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의 아내, 대통령 부인의 남편사랑
5공 비난해일 속 ‘그분의 진실 초상화’

▲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李順子) 여사의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 부인 이순자(李順子) 여사의 자서전 ‘당신은 외롭지 않다’는 남편에게 바치는 무한한 사랑 이야기다. 저자는 ‘군인의 아내’로 출발하여 ‘대통령 영부인’으로 최고의 위엄을 보이기도 했지만 5.18이란 역사적 악업(惡業)의 운명에 시달린 남편을 지켜본 확신으로 ‘그분(전두환)의 진실된 초상화’를 ‘당신은 외롭지 않다’는 제목으로 발간한 것이다.

군인의 아내, 대통령 영부인의 청천벽력 추락

이순자 씨는 1939년 3월 24일, 만주 길림성에서 태어나 대한민국 장군의 딸로 자라면서 경기여중, 경기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의과대학 재학 중에 육사생도 전두환을 만나 결혼했다.
직업군인의 아내는 초급, 중급장교 시절까지 전후방 임지 따라 이사 다니면서 늘 비상(非常)훈련에 쫓기는 남편을 기다리는 박봉의 살림이었다. 이순자 씨도 남편의 보직이동, 해외연수, 월남전 참전 등으로 오랫동안 기다리는 생활의 연속이었지만 그 뒤 사단장과 사령관으로 승진한 뒤에는 ‘장군의 아내’로 가는 곳마다 환대를 누렸다. 이어 ‘10.26 국변’ 이후에는 팔자에도 없는 ‘대통령 부인’이 되어 하늘처럼 추앙받는 최고지위에서 추락하여 가혹한 시련도 겪었다.
자서전은 저자가 가슴으로 꾹꾹 눌러 쓴 원고지 2만여 매를 줄이고 압축하여 716페이지로 엮어 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분과의 동행 58년’의 영광과 환희보다 ‘우울하고 어두운 이야기’가 더 많은 분량을 차지한 느낌이다.
전두환 장군이 신군부의 실력자로 부상한 운명의 ‘1980년 그때의 회고’는 대학광장에 불타고 있는 남편의 허수아비로부터 이야기한다. 이어 대통령에 취임하자 친인척들의 말썽으로 ‘대통령 가족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생각했고, 대한민국 최고 인재들이 무더기로 희생된 ‘아웅산에서 있었던 일’을 잊을 수 없고 6.29 선언 이후에는 전 대통령의 ‘친구 노태우’의 취임과 ‘예정된 행복한 작별’에 이어 ‘백담사 유폐’로 청천벽력을 맞는다.
직선제 ‘6.29 선언’은 친구 노태우의 당선을 위한 ‘전두환의 작전’이었지만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 개막식에는 올림픽을 유치했던 직전 대통령으로 초청을 받지 못해 TV 중계로만 지켜봤다. 화려한 서울올림픽 개막식은 사라만치 올림픽위원장, 박세직 조직위원장 등의 주연에 노태우 대통령의 개막 선언으로 진행되어 역대 어느 올림픽보다 성공적이었다는 찬사를 받았다.

퇴임 9개월만에 백담사 유폐의 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약속대로 단임을 실천하고 청와대를 물러 나왔지만 9개월만인 1988년 11월 23일, 연희동 자택에서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낭독한 뒤 백담사 유폐길에 올랐다. 당시 언론과 야당의 줄기찬 공세 속에 노태우 대통령이 ‘당분간’ 은둔 조건으로 결단했노라고 했다.
당시 TV 화면에 비친 전직 대통령 부부의 얼굴은 창백했다. 만감이 교차하는 유배길이 38선 표지판을 지나고도 깊은 계곡으로 달려 통나무로 엮은 외나무다리를 건너서야 백담사가 나타났다. 전 대통령 부부를 맞은 요사채는 2평 남짓한 골방으로 한동안 사람이 살지 않아 내설악에서 내려치는 찬바람과 외풍에 노출되어 있었다.
급히 군불을 지피자 매캐한 연기가 사방으로 피어올라 방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전 대통령이 앞서고 이 여사가 뒤따라 잠시 밖으로 나오자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 방한복을 입은 기자들이 몰려 있다가 카메라 플래쉬를 터뜨렸다. 아마도 전 대통령 부부의 표정이 어색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이튿날 조간신문 1면에 ‘웃고 있는 전 대통령 부부’라는 컷으로 조롱하듯 보도됐다.
첫날, 산사의 캄캄절벽 밤은 풍경소리만 들렸지만 저자의 가슴 속은 마치 검정 숯덩이나 다름없었다. ‘5공 청산’, ‘친인척 구속’, ‘전 재산 헌납’ 등 온갖 정치적 구호에다 ‘해외망명이냐 은둔이냐’는 소문마저 귓전에서 사라지지 않아 마음을 진정시키고 잠을 청한다는 것은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새벽기도 목탁, 염불에도 울분·분노 뿐

