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게이트에 보수계 지리멸렬

▲ 문재인 대통령과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10일 제19대 대통령 취임식을 마치고 국회 로텐더홀 계단을 나서고 있다. 문 대통령 뒤쪽으로는 왼쪽부터 추미애 민주당 대표,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 우윤근 국회 사무총장, 주호영 바른정당 원내대표 등이다. <사진=이코노미톡뉴스>.

[이코노미톡뉴스=이진곤 칼럼] 제19대 대통령 선거 결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당선했다. 득표율 41.4%, 득표 수 13,423,800표 였다. 이어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24.0%, 7,852,849표를 득표해 2위에 올랐다. 3위는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로 21.4%, 6,998,342표를 얻었다. 그 다음으로는 바른정당 유승민 후보(6.8%), 정의당 심상정 후보(6.2%), 새누리당 조원진 후보(0.1%), 무소속 김민찬 후보(0.1%), 민중연합당 김선동 후보(0.1%), 국민대통합당 장성민 후보(0.1%), 홍익당 윤홍식 후보(0.1%), 한국국민당 이경희 후보(0.0%), 늘푸른한국당 이재오 후보(0.0%), 경제애국당 오영국 후보(0.0%) 순의 득표율을 보였다.

시민혁명 이후 촛불혁명 정권교체

문 대통령의 당선은 진작 예견된 것이었다. 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은 광화문 촛불세력의 박근혜 퇴진시위가 적극화하자 이의 선두에 섰다. 문 대통령은 촛불집회 마다 참여해서 분위기를 돋우었다. 그는 작년 12월 14일 김용옥과의 인터뷰(월간중앙 특별기획)에서 ‘혁명’을 강조했다. 만약 헌재가 탄핵 기각 결정을 하면 어떻게 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 그는 “국민들의 헌법의식이 곧 헌법이다.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런 판결을 내린다면 다음은 혁명밖에는 없다”고 말했다.
이미 2002년 대선 때 당시 노무현 후보와 그의 핵심 지지 세력은 ‘혁명’의 의지로 대선에 임했다. 이들은 구시대 청산, 새로운 변화를 희구하던 젊은 층을 겨냥해 혁명전사라도 된 양 투쟁적 선거운동에 나섰다. 이들은 당시 젊은층을 중심으로 급격히 확산되던 인터넷과 휴대폰 문자서비스를 적극 활용했다. 보수정당 측에는, 이에 대한 훈련은커녕 마인드조차 형성돼 있지 않았다.
선동선전술에서도 이들은 보수세력이 흉내조차 낼 수 없는 기동성과 자극성을 자랑했다. 그 중에서도 ‘김대업 위증 사건’은 결정적 효과를 거두었다. 없는 허위사실을 흥미로운 시나리오와 그럴듯한 증언으로 포장해 퍼뜨렸다. 이로 인해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여지없이 실추했다.
이들에게 노무현 후보의 승리는 ‘시민혁명’이었다. 그리고 그 혁명은 ‘지배세력의 교체’라는 변화를 의미했고, 이는 천도(遷都)로 재확인될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03년 12월 19일 저녁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가 여의도에서 주도한 ‘리멤버 1219’ 행사에 나가 “시민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노사모가 나서달라”고 호소했다. 자신의 당선이 시민혁명의 결과였다는 전제 하에 다음해의 총선도 혁명적 방식으로 승리하게 하자는 주문이었다.
이날의 행사를 주도했던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명계남은 “탈레반은 다시 나서야 한다. 노 대통령을 믿는다면 끝까지 그의 지원군 홍위병이 돼야 한다. 나는 홍위병이다”라며 “내년 총선에 각 지역구 경선에 출마해 유권자를 설득해야 한다”고 노 당시 대통령을 거든 것으로 언론들이 보도했었다. 혁명의 성공을 위해서는 탈레반의 기질과 홍위병의 방식이 필요하다고 선동한 것이다.

