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사업회, 이데올로기 싸움의 승리
한· 미 인도주의 영웅들 영원히 기록

흥남철수작전 역사서
세계전사상 휴먼드라마
기념사업회, 이데올로기 싸움의 승리
한· 미 인도주의 영웅들 영원히 기록

6.25 전쟁의 참사를 증언하는 흥남철수작전이 500페이지가 넘는 ‘전쟁 역사서’로서 방대한 기록물로 출간됐다.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회장 이진규)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숙원사업’을 2016년 12월 30일, 비매품으로 발간했다. 흥남철수작전은 모택동 중공군의 개입으로 북진통일의 꿈이 무산된 처절한 철수작전이었지만 세계 전사상 유례가 없는 장엄한 휴먼 드라마로 기록될 수 있다.

▲ 흥남 철수 직후, 폭파되는 흥남부두를 관측하는 USS begor호. <사진=US Navy photo now in the collections of the US National Archives, 저작=퍼블릭도메인>

세계 전사상 휴먼드라마 최상급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는 1950년 12월, 압록강변까지 북진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철수하면서 혹독한 추위 속에 민간인 피난민 10만명을 남한으로 피난시킨 작전으로 ‘인도주의’, ‘평화주의’, ‘자유주의’의 휴먼 드라마 결정판이라고 강조한다.
흥남철수작전이란 6.25 전쟁의 급박한 전환국면에서 유엔군 10만 병력과 막대한 전쟁물자를 수송해야 하는 긴박한 중대작전이었다. 유엔군은 장진호 전투의 피해에다 중공군과 인민군의 인해전술로 야간피습에 시달리면서 조명탄으로 밤을 밝혀 겨우 방어할 수 있었다.
이때 피난민을 위장한 인민군 척후병들이 침투하여 암약하면서 “미군이 피난민들을 배에 태워 바다 가운데에 수장시키려 한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렇지만 북한 전역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은 공산당 학정을 피해 남한으로 가겠다는 물결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삶과 죽음이 순식간에 엇갈리는 눈보라의 벌판이었다. 이때 국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 부참모장 포니 대령, 알몬드 장군의 통역 겸 민사고문 현봉학 박사가 나서 미군 당국을 설득시키는데 성공했다. 알몬드 장군이 공산당의 학정을 피해 자유를 찾아 남하하려는 피난민들을 구하겠다고 동의한 것이다.
알몬드 장군이 모든 가용선박의 동원을 명하여 크고 작은 어선을 비롯하여 193척이 철수작전에 참여하고 맨 마지막 화물선으로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1만4천명의 피난민들을 빽빽이 싣고 기적 같은 무사항해에 성공했던 것이다.

인도주의 영웅들… 맥아더, 알몬드 장군등

기념사업회는 흥남철수작전을 ‘이데올로기 싸움의 승리’라고 표현한다. 당시 미군은 맥아더 사령부의 철수작전 결단으로 10일 내에 10만명의 병력과 군사장비를 흥남으로부터 철수시켜야 했다. 이때 민간인 피난민 수송문제가 제기되어 진퇴양난이었지만 끝내 인도주의의 결단으로 이들을 모두 남한으로 수송할 수 있었다.
빅토리호에는 미 10군단측 고위참모들이 동승하여 각종 안전과 위생, 식량문제 등이 겹쳤지만 끝내 무사 항해했다. 이 와중에 5명의 새 생명이 탄생하여 급한 김에 김치1, 김치2 등 김치로 명명했으며 김치5가 바로 거제도에 거주하는 수의사 이경필 씨로서 그때 그 세월을 증언하고 있으니 얼마나 감동, 감격인가.
기념사업회는 흥남철수작전이 군사작전이었는데도 인도주의 평화정신으로 민간인 피난민들을 대량으로 안전 수송한 것은 세계 전쟁사상 전무후무하다고 논평했다.
기념사업회는 흥남철수작전의 미국인 인도주의 영웅으로 맥아더 장군을 비롯하여 작전 당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 당시 미 해병 대대장 데이비스 중령, 10군단 부참모장 포니 대령, 미 해병 제1사단당 스미스 장군, 빅토리호 선장 라루(Leonard Larue), 빅토리호 간부장 로버트 루니(Lunney), 군종참모 맥 클러리(Mccleary) 등을 잊을 수 없는 인물로 꼽는다.

