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일기씨, 6.25직전 남파 종횡무진
창녕 성씨 4대 독자로 혈맥계승

▲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의 오빠 성일기 씨.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김정남이 그의 이복동생 김정은에 의해 암살된 후 김씨 왕조의 인간학살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나온다. 김정남의 생모 성혜림의 오빠 성일기의 빨치산 인생도 다시 한 번 끄집어내어진다. 그는 김정일의 처남이지만 빨치산 활동 후 체포, 전향으로 서울에서 은둔의 삶을 사느라 그와 얼굴을 맞댄 적이 전혀 없었다.

신출귀몰 ‘산사람’의 80 노후 삶

성일기의 빨치산 인생은 그와 친구사이인 정원석(鄭源石)의 장편소설 ‘북위38도선’(2006.9, ㈜교학사)에 잘 소개되어 있다. 경제풍월은 2012년 8월 무더운 날씨에 북위38도선 스토리를 대강 듣고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 있는 성씨의 자택을 방문, 인터뷰했다.
당시 여든의 성일기 씨는 부인 장영호 여사와 단 둘이 살면서 옛 만석꾼 4대 독자의 귀골인상은 전혀 풍기지 않았다. 무시무시한 빨치산 인상이나 신출귀몰했다는 ‘산사람’ 풍모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독서광에다 천재성으로 동서남북을 종횡무진 하는 박식다식으로 빨치산 유격대 활동에서도 이름을 날렸다지만 그 세월도 이미 다 지나갔다는 느낌이다.
그 대신 당뇨와 혈압에 시달린다고 했다. 왕년의 거칠 것이 없던 산사람이 “내가 한 시절 힘이 장사였소이다”라고 했지만 당뇨와 혈압 앞에는 맥을 못 추겠다는 인상이다. 다만 왕년의 기품과 목청은 얼마큼 그대로 살아 있었다.
부인 장영호 여사는 세브란스병원 의사의 딸로 성씨와 만나 결혼했지만 산사람이었는지는 모르고 그냥 ‘잘 생긴 남자’, ‘머리가 좋은 남자’로만 알고 결혼하여 “살아보니 살만했다”고 말하니 금슬이 좋은 사이인 모양이다.

▲ 경제풍월 2012년 9월호 성일기씨 기사지면.

김일성은 흉악 마적떼, 김창룡은 은인

성일기 씨는 창녕 성씨 일가가 김일성에게 몽땅 충성한 후 온전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혈통이다. 그가 대한민국에 체포되고 방면됐기에 생존하여 가문의 혈통을 계승할 수 있었다고 믿어진다. 그의 부모는 평양에서 죽다가 살아나 잠시 영화도 누렸지만 자신들의 목숨을 겨우 지켰을 뿐 자녀들의 운명에 관해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었다.
막내딸 성혜림은 김정일의 부인이 되어 온 집안을 살려내기도 했지만 모스크바에서 외롭게 객사하여 이름 없는 공동묘지에 묻혔다. 그의 언니 성혜랑은 아들 이한영이 서울 망명했다가 암살되고 딸은 런던으로 도피하여 숨어 살고 자신은 미국에 망명하여 혼자 살고 있다. 이에 비하면 성일기는 빨치산 참모장으로 대한민국에 대한 중대 반역활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아 조용히 활동하며 오늘에 이르니 마지막 단계에 나마 대한민국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성일기 씨는 2012년 8월 인터뷰 때 “이제사 부모와 형제와 함께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 바친 집안에서 보니 나만 못한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게 사는 곳이 대한민국이다”라고 말하고 “김일성은 흉악강도이자 마적떼나 다름없다”고 규정했다.
또 그의 입에서는 박헌영, 이주하, 김삼룡, 이강국, 이현상 등 남로당 핵심들의 이름과 그들의 행동이 줄줄이 나오고 6.25 당시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朴甲東) 씨도 너무나 잘 안다고 말했다.
뜻밖에도 성일기 씨는 빨갱이 타도 두목인 김창룡(金昌龍) 장군을 은인이라 부르고 반공검사 오제도를 ‘매우 고마운 분’으로 호칭했다. 왜 그랬을까는 그가 빨치산 유격대 활동 막바지에 체포되어 자수라는 명목으로 석방되어 새로운 인생을 살게 뒷받침해 줬기 때문일 것으로 보인다.

