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광모 전 청와대 중화학 기획단 부단장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운동 막판에 당시 노무현 후보가 행정수도를 충청도로 옮기겠다는 공약을 내 놓음으로써 선거전의 큰 이슈가 되어 이회창 후보를 물리치고 노무현 후보를 당선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요인이 되었다.

노 후보는 선거유세에서 “내가 대통령으로 당선이 되면 신 행정수도 건설위원회를 만들어 1년 내에 입지선정을 끝내고 2~3년 내에 1,500만평의 부지에 수용인구 50만 명의 도시를 건설하겠다”고 했다. 노 후보는 기획단에 근무하던 전문가의 자문을 얻어 행정수도 이전계획 수립안을 만들어낸 반면 이회창 후보는 당선을 믿고 준비하나 없었던 관계로 “행정수도 이전은 서울의 공동화를 가져오므로 반대한다”고만 말하다가 절대우세의 선거전에서 패하고 말았다. 행정수도 이전이 결정적으로 작용하여 대통령이 된 노무현 대통령은 이 공약을 빌공짜 공약으로 만들어 버리고 다음 정권으로 넘기고 말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임시 행정수도 건설계획

70년대의 행정수도 건설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의 구상이었다. 1977년 1월 초 서울시청 초도순시에서 “서울의 인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서울에서 1시간 내외 정도의 거리에 행정수도를 건설하는 도리밖에 없다”고 행정수도 이전의 필요성을 피력함으로써 공식화 되었다. 정부는 이를 계기로 무임소 장관실에서 담당하다가 업무가 중요하고 방대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긴다는 목적으로 청와대 경제2(오원철 수석)비서실에서 담당케 하고 신규기구를 설치하기 보다는 이미 설치된 중화학공업추진 기획단 내에 행정수도 팀을 만들어 추진키로 결정했다. 기획단에서 밝힌 행정수도 건설계획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대전제
행정수도 이전은 통일 될 때까지의 임시 행정수도 이전 계획이므로 서울은 통일 후의 수도로는 계속 유지한다. 따라서 행정부만 1차로 임시로 이전하고 추후 필요 시 입법부도 이전하며 사법부는 통일 후의 수도 서울을 감안하여 서울에 존치 시킨다. 브라질의 브라질리아나 오스트레일리아의 캔버라로의 수도 이전 개념과 다르다.

이전 이유
① 서울의 국부(國富)편중화와 인구과밀화 해소
② 임시수도를 국토의 중심부로 이전함으로써 전 국토의 균형적인 발전도모
③ 서울의 방위 취약점 제거

이상 세 가지 요인중 절대적 이유는 방위상 취약점인 안보문제였다.
1천만 명 이상의 인구가 활동하고 있는 수도서울이 휴전선에서 약 40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북의 야포와 중단거리 미사일에 의하여 선제공격을 받으면 당할 도리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수도가 북쪽의 평양과 같이 약 70km 정도는 떨어져 있어야지 남한은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다는 북의 오판을 막을 수 있으며 공격을 해오더라도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것이었다. 만약 안보문제가 없었더라면 행정수도를 이전해야 할 명분이 있었을까 할 만큼 국가 안보문제가 결정적 동기였다.

기본계획
첫째, 행정수도 건설은 국방력 증강과 경제건설과 같은 국가 중요사업에 지장이 없도록 한다.
둘째, 새 임시수도는 인구 50만 명~100만 명의 규모로 하되 서울에서 고속도로나 전철로 1- 2시간 내에 통달되는 거리에 둔다.
셋째, 서울은 경제, 문화, 역사, 관광 등의 중심지로 계속 가꾸어 나간다.

기획단에서 수립한 계획은 1977년부터 1978년 까지 기본 백지계획을 완성하고 1979년부터 후보지를 선정하여 도시설계 기본계획에 들어가 1982년부터 건설을 시작하는 것으로 하였으며 이전은 5개년 계획을 만들어 추진하는 것으로 하였다. 행정수도의 위치는 국토의 중심선을 고려하여 후보지 대상지역은 천원. 진천. 중원. 공주. 대평(장기). 부강. 보은. 논산, 옥천, 금산의 10개 지역 중 에서 천원, 장기, 논산의 3개 지역으로 압축하였으며 최종 후보지 결정은 남겨 두였다. 전술한 바와 같이 행정수도 백지계획은 1978년 말로 완료하였고 1979년에는 입지선정 확정단계에 있었으며 도시기본 계획은 완료하였고 도시기본설계와 일부 세부설계에 들어갔다. 그러나 1979년 10월 박 대통령의 서거로 행정수도 건설계획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갔다.