▲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있는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 <사진=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

제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큰공

반면에 한국인으로는 제1군단장 김백일(金白一) 장군을 먼저 꼽는다. 김 장군은 함북 명천군 태생으로 독립투사 가문의 피를 받아 일찍부터 군인의 길을 걸었다. 한국군으로 편입된 후에는 군사영어학교를 거쳐 국군 3연대 창설 연대장으로부터 육사교장, 여순반란 진압 당시 5여단장, 옹진지구 전투사령관, 육군보병학교 초대 교장을 역임했다.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4월에는 육본 행정참모부장을 거쳐 제1군단장으로 낙동강 방어전을 지휘하고 북진 시기에는 10월 1일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하여 ‘국군의 날’을 제정토록 하고 중공군의 참전으로 흥남철수작전시 미군 당국에 피난민 수송을 강력 요청했던 것이다.
그 뒤 1951년 3월 28일, 한미연합 작전회의에 참석한 후 악천후 속에 사령부로 귀환 도중 진부령 고개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흥남철수작전시 피난민 수송의 공적이 평가되어 거제도 흥남철수작전 기념공원에는 장군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기념사업회는 김백일 장군 외 한국인 영웅으로는 제1군단 3사단장 최석 장군, 수도사단장 송요찬 장군, 1군단 예민 참모 박시창 장군, 민사부장 유원식 장군, 헌병대장 김득모 대령 등을 꼽는다.

민간인 최대영웅은 현봉학 박사

흥남철수작전 민간인 최대 영웅이자 은인으로는 단연 현봉학(玄鳳學) 박사가 먼저 꼽힌다. 함흥 태생인 현 박사는 함흥고보,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의료전문인으로 1947년 서울 적십자병원에 근무하다 미 버지니아 리치몬드 주립대 임상병리 수련과정을 거쳐 1950년 4월 해병대 통역관으로 군과 인연을 맺었다.
그 뒤 6.25 전쟁으로 함흥에 진군한 미 제10군단장 알몬드 장군이 영어에 능통한 현 박사를 불러 통역관 겸 민사참모역을 맡으면서 흥남철수작전시 민간인들의 피난을 장군에게 적극 설득했던 것이다. 이때 미 제10군 부참모장 포니 대령이 적극 참여하여 협조했다.
현 박사는 6.25 전쟁이 끝난 후 미국으로 돌아가 의과대학 교수를 역임하면서 1998년 미국을 방문한 영안모자 백성학 회장을 만나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발기의 계기를 마련했다. 백성학 회장 등은 2002년 5월, ‘현봉학 교수 사은의 밤’ 행사를 갖고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를 설립했으며 백성학 회장의 후원과 이북5도 등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각종 기념사업을 벌여오고 있다.

영안모자 백회장 세계의 모자왕이 되기까지

기념사업회를 적극 후원해 오고 있는 영안모자 백성학(白聖鶴) 회장은 1940년 4월 중국 흑룡강성에서 독립운동 가문의 피를 타고 태어났다. 당시 부친이 백화점을 운영하는 사업가로도 활약했으나 백성학이 겨우 다섯 살 때 부친이 장티푸스로 사망하여 조부가 평북 용안포 외가로 데려가 이주했으며 얼마 뒤 다시 원산으로 이주했다가 6.25를 만났다.
백성학은 모친을 모시고 있으면서 마을사람들의 피난길을 전송하다 난간에서 추락했다가 본의 아니게 홀로 승선하여 남녘으로 피난하게 됐다. 피난선이 묵호항에 기착하여 백성학은 포항을 거쳐 경주에서 역전 식당의 청소부와 구두닦이로 피난살이 하다 다시 안동을 거쳐 원주에서 미 해병대를 만나 피난살이의 진로를 고쳐 잡았다.
1952년 미 해병 제1사단 소속 데이빗 베티(David Beatti) 병사를 알게 된 것이 운명이었다. 베티 병사는 당시 자주포 사수로 백성학에게 먹을 것과 약품을 제공해 주고 영어도 가르쳐 주었다. 그는 본명은 데이빗 베티였지만 쉽게 ‘빌리’로 불려 나중에 빌리 찾기에 나서기도 했다.
백성학은 미 해병 1사단에서 고아원으로 넘겨졌다가 1955년 서울로 올라와 모자공장에 취직하여 하루 18시간 중노동하면서 ‘세계의 모자 왕’ 꿈을 키울 수 있었다. 처음 모자공장에서 온갖 잡역으로부터 판매원까지 성실하게 일하며 모자를 연구하여 19세 때 모자공장을 설립했다. 그 뒤 1965년 산업박람회에 모자를 출품했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전시관을 참관하며 “나도 영안모자를 자주 쓴다”고 한마디 하여 KOTRA 망을 통해 일본과 미국 등지로 수출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로부터 영안모자는 50여년간 꾸준히 발전하여 지금은 각국에 진출한 44개 법인, 연간 매출 16억5천만 달러로 세계의 모자왕의 칭호를 받는다. 미국 메이저 야구선수 절반이 영안모자를 이용한다는 사실만으로 백성학 회장의 모자사업 성공은 설명될 수 있다.

