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천차만별 세월 속
행복하십니까

글 / 金淑(김숙) 편집위원(자유기고가)

언제부턴가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지만 차츰차츰 하고싶은 일들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난(?) 시절에는 그냥저냥 넘어갔던 일들이 이제와 새삼 풀지 않으면 안 될 숙제처럼 다가온다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안 할 말로, 남달리 책임감이 강하다든가 목표의식이 투철하다든가 뭐, 그런 쪽이라면 모르겠으나 솔직히 말하자면 잔꾀를 부리면서라도 제 한 몸 편하면 그만이었다.
또 있다. 자꾸 내면이 복잡해진다. 예전에는 긍정적인 차원을 넘어 천하태평이었다. 머리 아플 일들이 거의 없었고 설령 있었다 해도 의식적으로 심각한 수준까지 절대 끌고 가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는 사소한 일조차 걱정이 앞서고 모든 일에 줄곧 근심이 따라다닌다.
좋다,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지는 것까지야 그럴 수 있다. 삶에 치열하지 못했던 그동안의 생활태도나 느슨했던 사고의 회로에 반성의 여지가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한 새로운 의욕이 불타오를 수 있으니 말이다. 덧붙여 나름대로의 계획이 여태 속 시원하게 풀리지 않았다면 그 또한 그럴 수 있다. 뒤늦게나마 뭔가의 미흡했음에 확실하게 마침표를 찍고 께름칙한 부분을 분명히 매듭지어야 할 테니 말이다.
그건 그렇다 치고,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짐과 까닭 없이 복잡해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이런 불안요인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차근히 짚어봐야겠다.
나는 행복했는가, 불행했는가...
지금 행복한가, 불행한가...
이 물음에는 그렇다, 아니다로 짧게 대답할 수는 없을 듯 하다. 행복과 불행은 늘 동전의 양면 같아서 자유자재로 수위를 넘나들었다. 단적으로 말해 마음대로 되어지는 날에는 행복했다가 장애가 나타나면 이내 불행했다. 살고 있는 아파트의 평수가 친구가 사는 아파트의 평수보다 넓으면 결혼을 잘했다 싶어 행복했고 손가락이나 손목, 혹은 목에서 반짝이는 금붙이라든가 장신구가 친구의 그것보다 작거나 값이 덜 나가면 결혼을 잘못했다 싶어 불행했다. 내 어머니의 밑도 끝도 없는, 낯 뜨거운 칭찬이 아니고서는 결코 미인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어도 인위적인 아름다움이 득세하는 세상에 초자연적인 외모로 버티어낼 수 있음에 감사하며 행복했고, 얼굴이나 신체의 필요부위마다 지방흡입을 한다거나 깎아내고(?) 벗겨내는(?) 성형수술을 밥 먹듯 하면서도 신용카드의 잔고 따위를 염려하지 않는 친구의 두둑한 지갑을 보면 시무룩해지며 곧 불행했다. 이렇듯 따지고 보면 다소 색깔만 달리 포장했을 뿐 결국 행, 불행의 척도는 통장의 잔고를 기준할 때가 많았다. 이 대목에서 죄 없는 사람들까지 싸잡아 한 통속으로 몰아붙이는 오류를 범하고 싶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필자의 세속적 잣대로 재봤던 필자만의 얘기다. 이를테면 재산보유상태나 현금인출 가능액이 행복을 가늠하는 순간감지기였다는 사실을 털어놓는 것뿐이다.
그로부터 세월이 많이 흘렀다. 어느새 지난시절을 되돌아보며 다 그때의 기준이라고, 지금은 굉장히 달라졌다고 천연덕스럽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것도 없다. 타고난 성향이라든가 성품이,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라는 자기고유의 독특한 물건이 어디 손바닥 뒤집듯 바뀌어지기가 그리 쉽던가...
다만 나이가 주는 덕목은 있다. 소위 나잇값이라 칭하는 것인데 새해맞이 떡국을 거저먹었던 건 아닌 것 같다. 먹은 그릇의 숫자만큼, 정확히 딱 그만큼 삶의 이치가 깨달아지던 것이다. 그 이치 안에 [내려놓기]라는 덕목이 있음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이건 단순히 웃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세상물정에 어두웠던 시절에 성형외과를 단골로 다닐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문화적 충격과 상대적 박탈감에 비굴한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의료보험혜택이 한 푼도 적용되지 않는 성형외과는 물론 피부과도 제대로 다녀본 적이 없는 자신의 안팎을 속셈해보며 금세 바닥이 드러나는 얄팍한 소득에 괜한 남편을 중죄인으로 몰아넣고 발톱을 세워 생사람을 잡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허송세월할 여유가 없다. 내가 그보다 부족하고 그가 나보다 넘쳐나도 저울질할 필요가 없다. 그로 인해 내가 불행해야 할 까닭은 더더욱 없다. 같은 하늘에 머리를 두고 산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과정이 천차만별이고 천태만상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면 그만이다. 다종다양한 사람들의 제각기 다른 삶을 분별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와 다름의 인정] 이 것 또한 여직껏 먹었던 떡국의 그릇수와 정비례하는, 세월이 터득하게 해 준 귀한 덕목이라 할 수 있다.
학교 다닐 때의 얘기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지금 하고 싶은 얘기다... 행복은 통장의 잔고(殘高) 순(順)이 아니잖아요...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1호 (2017년 3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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