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수필]

스마트폰 사진첩 속
‘좋은 인연들’

글 / 최수권(전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수필가)

어느 가정이든, 가정사의 기록은 사진 앨범으로 남겨져 있고, 오랜 세월이 쌓이면 무척 많은 분량의 사진첩으로 보관된다. 시대가 바뀌어, 아날로그시대의 사진들을 자식이나 후손들에게 물려준다는 것이 시대에 뒤처질 뿐 아니라, 그냥 짐으로 여겨지고, 남겨질 자료가 후대들에게 유용할 것 같지 않아, 디지털로 전환하기로 마음먹었다.
사진들을 스마트폰으로 촬영을 시작했다. 1,000장도 넘는 사진을 쉬엄쉬엄 5일간을 작업했다. 스마트폰의 화소가 좋아서, 원본사진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자료들을 “네이버 클라우드”로 저장시켰다. 데이터 보정도 할 수 있는 기능도 있어 컴퓨터 초보자도 좋은 결과물을 얻을 수 있고, 프로그램도 좋아 쉽게 접근 할 수 있다.
복지관의 컴퓨터 교실에서 수강한 실력만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작업이었다. 철이 들고부터 반백년의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세월의 뒤켠, 그 마디마디에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돌아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이기도 하였다. 지난 세월이 참으로 아득하고 긴 시간인 듯 하였는데, 그 장장한 시간의 기록들을 단 며칠 만에 정리 할 수 있었다. 내 삶이 유장한 줄만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나 생각을 헤아려 보면 지지리도 멀고, 오랜 여정이었다. 결코 쉽지만은 않았던 인생 여정이었다. 언제부턴가, 나는 어지간히 세월의 난간에 기대섰다는 사념에 젖어 시간의 가파른 난간에서, 지난 과거를 회상해본다. 아슬아슬하게 뒤돌아보는 하나, 하나의 장면들을.
60년대 중반 나는 고등학교 졸업반이었다. 고3년 동안 (영어신문/주간지)를 중고등학생들에게 배달하는 알바를 하면서 어렵게 보내고 있었고, 대학 진학은 어림도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도 꿈을 접을 수 없어, 정말 열심히 노력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대학입시를 위해 상경했다.
상경전날, 중학교 음악선생님인 최 선생님의 저녁초대를 받았다. 선생님은 수녀원을 퇴소하고, E대 음악대학을 나온 분이었다. 하숙집에서 저녁을 대접하면서 이렇게 기도해 주셨다.
“이 학생의 길에 주님 늘 함께해 주십시오. 어떤 고난의 길에도 좌절치 않게...”
당시 시대의 환경은, 타인을 위한 관심이나 배려, 사랑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누구나 살아가기에도 벅찬 시절이었다.
누군가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아본 내 생애 최초의 사건이었다. 단아한 하숙방 한켠 책상위에는, 성모마리아상이 촛불로 환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는 천주교를 잘 알지 못해 생경스러웠지만, 아늑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했다. 최 선생님의 지원과 주선으로 중간 기착지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남녘 끝에서 서울로 입성했다. 그리고 고학생의 서울생활은 주야로 뛰어야 생활할 수 있는 힘든 시간들이었다. 나는 중고등학교 때 밴드부에서 색소폰을 불었다. 그래서 알바로 밤무대의 연주인으로 나섰다. 참 오랫동안 그 일을 했다. 당시 밴드맨들이 모이는 곳이 명동성당 근처에 있는 “왕성 당구장”이었다. 전국에서 음악 하는 이들이 오후시간엔 그곳으로 모여들었다. 서로 정보교환도 하고 그곳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나는 일자리가 없을 때는 명동성당을 찾았다. 성당 아래쪽에는 최 선생댁에서 마주했던 성모님상이 있어서였다. 성모상 앞의 기도틀에서 묵상의 시간을 갖기도 했다. 최 선생님과는 몇 차례 서신으로 안부를 교환했으나, 내 주거가 일정치 않아 두절됐다. 지금은 팔순을 넘으셨을 듯하다. 너를 위해 항상 기도한다는 편지의 구절이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이고, 용기를 가져다준 축복의 말인지를 실감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은 천주교 신자다. 사랑은 “관심과 배려, 상대의 마음을 안아주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당시 유흥가에서 음악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연주실력 보다는 업소근처에 기생하는 조폭들과의 신경전이 더 힘들었다. 이를테면 자릿세 같은 것이었다. 그때 나를 형제처럼 뒤를 봐준 분이 있었다. 내 딱한 처지를 격려해준 분이었다. 당시 서울 시경 문두종 팀장이었다. 건달 누구도 나를 함부로 하질 못했다. 내가 군대를 제대하고 직장생활 할 때까지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분은 나의 멘토였다. 진심으로 나를 격려해주고, 위로해 주었다. 내 승진을 나보다 더 기뻐했던 분이었다. 지금도 저 세상에서도 나를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이 여물지 않을 때 나에게 영향을 준분들이 많다. 나는 늘 분에 넘친 사랑만 받았다는 생각이다. 내 작은 관심과 배려가 어떤 이에게는 인생의 판을 바꾸는 행위일수도 있다. 앨범을 정리하면서 떠오른 유쾌한 상념들이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수한 종류의 세상 바람과 맞닥뜨린다. 그 바람에 함몰되는 것을 보기도 한다. 사는 게, 오늘의 지위나 권세가 아니라, 지금 살고 있는 시간적 공간을 사랑하고, 거기서 만난 인연과 함께 서로에 감사해야 한다. 못난이들은 그 만남의 인연을 악연으로 만든다. 악연은 서로의 인생을 패배로 몰고 간다. 몇 개월 전, 젊은 날 과장 때 모셨던 부장한테 만나자는 전갈이 왔다. 팔순의 부장님은 스마트폰에 나를 동영상으로 촬영하면서, “나, 이렇게 좋은 인연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어” 하신다.
식사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나는 손수건을 꺼내 눈을 자꾸 닦아내고 있었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212호 (2017년 4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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