4대독자 살리고자 유격대사령관 숨겨

▲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

성일기의 부친 성유경(成有慶)은 이미 14세 때 종중이 앞장서서 조혼했기에 후처 소생은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신여성 김원주를 만나 도쿄로 가서 첫 아들 성일기를 낳으니 종중에서 “손이 귀한 집안에 후사를 이었다”는 명분으로 중혼을 허락하여 만석꾼 4대 종손 지위를 확보한 것이다.
성일기가 경성사범 부속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자가용 인력거를 타고 다녔지만 어머니 김원주가 늘 동반했다고 한다. 또 방학 때면 창녕 큰아버님 댁에 내려가면 창녕 성씨가 황태자 행세를 할 수 있었다. 이때 큰아버지는 동생 성유경의 빨갱이 사상을 비난하고 남로당을 위해 재물을 탕진하고 있다고 마구 욕했다고 성일기 씨가 증언한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경쟁에서 지기를 싫어하던 김원주는 장남 성일기의 모스크바 유학을 위해 일찍 평양으로 불러올렸다. 그러나 “월북 청년들은 먼저 빨치산 복무 경력을 쌓아야 한다”는 노동당의 방침으로 빨치산 훈련을 받고 남파됐다. 성일기는 본명 대신에 ‘차진철’이란 가명으로 회령에 있는 제3군관학교 과정을 거쳐 용맹한 빨치산으로 맹활약했다.
그가 속한 동해남부 유격대 남도부(南道富) 사령관은 함양군 병목면 지리산 자락 출신으로 본명은 ‘하진수’로 300석 토호족의 아들이다. 진주고보를 나와 일본 중앙대 재학 중 학병지원을 강요하자 지리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됐다. 6.25 전 1947년에는 조직을 동원하여 함양경찰서를 습격하고 1948년에는 해주 인민대표자회의에 경상도 대표로 참석했으며 강동정치학원을 거쳐 유격대 지휘관이 된 것이다.
동해남부 유격대는 경주, 울산, 양산 등을 종횡무진으로 누비며 군경을 습격하고 민심을 교란시키기도 했지만 1953년 휴전 무렵부터 얼마 남지 않은 잔존부대의 진로를 두고 고민했다. 어느 날 남도부 사령관이 성일기 참모장에게 “북상하기도 어렵고 일본으로 밀항해야 할 판국이니 고향 창녕 가서 은신처나 찾아보라”고 지시했다.
성일기가 경호원을 데리고 창녕에 잠입하여 큰아버지한테 고백했더니 뜻밖에 집안의 4대 독자를 살리려는 욕심으로 호의적이었다. 유격대 사령관 남도부를 나뭇가지를 자르는 정원사로 위장하여 숨겨주기도 했다. 어느 날 창녕경찰서장이 부임 인사차 방문했을 때도 남도부가 정원사로 두 사람의 인사말을 엿듣기도 했으니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얼마 뒤 그의 큰아버지는 “이제 너도 자수해라”고 지시하여 1953년 12월 육군 특무대에 체포되어 빨치산 인생을 마감했다. 이때 부대장 김창룡 장군이 생포를 ‘자수’로 변경하여 서류상 재판절차만으로 풀어주었으니 괴이한 일이었다. 당시 대구에서 겨우 3개월의 영창 생활 후 성일기에게 야간 통행증을 발급해 주면서 “상기자에 관한 문의사항이 있으면 1928부대장(김창룡)에게 문의할 것”이라고 명시했으니 특무부대장이 그의 신변을 보호해준 꼴이다.
짐작하기로는 창녕 성씨 만석꾼 집안과 일제 및 해방공간에 이르기까지 좌우익에 걸쳐 2중 3중으로 얽힌 인연 등이 복합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성일기 큰아버지는 기회 있을 때마다 4대 독자를 살려달라고 부탁했으니 믿는 구석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성일기 씨는 사령관 남도부를 살려달라고 부탁했고 남도부는 “성일기만은 살려 달라”고 읍소했다. 그러나 남도부는 유격대 사령관 죄목으로 37세의 젊은 나이로 처형되면서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동해남부 유격대 문서 50년만에 발굴

자유의 몸이 된 성일기 씨는 1954년 단국대 영문과, 1956년 성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선대와 남겨 놓은 고향과 서울 등지의 부동산을 찾아 매각하며 비통한 세월을 보냈다. 빨갱이를 그토록 싫어하던 큰아버지 댁에 얹혀살기도 했다.
그 뒤 2001년 10월 21일에는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사학자들이 모여 창녕 성씨댁 행랑채 가까이 땅 속에 묻어둔 6.25 빨치산 자료들을 발굴 공개하기에 이르렀다. 빨치산 자료들은 맥주병을 비닐로 싸고 다시 군용 판초우의를 씌워 묻어두어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전혀 손상되지 않은 채 말짱했다.
‘동해남부 유격대 문서’는 연필로 기록했기에 습기가 찼었지만 읽을 수 있었던 것이다. 산중에서 발행한 빨치산 기관지 ‘붉은 별’ 3부, 남도부 사령관의 노트, 유격대 증명서, ‘친애하는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성일기 씨의 ‘북위38도선’은 실로 남북에 걸친 파란만장과 우여곡절이고 삶과 죽음의 계곡이자 민족의 비극이라고 해야만 한다. 성일기 씨는 선대와 함께 빨갱이 사상으로 김씨 왕조에 모든 것을 다 바쳐 충성한 후 대한민국으로 전향하여 온전하게 살아남은 유일한 존재로 이를 증언할 수 있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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