행정수도와 국토 재편성 구상

행정수도가 국토의 중심부로 이전하게 되면 전 국토는 신수도의 350km 반경권 내로 들어가게 되므로 국토의 재편성이 불가피하게 요구되었다. 수도와 전국과의 통달 소요시간도 서울에서의 6시간에 비하여 약 4시간이 되어 1/3이 단축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따라서 행정수도가 국토의 중심이 되어 전국 국토개발을 광역 설정하도록 하여 전국이 사통팔달하는 국토 공간을 형성시킴이 필요하였다. 국토의 동선 수송체계에 있어서 행정수도의 각 권역과 산업기지를 연결하되 환상선과 방사선으로 하여 전국을 반일 생활권화 하도록 하였다. 이리하여 4개의 환상선과 8개의 방사선을 만드는 것이 기본 구상이었다. (하기 국토간선 개념도 참조)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오원철 수석이 대통령 서재에 있는 탁자 위에 푸른 표지의 두 권의 책자 즉 “행정 수도건설을 위한 백지 계획”과 “2000년대의 국토구상”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걸 발견하고 그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에 머리가 숙연해지더라는 인터뷰 기사가 실감이 난다.

세종시 건설에 대한 공과

행정수도 이전계획은 박정희 대통령의 구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기는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시작으로 3대에 걸쳐 대선 공약으로 채택된 이래 박근혜 정권에 의하여 2012년 9월부터 국무총리 비서실을 필두로 행정부처와 관련기관들이 이전되기 시작하여 오늘의 세종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총면적 464.90km2 의 토지이용계획에 의하여 인구 50만 명을 수용하는 도시로 설계된 세종시에는 2017년 1월말 현재 40개의 중앙행정기관과 15개 정부출연 기관이 이전 완료 하였으며 지방행정기관과 기타 공공단체 등이 입주(상주인구 25만)하여 대한민국의 행정 중심도시의 모습을 갖추어 나가고 있다. (하기 입주현황통계표 참조)
행정수도로서의 세종시 건설에 대하여는 정부 행정기구가 서울과 세종시로 양분되어 있으므로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분야가 많은 것만은 틀림없다. 70년대 행정수도 건설계획을 세울 당시에도 가장 우려했던 것이 서울과 행정수도와의 소통문제였다. 그 때에도 이전을 단계별로 하도록 계획하였으므로 일정기간 수도가 분할되기 마련이었다. 소통(疏通)문제로 제기 된 것은 거리(距離)상의 소통과 대면(對面) 소통이었다. 거리상의 소통은 서울과 행정수도 간에 1시간 내의 직통 철도건설로 해결한다고 했다. 만나서 해결하여야 할 대면소통 즉 회의나 대화와 토론 등은 제도개선과 통신시설 확충으로 해결한다고 했다. 모든 부서가 완전 이전 할 때 까지는 불편을 감내할 도리밖에 없다는 판단이었다. 특히 국회와 행정부간의 관계에서 문제가 가장 많을 것으로 예측했다. 이 문제가 세종시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현재 세종시와 서울간의 교통문제는 KTX와 버스로 충당하고 있지만 역시 직통 철도를 건설하는 게 바람직하다. 가장 시급한 것은 회의나 면담 또는 세미나 등을 쉽게 할 수 없는 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전문가를 동원하여 방법을 강구하여야 한다. 행정수도로서의 세종시 건설은 거의 완성 단계에 와 있다.
그러나 서울에 존치되어 있는 나머지 중앙행정부서가 이전되지 않는 이상 완성했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당분간은 대한민국에는 행정수도가 두 개 있는 기형적인 형태로 존재하게 된다.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세종시를 하나의 행정수도로의 모습을 하루속히 갖추도록 하여야 한다. 남의 탓이라고 불평불만 할 것이 아니고 부족하고 불편한 것은 수정 보완해 나가야 한다. 세종시 건설의 공과는 지금 당장 판단할 것이 아니고 후세에 가서 10년 후 아니 50년 후 아니 100년 후에 저절로 나타날 것으로 본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