37년만에 6.25 은인 빌리 만나

백성학 회장은 모자사업 성공 이후 각종 사회사업과 보은사업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의 교육사업은 숭의학원, 방송사업은 OBS 경인방송, 사회복지사업은 ‘백학재단’으로 설명된다.
‘한국 백학마을’ 사업은 1986년 9월, 국군 110 포부대와 미 포병 300대대가 주둔했던 강원도 홍천 6만평에 결핵요양원, 부속의료원, 교회, 학교 등을 설립 운영한다. 중국의 백학마을은 1993년 8월, 백 회장이 출생한 흑룡강성 홍원군에 교회, 중학교, 양로원을 설립·운영하고 있고 코스타리카 백학마을(1994.12), 스리랑카 백학마을(1999.10), 미국 LA에는 City of Hope(1995.7)를 운영한다.
무엇보다 6.25 피난시절 은인 ‘빌리’(베티)찾기 집념이 성공하여 1990년 리더스 다이제스트 3월호에 ‘6.25 은인 찾은 세계의 모자 왕’ 이야기가 큰 화제이다. 이에 따르면 빌리가 소속됐던 부대는 아이오와주 방위군의 일부로 구성된 900여명의 야전 포병대대였다.
백 회장은 미국 방문 중 리더스 다이제스트 기자의 도움으로 빌리를 만나고자 백방으로 수소문하기 시작하여 FBI 첩보요원 은퇴자, 300 포병대대 상사 출신 등과도 접촉하다가 1990년 헤어진 후 37년 만에 만났다. 빌리는 고아 출신으로 6.25에 참전했다가 1957년 제대 후 귀국하여 양어머니 아래서 부두 노동자, 공장 직공, 건물 청소부 등으로 어렵게 살면서 시간당 8달러 임금으로 4명의 자녀를 양육하고 있었다.
‘세계의 모자 왕’으로 성공한 백성학 회장이 빌리를 만나 여러 가지 지원을 약속했지만 그는 만난 사실이 중요하다면서 금전적 후원을 끝내 사양했다고 한다.

함경도 또순이 기질로 남한사회 정착

▲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발간한 '아! 흥남철수'

흥남철수작전기념회가 펴낸 ‘아! 흥남철수’는 북한의 해방정국과 남한 적화통일 준비과정에서부터 중공군의 개입, 장진호의 격전 등 6.25의 전 과정을 짚어가며 흥남철수작전의 피난민 구출작전 과정을 다각도로 자세히 기록했다.
이 역사서는 흥남 부두에 남겨진 사람들의 참상을 기록하고 최후의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기적의 항해’, ‘청사에 빛날 인도주의 영웅들’ 편에 이어 흥남철수작전기념회의 각종 기념사업들을 소개하고 있다.
1950년 12월 24일 12시 반,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부산항 앞 오륙도에 도착했지만 부산항은 유엔군의 각종 전함으로 접안할 여지가 없는데다가 부산에는 100만명의 피난민이 넘쳐 민간인 피난민들의 하선(下船)을 불허했다. 이 때문에 온갖 교섭에도 방도가 없어 거제도로 향발하여 어항인 장승포에 기착, 다음날 성탄절 날 미 해군의 상륙정 도움으로 상륙할 수 있었다.
흥남철수작전에 10만 피난민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정일권 육군참모총장과 이승만 대통령도 감격의 눈물을 쏟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당시 거제도에는 17만3천명을 수용한 포로수용소에다 흥남철수작전 피난민들이 겹쳐 원주민들을 훨씬 능가하는 피난민 도시로 변했다. 이 결과 식량과 물자가 들어오고 유통시장이 열리고 ‘함경도 또순이’ 등 피난민들의 끈기와 열정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피난민들은 상업활동 뿐만 아니라 종교, 교육 등 전 분야에 걸쳐 지극정성으로 참여하고 반공전선에 누구보다도 용맹하게 진출하여 대한민국 수호와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1호 (2017년 3월호) 기사입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