영국도 그렇다. 런던의 도심에는 ‘제 2차 세계대전 전사자기념비’가 세워져 있으며,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에도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산화한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영원한 불꽃’이 단 하루도 끊이지 않고 타 오르고 있다. 또한 그리스 ‘아테네’의 국회의사당 벽면에도 이들을 기념하는 ‘무명용사의 부조(浮彫)’가 조각되어 있는데, 특히 그 하단부에 기록된 195명의 한국전쟁 참전 전몰용사의 명단을 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 급히 인근 꽃집을 찾아 추모의 꽃을 준비해 헌화한 적도 있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북경의 천안문광장 남쪽, 가장 요지의 중심부에 높이 38m의 ‘오베리스크’가 위용을 자랑한다. 궁금해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표면에 ‘인민영웅 기념비(人民英雄 記念碑)’라고 적혀있다. 이 비석엔 중국혁명을 위해 숨진 용감한 전사들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으며, 정면에 ‘인민의 영웅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人民英雄 永垂不朽)’ 뜻의 황금빛 휘호가 모택동(마오쩌뚱)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영원히 잊지 않고 기억하리니..!.

이처럼 자본주의국가나 혹은 사회주의국가를 막론하고, 온 세상의 모든 국가들은 조국을 위해 귀한 목숨을 바친 용사들을 기리고 있는 것이다. 이는 나라를 위해 한 몸을 아낌없이 던진 무명용사들을 추모하는 것이 국가라는 공동체의 유지발전에 불가결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다수민족으로 이뤄진 구미각국이 국가의 위기 때마다 단결하는 모습을 보이는 비결은, 바로 나라를 위해 몸 바쳐 죽어간 이들을 기념하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국민의식’에 기인된 국가의 성스러운 사명일게다.
예컨대, 미국은 유해 발굴 예산만 해도 매년 수억 달러씩 배정한다. 반면에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이 차제에 지난날을 필히 반성하고 넘어갈 일이 있다. 2002년 6월, ‘월드컵’의 열기가 한창일 무렵, 북한함정의 불법발포로 서해바다에서 전사한 6명의 우리 해군장병들을 국민들은 기억할 것이다. 그날, 이 나라의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은 무엇을 했던가?. 동경으로 날아가 축구를 관전하면서 뻔뻔스럽게도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이들의 5주년 추모행사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을 때, 당시대통령 노무현은커녕, 장관들 한 놈도 코빼기하나 안 비쳤었다. 도대체 이런 쓸개 빠진 나라가 이 지구상에 어디에 또 있단 말인가?.
그날, 전사한 박동혁 병장의 어머니는 대성통곡을 하며 ‘내 아들이 과연 누구를 위해 죽었단 말인가?.’라며 울부짖는 애처로운 모습을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보고 들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실례로, 북한의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 포격으로 무려 50여명의 우리 해군, 해병대용사들과 민간인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들을 고이 보내는 영결식 날, 우리국민들은 유족들의 오열하는 모습을 보았다. 주말인 이날, 골프장에는 화창한 봄날을 만끽하려는 일부 위정자들과 국무위원들이 즐비했다니, 과연 우리나라 공직자들은 그들의 아픔을 도대체 얼마나 공감하며 슬퍼했는지?. 여기에서 우리는 나라를 위해 몸 바친 선열들을 기리는데 너무나 인색하고 야박한건 아닌지 깊이 통찰해 볼 일이다.
6.25전쟁은 분명히 북한이 남침을 일으켜 발발한 전쟁이다. 이 전쟁은 역사의 한 단면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겪은 뼈아픈 동족상잔의 비극임에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광화문을 나가보라!. 기껏해야 반세기가 흘렀을 뿐인데도 벌써 까맣게 잊혀져가는 그 비극이 한낱 몰지각한 철부지들의 촛불시위로 퇴색되는 현실이 개탄스러울 뿐이다. 어디 그뿐인가. 아직도 그때 숨져간 무명용사들은 부모형제가 살고 있는 고향산천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채 오늘도 이름 모를 어느 계곡에 묻혀 원통함을 달래고 있을 것이다. 이들의 원혼을 과연 누가 달래준단 말인가?.
