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악마는 프리다를 입는다' 스틸컷.

[이코노미톡뉴스=박미정 칼럼] 미국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하는 여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다는 걸 실감나게 보여준다.
어디서 살거나 자기가 처한 상황이 제일 괴롭고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영화는 ‘이래도 그런 소릴 할래’라고 외치는 것 같다.
영화의 주요 무대는 세계 문화의 1번지라는 뉴욕, 세계의 패션을 좌지우지하는 최고 일류 패션잡지사다. 취직이 안 되기는 서울보다 뉴욕이 한 수 위여서 미국에서는 좀 변두리랄 수 있는 일리노이 주의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이름깨나 날리던 앤드리아 삭스는 ‘청운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상경’해 수십 군데에 이력서를 내밀었지만 아무래도 ‘취업난 시대’에 ‘지방대 출신’이라는 악재가 겹쳐선지 번번이 고배를 마신다. 우리도 소위 ‘지방대’출신은 요새도 완전 찬밥대우라는 걸 감안해보면 그리 낯선 장면도 아니다.
‘글쓰는 기자’가 되고 싶었지만 앤드리아를 받아준 곳은 ‘런웨이(RUNWAY)’라는 패션잡지사 편집장의 ‘새끼 비서’자리였다. 그나마 그 ‘자리’도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줄서서 기다린다니 한국의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저리가랄 정도로 미국의 20대 여성들도 ‘바늘구멍 취업난’에 고통을 겪고 있는 듯 하다. 취업난은 이미 전 세계적 현상이 된 것 같다.
유행지난 헐렁한 스웨터에 두꺼운 모직 스커트, 뭉툭한 구두를 신고 면접 보러 온 ‘시골뜨기 아가씨’는 눈치도 없게 ‘패션계의 전설’로 불리는 그 잡지편집장이 자신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냐는 시시한 질문에 그냥 ‘No!’라고 답해 점수를 깎이고 만다.
하다못해 이 잡지를 아느냐라는 물음에도 다른 데서 안 받아줘서 여기까지 온 거라고 너무나 정직한 답변을 한다. 아무튼 면접점수는 거의 ‘빵점’에 가까웠는데 무슨 곡절인지 앤드리아는 면접 다음날부터 출근을 하게 된다. 나중에 왜 그녀를 뽑았는지를 ‘마녀 보스’가 독백형식으로 말한다.
출근 첫날부터 그녀는 ‘직속상관’인 수석비서로부터 호된 꾸지람을 듣는다. 그녀는 수시로 “니가 잘못하면 나까지 짤린단 말이야”라면서 그냥 말로 해 도 될 얘기도 윽박지르고 ‘시골에서 왔다’고 눈을 내리깔고 상대한다. 워낙 눈치 없는 아가씨였던 앤드리아는 ‘패션계의 마녀’ ‘패션계의 살아있는 전설’ ‘일중독자’ 등으로 그 바닥에서 명성과 악명이 자자한 편집장 미란다 프리슬리의 온갖 궂은일을 수발하는 말하자면 ‘시다바리’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지내게 된 것이다.
커피광인 편집장의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스타벅스 커피가 행여 식을세라 그걸 들고 그, 사람 많은 뉴욕 거리를 정신없이 질주하는 앤드리아를 보면 ‘뉴욕이 서울보다 무섭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된다. 서울에서야 아무리 ‘못된 상관’이라도 메릴 스트립처럼 그렇게 내놓고 ‘유세떨지는’ 않을 것이다. 과년한 딸이 뉴욕에서 직장생활하는 걸 보러 시골서 올라온 아버지는 폭우로 비행기가 전부 결항된 상황인데도 비행기표를 구해오라는 ‘상관의 명령’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딸을 보면서 한없이 가슴아파한다. 미국아버지나 한국아버지나 그 심경은 똑 같나보다.
여황제 부럽지 않게 떵떵거리며 권력을 행사하는 편집장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의 연기가 어찌나 현란한지 ‘오 메릴 스트립!’이 저절로 나온다. 이 여배우는 젊을 때부터 예쁜 것하고는 좀 거리가 있는 외모였지만 그런 ‘외부조건’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오로지 ‘연기’로 승부해온 실력 있는 배우다. 그녀의 출연 작품 중 기억에 가장 남는 건 아주 오래 전, ‘소피의 선택’이라는 영화다.
눈물 나게 섬세한 연기를 보여준 그녀는 이 영화로 아카데미 주연여우상을 받았다. 그 이후 그녀가 나오는 영화는 거의 빼 놓지 않고 봐왔다. 우리로 치면 ‘안성기’같다고나 할까.