▲ 백담사에서 새벽예불을 드리는 전두환 이순자 부부. 백담사에서의 생활여건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서울에 두고 온 고3 아들 걱정이었다.

산사 유폐생활의 하이라이트는 새벽 예불이다. 새벽 3시, 대얏물에 수건을 적셔 몸을 닦고 법당으로 가면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든다. 목탁소리, 염불소리가 새벽을 깨우지만 유폐자의 속은 만가지 상념에 쫓겨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낙심과 울분, 배신감과 고독감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청와대 생활 7년 반 동안, 나라와 국민을 위해 다 바치고 친구 노태우의 당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았는가. 생각할수록 속이 뒤범벅이고 마음은 쓰러진 고목신세다. 무엇보다 “그분(남편)이 말을 잃어간다. 돌처럼, 화석처럼 말이 없다. 저러다가 폐인이 되지나 않을까…”
저자는 도무지 낙심과 분노를 이기지 못하다가 어느 날 “스스로 파멸되지 않으려면 달라져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기에 이르렀다고 고백한다. 스님들께서도 줄기차게 권고했다. “반야심경, 천수경을 읽고 쓰고 암송하시라, 뜻은 몰라도 무조건 외우고 쓰면 ‘마음의 불’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했다.
저자도 부처님께 매달려 보는 수밖에 길이 없다고 생각되어 몸부림을 쳤다. 그렇지만 분노의 파도는 쉽게 가라 않기를 거부하고 말았다.
나중에 만해당(萬海堂)이라고 헌액된 백담사 골방의 유폐 속에 새벽예불이 한 달을 지나 ‘죽음의 강’과도 같은 분노의 늪을 건너 새해를 맞게 됐다. 새해를 맞고서도 당장 달라질 것이라곤 없었다. 정녕 파멸로 끝장을 보고 말 것인가.

100일 기도 70일째 신기한 기적현상

새해를 받아 넘긴 후 음력 정월 초하루를 맞아서야 ‘100일 기도’를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국태민안, 영가천도를 위한 100일 기도’라고 이름 붙였다. 저자는 “청와대 생활 내내 국태민안(國泰民安) 기원하고 친구 노태우 당선위해 헌신하고 이곳 절간으로 유폐되어 또 다시 국태민안 기도를 올려야만 하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분’(남편)의 뜻 따라 국태민안 100일 기도의 효험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5공 정부의 모든 정책이 나라와 국민을 위한 목적이었지만 국민에게 70% 이익이었다면 나머지 30% 불이익도 있었을 것이다. 해직된 공무원, 언론인, 기업도산으로 쫓겨난 기업인들, 데모 학생 등등이 5공 정책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결국 100일 기도는 지나온 악업(惡業)과의 악전고투나 다름없었다. 하루 3번 기도에는 108배(百八拜)과정이 필수로 따른다. 영하 30도의 맹추위로 다기(茶器)에 물을 부으면 금방 얼음으로 바뀐다. 이때 108배는 다리가 후들거리며 온몸을 가누기 어렵게 만든다. 그러다가 100일 기도 20여일 만에 첫 고비로 몸살과 통증이 몰려와 이를 악물고 이겨냈다.
다시 기도 50일쯤에는 육기(肉氣)를 끊었을 때 나타난다는 ‘비위병’이 찾아왔다. 채식위주의 절밥만 먹으며 일체 육기를 끊은 것이 탈이었다. 식욕이 떨어지고 빈혈, 구토, 어지러움이 겹쳐왔다. 스님들께서 “조금만 참고 지나시면…”이라고 위안을 주셨지만 통증이 너무 심해 기도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죽을 각오’로 ‘절벽기도’에 나서 70일째에 이르자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뿐해 지니 참으로 신기한 현상이었다. 이로써 온갖 번뇌로부터 자유를 찾고 평화를 얻었으니 절로 감동의 눈물이 솟고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했다.
마침내 1989년 5월 16일, 100일 기도를 끝낸 회향(回向)의 날을 맞아 스님들과 불자님들이 모두 축하해 주었다. 은둔 유폐지에서 얻은 ‘최초의 승리’였다.
그로부터 나흘 뒤 전 대통령 부부는 대청봉 등정에 나서 정상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며 또 하나의 깨달음을 얻었다. 정상에 오르고 나면 반드시 내려 가야할 길이 남아 있지 않는가. 하산길도 길목마다 어려움이 도사리고 있으니 조심조심해야 하지 않겠는가.

