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미톡뉴스=왕진오 기자]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 성벽서 제물로 추정되는 인골 2구가 발견됐다.
또한 '소그드인'(중앙아시아 소그디아나를 근거지로 하는 현재 이란계 주민)으로 추정되는 터번을 쓴 토우가 나오고 병오년(丙午年) 간지가 정확하게 적힌 목간이 발굴된 것으로 확인됐다.
월성 성벽은 훍으로 만든 토성(土城)이며, 성질이 다른 흙을 서로 번갈아 가면서 쌓아올리는 성토(盛土) 기술로 축조했다. 성벽 최상부에는 사람 머리 크기 만한 돌이 4~5단 가량 무질서하게 깔려 있었다. 이는 흙이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을 막기 위한 기능으로 보이며, 월성의 특징 중 하나이다.
월성 서쪽에 있는 서성벽을 조사한 결과, 축조연대는 5세기 전후로 판단되며, 국내에서 최초로 성벽을 쌓는 과정에서 사람을 제물로 사용한 제의의 흔적이 확인됐다.
인골은 성벽을 본격적으로 쌓기 직전인 기초층에서 두 구가 출토됐다. 한 구는 정면으로 똑바로 누워 있고, 다른 한 구는 반대편 인골을 바라보게끔 얼굴과 한쪽 팔이 약간 돌려져 있다. 두 구 모두 얼굴 주변에 수피(樹皮, 나무껍질)가 부분적으로 확인됐다.
한편, 월성 북쪽 면에 길게 늘어서 있는 해자의 경우 2015년 12월부터 지금까지 내부 정밀보완조사가 진행되어왔는데, 조사 결과 해자가 약 500년 동안 수혈해자에서 석축해자로의 변화를 거치며 지속해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수혈해자는 월성 성벽을 둘러싼 최초의 해자로서, 성벽 북쪽에 바닥층을 U자 모양으로 파서 만들었으며, 해자 가장자리가 유실되거나 이물질을 막기 위한 판자벽을 세웠다.
석축해자는 수혈해자 상층에 석재를 쌓아올려 조성하였으며, 독립된 각각의 해자는 입·출수구로 연결되어 있다.
해자는 시간이 가면서 다시 쌓거나 보강하면서 폭이 좁아졌으며, 내부 토층별 출토 유물을 분류해본 결과 수혈해자는 5~7세기, 석축해자는 8세기 이후 사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해자에서 출토된 흙으로 형상을 빚은 토우(土偶)들이 여럿 출토됐는데, 모양은 사람과 동물, 말 탄 사람 등 다양하지만, 이중 터번을 쓴 토우가 나와 주목할 만하다.
이번 터번 토우는 눈이 깊고, 끝자락이 오른쪽 팔뚝까지 내려오는 터번을 머리에 두르고 있다. 팔 부분이 소매가 좁은 카프탄을 입고 있으며 허리가 꼭 맞아 신체 윤곽선이 드러나고 무릎을 살짝 덮은 모양이다.
당(唐)나라 시대에 호복(胡服)이라고 불리던 소그드인 옷과 모양이 유사하여 페르시아 복식의 영향을 받은 소그드인으로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6세기 토우로써 추정되기 때문에 현재까지 출토된 소그드인 추정 토우 중 가장 이른 시기로 판단된다.
또한 월성 해자에서 목가돈 총 7점이 출토됐다. ‘병오년(丙午年)’이라고 적힌 목간은 월성해자 출토 목간 중 정확한 연대가 최초로 확인된 것이다.
병오년은 60년 만에 한 번씩 돌아오기 때문에 법흥왕13년(526년)이나 진평왕8년(586년)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월성의 사용 시기를 확정할 수 있을 뿐 아니라, 6세기 신라의 활발한 문자활동도 증명해준다.
한편,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이종훈)는 2015년 3월부터 진행 중인 경주 월성 정밀발굴조사의 중간 조사결과를 16일 월성 발굴현장에서 공개한다.
경주 월성 조사구역은 총면적 22만 2천㎡규모로 편의상 A, B, C, D 등 총 네 지구로 나뉘어 있다.
A지구(월성 서편지구)는 2015년 6월 발굴조사가 시작된 곳인데, 이곳의 발굴조사를 통해서는 서쪽에 있는 성벽이 5세기에 처음으로 축조됐고, 6세기에 최종적으로 보수됐던 사실을 확인했으며, 문이 있던 자리는 이미 유실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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