이번 영화에서도 어찌나 연기가 탁월한지 세월 앞에 처참해진 목주름 따위도 그녀를 초라하게 만들지는 못한 것 같다. 어쩌면 그런 그녀의 존재자체가 미국영화의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누군가가 그녀를 두고 ‘미국의 보물 여배우’라고 칭송한게 허언이 아닌 듯하다.
이 영화에서 ‘못된’ 상사의 비서로 살아 남기위해 혼신의 힘을 다 바치는 앤 해서웨이의 연기도 신인치고 괜찮아 보였다. 왠지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나 흐름이 미국 인기 드라마였던 ‘섹스 앤 더 시티’와 비슷하다. 나중에 보니까 바로 그 드라마의 감독이 바로 이 영화의 감독이었다. 글에도 그 사람 고유의 ‘문체’가 있듯이 영화에도 감독의 ‘스타일’이 있나보다.
패션의 ‘F’자도 몰랐던 앤드리아가 패션잡지사에 다니면서 ‘명품’으로 휘감은 ‘패션 레이디’로 변신하는 과정은 마치 ‘마이 페어 레이디’같은 분위기도 느낄 수 있다. 확실히 ‘노는 물’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걸 보여준다는 얘기다. 뭉툭한 굽의 볼품없는 구두 대신 지미 추의 하이힐을 신으면서 그녀는 ‘영혼을 팔아버렸다’라는 비난도 듣는다. 하이힐의 세계! 로 진입한다는 건 멋쟁이가 되는 것과 더불어 사치스런 여인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최고의 장면’으로 편집장(메릴 스트립)이 앤드리아에게 자신의 딸들이 보고 싶어 한다면서 해리포터의 미출판본을 입수하라는 도저히 명령 같지 않은 명령을 내리는 장면을 꼽고 싶다. 그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보면 ‘뉴욕에서 비서로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렵다는 걸 알 것도 같다. 좀 과장된 만화 같으면서도 그 정도로 뉴욕 직장의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하다는 걸 말해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한국에서도 이와 비슷한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는 상관들도 많겠지만 말이다.
미국에선 ‘핑크 레터’에 샐러리맨들이 부들부들 떤다는 소릴 들은 적이 있다. 해고장을 분홍 봉투에 넣어 보내는 것에서 유래되었다. 요샌 뭐 ‘전화 한통’ 아니면 ‘문자 메시지’로 해고를 ‘전격 통보’한다니 정말 샐러리맨들은 미국이나 한국이나 ‘파리만 못한’ 목숨들 같다. 영화를 다 보고나니까 이상하게 전혀 비교할 수 없는 ‘상이한’ 종류인데도 한국영화 ‘라디오 스타’를 두 번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세계 최고의 명품 브랜드가 총집합한 ‘패션 영화’지만 한 꺼풀 벗기고 보면 ‘일에 목숨 거는 사람 사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런 감상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 朴美靜 편집위원(박미정 스카이뷰커뮤니케이션즈 대표)

그 놈의 ‘일’이 뭔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력투구’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니 우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게끔 운명 지어진 존재들인지도 모른다는 비감스러운 기분마저 든다. 그래도 그 ‘일’이 없다면 우린 살아가기 힘들기에 일이란 어쩌면 바로 ‘운명’인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우리에게 ‘일’이라는 건 살아있다는 것의 한 ‘증명’이기도 할 것이다. 이 영화에선 ‘일’로 자칫 어그러질 수 있는 ‘인간관계’의 위기도 보여준다. 앤드리아가 상관에게 실컷 닦달당하고 간신히 퇴근해 들어간 집에서 남자친구는 자신의 생일을 함께 해주지 않았다고 뿌르퉁해 한다. 그 장면에서 하마터면 그 남친을 향해 소리를 지를 뻔 했다. “이 녀석아 지금 생일이 문제냐! 응? 남은 죽기 살기로 전쟁터 같은 일터에서 살아남느라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붓고 왔는데 따스하게 안아주진 못하고, 지금 니 생일이 문제야!” 일하는 여성들의 현실에선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을 것이다. 카리스마 넘치는 여황제 편집장도 결국 ‘일’ 때문에 두 번째 이혼당하고 망연자실한다. 그게 아마 ‘여자’여서 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요즘같이 경기 어렵고 살기 힘든 세상에 이 영화는 여러 가지를 말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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