백담사 유폐 769일의 진기록들

백담사 유폐가 2년을 넘어 769일간 스님들의 법문과 전국 불자님들의 성원이 많았다. 방문객 버스가 10대를 넘고 20대를 기록하기도 했다. 이 틈에 백담사 살림도 다소 좋아진 느낌이다. 전 대통령 부부가 거처한 골방에도 마루 문을 달고 구들을 고치고 방충망을 설치했다.
무엇보다 전깃불이 들어왔으니 획기적이다. 경운기 엔진으로 발전을 시도해 보기도 했지만 한전 전기가 들어오니 책 읽고 글쓰기 좋고 목욕도 할 수 있으니 문명의 혜택을 다 받게 됐다. 더구나 주말에는 큰 며느리와 장손이 방문하여 혈육의 정을 나눌 수 있었다.
1989년 11월 23일은 백담사 유폐 1년째로 전국의 불자님 방문객이 8,000명을 기록하고 합창단의 ‘찬불가’도 들을 수 있었다. 이날 오후에는 교도소서 10개월을 보낸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석방되어 백담사를 방문했으니 얼마나 반가운가.
그러나 백담사 1년 1개월인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은 일주문을 지나 국회 청문회 증언을 위해 서울로 떠났다. 이보다 몇 달 앞서 김윤환(金潤煥) 민정당 원내총무가 백담사를 방문하여 노태우 정부가 여소야대 국회 대책에 속수무책이오니 국회에 출석 증언해 주도록 요청했다. 김윤환 총무는 전 대통령의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상호 신뢰관계가 깊었다.
다만 전두환 전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 사이에는 오해하고 불신하는 요인이 겹쳐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전 대통령 부부가 백담사 유폐소식을 듣고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 경영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행정학 박사코스를 준비하던 장남 전재국이 귀국을 고집했다. 이때 노 대통령 부인 김옥숙 여사가 전재국을 불러 청와대서 듣고 왔다는 내용이 너무나 황당했다.
김옥숙 여사가 전재국에게 전해 주었다는 내용이란 “전 대통령이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맡고 일해재단을 설립한 것이 모두 퇴임 후에 상왕(上王)노릇을 위한 준비였다”는 비난 여론이라는 이야기다. 또 전 대통령이 아웅산 사태를 일으킨 버마 순방을 계획한 것도 퇴임 후 “권력장악 모델을 연구하기 위한 행차였다”는 여론이 있었다는 주장이었다.
전 대통령 부부 입장에서 들으면 황당하고 악의적인 모함이다. “친구 노태우 측이 이처럼 터무니없는 소문을 전재국을 통해 유폐지로 전달한 의도가 무엇일까”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여소야대 국회에서 야당의 5공 청산 공세가 거센 사실은 알고 있지만 5, 6공 정부간에 이토록 갈등과 불신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 또한 불운이 아닐 수 없다.