세월은 무심히 흘러 휴전 60년이 훌쩍 지났다. 이제 우리국민의 75%가 전후세대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가장 위태로운 나라인 우리나라가 혹시 또다시 위급상황을 맞는다면, 과연 누가 이 나라를 앞장서서 지킬 것인가. 심각한 이때에 순국선열과 무명용사들을 기리는 것 만큼 국민교육에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국가가 있어야 국민도 있고, 국민이 있어야 국가의 미래도 존재할 것이다. 국가와 국민을 위해 소중한 목숨을 초개처럼 던지고 산화한 그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것이 나라와 국민들의 내일을 위한 기본자세가 아닐는지?.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 Oblige)”

필자는 이쯤에서 문득 프랑스 ‘노르망디’해안 근처의 ‘깔레’항구에 세워진 ‘로댕(Rene Auguste Rodin.1840-1917)’의 불후의 명작 ‘깔레의 시민.’을 떠 올려보았다. 그리고 풍전등화와도 같은 국가의 위기 앞에서 보여준 ‘노블레스 오브리제’의 숭고한 시민정신을 생각해 본다. 이에 비해, 어떻게 하면 지네 아들만큼은 군대에 내 보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우리나라의 일부 정치인들이나 모리배들과는 너무도 거리가 멀어 착잡할 뿐이다. 심지어 국토방위의 숭고한 의무를 마치 썩다 나오는 기간이라고 주절대던 얼간이 같은 인간도 있었지만 말이다.
인구 12만명이 채 안 되는 이 조그마한 항구마을은 영국 도버해협과 거리 20마일에 불과해, 영국과 프랑스 파리의 중간쯤 지점이기도 하다. ‘깔레’의 시청 앞 광장에 서 있는 세계적인 이 조각상은 6명의 시민이 목에 밧줄을 감고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힘겹게 옮기는 조각상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조각이 아니라 ‘깔레’시민의 명예이며 프랑스국민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귀족의 의무를 뜻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라는 단어의 상징이 바로 이 ‘로댕’의 조각작품이기 때문이다. ‘로댕’은 이 ‘깔레’의 용감한 6명의 시민을 모티브로 10년이란 긴 세월에 걸쳐 정성껏 이 조각상을 다듬고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았다.
이 조각에 얽힌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프랑스와 영국의 백년전쟁(1337-1453.)때 ‘깔레’시민들은 끝까지 영국에 저항하다가 약속된 구원군이 오질 않아 1374년이 서서히 저물 무렵, 끝내 백기를 든다. 분노한 영국왕 ‘에드워드 3세’는 누군가는 이 저항에 책임을 져야한다며 6명의 ‘깔레’시민이 자발적으로 목에 밧줄을 걸고 영국군 진영으로 걸어와 처형당할 것을 요구했다. 이때 이 지역에서 제일 부자였던 ‘외스타슈트 피에르’가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선뜻 나섰다. 그러자 뒤이어 이 시의 책임자인 ‘쟝 데르’ 시장이 나왔고 이에 부유한 상인 ‘피엘르 드 위쌍’이 나섰다. 게다가 ‘드 위쌍’의 외아들마저 아버지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따르겠다며 나오는 바람에 감격한 일반시민 3명까지 합쳐 모두 7명이 되었다.
이에 ‘외스타슈트’는 만일 남는 한명을 제외시키려고 제비를 뽑는다면, 인간인 이상 행운을 바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일아침 처형장에 제일 늦게나오는 사람을 빼자고 제의했다. 다음날 아침, 6명이 일찌감치 처형장에 모였을 때 유독 ‘외스타슈트’가 보이질 않아 의아하게 생각한 시민들이 그의 집으로 달려갔을 때, 그는 이미 자결한 뒤였다. 처형을 자원한 7명 가운데 한사람이라도 살아남는다면 순교자들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해 먼저 죽음을 택했던 것이다.