꼴불견… 치욕스런 국회청문회 기록

백담사에 유폐된 전직 대통령을 불러낸 국회 청문회는 솔직히 꼴불견이었다. 운동권식 정치인의 악담과 인격모욕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겠노라는 사람을 비롯하여 국회의원이란 신분이 무소불위의 특권인양 마치 깡패 비슷한 돌출행태까지 보여줬으니 부끄럽고 치욕스런 청문회로 기록된다.
전 대통령이 국회 청문회 수모를 겪고 백담사로 돌아왔을 때 전국 불자들의 위로전화가 쇄도하고 방문객도 더욱 늘어났다고 하니 당시 민심의 일단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국회 청문회 다음해 1월 22일 노태우 정부가 김영삼, 김종필 세력과 3당 합당을 선언했으니 천지개벽식 정계개편이었다. 그러나 3당 합당 후 YS는 민자계와 자민련계를 합친 다수파를 민주계 소수파로 돌파하여 끝내 집권에 성공했다. 집권 후 YS는 ‘계엄령 선포식’ 역사 바로 세우기로 5, 6공 단절을 통해 민주계 정권 재창출을 시도한다.
5.18 특별법의 소급입법으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에 대한 정치보복성 ‘정치재판’을 연출, 끝내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를 위해 1995년 12월 1일 검찰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소환장을 발부하자 이튿날 아침 연희동 자택 골목에서 ‘YS의 역사관을 묻는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전 대통령은 성명 발표 후 국립현충원을 참배하고 고향 합천으로 내려가 선산에 참배하고 장조카 집에서 자고 있다가 12월 3일 일요일 새벽 잠옷 바람으로 연행되어 안양교도소에 수감되는 장면을 전 국민이 지켜봤다.
한마디로 ‘YS는 못 말려’의 ‘오기의 보복정치’였다. YS는 집권과정 내내 5, 6공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하며 5.18을 정쟁의 대상으로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해 왔지만 이때 정치적 입장을 바꿨던 것이다.

‘YS는 못말려’의 정치보복 불복 단식

▲ ‘당신은 외롭지 않다’ 자서전 표지에 전두환 이순자 부부 사진. 백담사 유폐 시절 전두환· 이순자 부부. 영하 20도의 혹독한 추위에서 슬픔과 고통을 감추려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자 기자들은 ‘ 반성 없이 웃고 있다’ 고 기사를 썼다.

고향 갔다가 새벽에 끌려와 수감된 전두환 전 대통령이 YS의 지나친 정치보복에 불복, 단식을 선언했다. 부인 이순자 여사는 다시 백담사로 달려가 기도했다.
단식 10일째 전 대통령의 체중 74kg이 64kg으로 줄고 탈수현상, 혈압강하, 안색변화 등이 나타났다. 전 대통령은 “아웅산 폭발사고 때 이미 죽은 목숨 아니냐, 덤으로 사는 인생이다”라는 신념이었다. 참다못해 법무부가 백담사의 도후 스님에게 요청하여 단식중단을 간청했지만 거부했다. 시각장애, 청각장애에 탈진현상이 나타났지만 하루 물 3컵 이외에는 모두 거부했다.
단식 19일째에 이르러 구급차를 불러 국립경찰 병원으로 호송되어 병원당국이 ‘혼수상태 직전’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본인은 영양제 주사도 거부하여 손을 쓸 방도가 없었다. 다시 단식 26일째를 맞아 신장의 통증이 나타나고 현기증이 발생했으며 이튿날에는 끝내 화장실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혼절’상태에서 산소호흡기로 연명할 단계에 이르러 12월 30일, 이양우 변호사가 단식중단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죽음을 각오한 단식 끝에 65세 생일을 넘긴 전 대통령은 검찰신문을 받고 재판을 받기로 했다. 정치재판 성격에서 사형과 무기징역 등 중형이 선고됐지만 전 대통령은 꿋꿋한 자세였다. 나중에 전국 종단 원로 스님 등 각계각층 300만명이 서명한 사면건의 연대탄원서가 제출되기도 했다.
그 뒤 YS는 자신의 임기 말에 두 전직 대통령을 사면으로 석방했다. 그러나 다시 정권이 바뀌면서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 까지 속칭 ‘전두환법’의 제정 및 추징금 환수라는 명목의 재산몰수형을 겪었다. YS가 서거했을 때는 언론이 조문을 하느냐, 마느냐의 관심 속에 조문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자 이순자 여사는 자서전 마지막 대목 ‘노년의 기도’에서 정권이 바뀌고 바뀐 박근혜 시절까지 스트레스와 불면증에 시달려 행여나 치매로 진입하지 않느냐 싶어 검사를 받은 적이 있다고 밝혔다. 검사결과 “걱정이 너무 많아 생긴 병”일뿐 치매현상은 아니라고 했다. 저자는 ‘그분과 동행 58년’에 “86세가 되어도 여전히 나의 신랑인 그분에게 이 책을 헌정한다”고 고백했다. 자작나무숲 간행, 716페이지, 값 2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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