이 가슴 아픈 소식은 삽시간에 온 마을에 퍼졌고, 이윽고 영국왕실에까지 알게 되었다. 이 소문을 전해들은 ‘펠리페’왕비가 크게 감동하여 ‘에드워드’국왕에게 자비를 베풀 것을 간청했다. 당시 왕비는 임신 중이었기에 왕은 왕비의 이 같은 간절한 소망을 신중히 받아들여 처형계획을 전면 취소했다. 그 후 ‘깔레’시는 ‘노블레스(귀족) 오블리제(의무)’라는 단어의 상징으로 등장했으며, 이후 5백년이 지난 후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깔레’시민들은 ‘로댕’에게 요청하여 이 불후의 조각상이 탄생하게 되었다.

조국이 위태로워 나를 부르면 깨워다오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이처럼 나라사랑과 희생정신에서 비롯된 애국심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1차 세계대전 때 영국 귀족계급의 남성중에 1/4인 25%가 전사했고, ‘옥스포드’와 ‘캠브릿지’대학생 1/3 이 전장에서 돌아오질 못했는가 하면, 이 나라 상류층 자제들의 명문인 ‘이튼스쿨(Eaten scool.)’에선 양차 세계대전 동안에 무려 5천여명의 청소년들이 참전하여 희생됐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때 ‘엘리자베스’여왕이 당시 공주의 신분으로 수송병과 하사관으로 참전했던 것이나, 혹은 왕자를 필두로 왕족과 귀족들이 과거 장미(薔黴)전쟁, 또는 십자군전쟁을 위시한 ‘포클랜드’전투, 그리고 최근의 이라크, 중동전에 최 일선에 참전하여 선봉에 서는 등의 모범이 바로 이 시민정신의 상징일 것이다.
이에 ‘불가리아’출신의 프랑스 샹송가수 ‘실비 바르땅’은 그의 추모곡 ‘무명용사(Les Hommes.)’에서 ‘그대들은 비록 한줌의 연기로 사라질지라도, 역사는 그대들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며 사람들은 당신들을 끝없이 끝없이 찬양할 것이다.’ 라고 노래했다. 필자는 평소 이 노래를 접할 때마다, 우리나라 지도층의 충혼, 보훈의식과 선진국과의 차이를 비교해 본다. 그리고 한 국가의 지도자들에 호국, 충정의식이 자라나는 젊은 세대와 일반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견주어 보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이 얼마나 멋진 문구인가?.
지난 설날, 필자는 스물두개의 꽃묶음을 정성껏 품에 안고, ‘베트남’전을 함께 치르다가 전사한 옛 부하들과 동기생들을 만나러 현충원을 찾았다. 그리고 다녀와서 저녁뉴스를 보았다. 새해 첫날, 해돋이를 맞으려는 듯 동해바다 ‘정동진’을 향하는 고속도로는 체증에 시달려 온종일 혼잡을 이뤘다 했다. 그러나 현충원과 국립호국원을 찾는 사람은 눈을 씻고 보아도 없었다. 몇몇 유가족들 외에는...
끝으로 필자가 초급장교시절에 가까이 모셨던 예비역 해병중장 이동룡 장군의 묘비문구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저미게 해 이곳에 옮기며 글을 맺는다.
“사랑하는 아들아..!. 혹시 조국이 위태로워 나를 부르거든 즉시 깨워다오. 내 다시 분연히 일어나 총을 들리라..!.”.
하얗게 잔설(殘雪)이 덮인 이곳 현충원 언덕엔 언제쯤에나 새봄이 찾아오려나?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1호 (201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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