노무현 투신이후 절치부심으로 결속

노사모는 노 전 대통령의 비극적 사건이 있었던 09년 5월 이후 노무현 재단을 중심으로 강하게 결속했다. 이들은 재집권을 위해 절치부심했다. 07년의 17대 대선에서는 출전권이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에게 넘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지만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세력은 아니었다. 이때의 대선 패배 후 당시 참여정부평가포럼 상임집행위원장이던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이른바 친노의 ‘폐족 선언’을 했다. 계파의 해체 선언을 하자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건 결속력 강화를 위한 위기어필이었다.
친노세력은 제18대 대선을 1년 쯤 앞둔 시점에 정치권 재진입을 본격 시도했다. 이들은 진보성향의 시민단체인사들과 함께 급조한 시민통합당을 발판으로 민주당, 한국노동조합총연맹과 함께 그해 12월 민주통합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신당의 당권을 장악했다. 문 대통령은 그 이듬해 이 당의 대선 후보로 나섰으나 당시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 전 대통령과의 표 대결에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친노세력은 결속력 강한 당권파로서 제1야당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19대 대통령선거 준비 작업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됐다. 이들이 집요하게 재집권을 위해 얼개를 만들고 승리 전략을 세우는 동안 보수세력은 안일에 빠져 있었다. 유일 보수정당이자 집권당이었던 새누리당은 ‘친박 대 비박’의 대결구도를 극복하지 못했다. 당연히 결집력은 떨어졌고 민심은 멀어져 갔다.
치명적인 타격은 엉뚱하게도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 가해졌다. 박 전 대통령은 폐쇄적이고 오만한 리더십을 드러냈다. 여당은 홀대를 받으면서도 대통령의 의지를 입법에 반영할 것을 강하게 주문받는 처지에 놓였다. 게다가 박 전 대통령이 주도하다시피 했던 ‘국회선진화법’으로 인해 ‘무능한 여당’의 이미지를 국민의 의식 속에 각인시키고 말았다.
박 대통령은 여당 내의 반발 세력에 대해 관용을 베풀고 포용력을 발휘하는 대신 강력한 징벌의지를 표출(이 바람에 2014년 유승민 당시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그 직을 내놔야 했었다)했다. 뿐만 아니라 제20대 총선에서,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을 앞세워 공천권을 독점하다시피 함으로써 당내 반발과 유권자의 실망을 초래했다. 새누리당은 참담한 패배를 맛봐야 했고, 박 전 대통령은 몰락의 급류에 휩쓸렸다. 공격자들이 성문을 부수기 위해 충차(衝車)를 앞세워 돌진해 오는데 안에서는 몫 다툼만 벌였으니 결과는 불문가지였다.

친박, 비박 당권싸움으로 분열 분당

그 참담한 패배에서도 박 전 대통령이나 새누리당은 깨달은 바가 거의 없었다. 박 전 대통령과 친박은 당권 장악에 급급했고 비박계 핵심들은 당을 등졌다. 그 와중에 박 전 대통령은 이른바 ‘최순실 게이트’로 궁지에 몰렸다. 광화문에서 박 전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주말마다 열렸다. 민심은 크게 흔들렸다. 문 대통령 등 야당 세력은 재빨리 이 군중집회에 편승, 정국 운영의 주도권을 장악했다(사실 민주당은 광장정치에 관한 한 일찍이 주도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는 점에서 ‘편승’이라기보다는 ‘주도’적 역할을 분명히 했다는 게 옳을 것이다).
촛불집회 형식의 시위는 2002년 6월 13일에 벌어졌던 ‘효순·미선 사건’에서 비롯됐다.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의 지방도로에서 길을 가던 두 여자 중학생이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치어 숨진 사건이었다. 촛불집회는 이해 11월 30일, 두 여중생의 사인 규명과 추모를 위해 처음으로 열렸는데, 야간 옥외시위를 금지한 법 규정을 피하기 위해 문화제 형식을 취했다. 그래서 촛불문화제로 불리기도 했다. 매주말마다 열린 이때의 촛불집회는 제16대 대선 판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후 반보수 재야세력, 진보좌파성향의 사회시민단체, 노동단체, 그리고 진보좌파 정치세력과 정당은 계기가 있을 때마다 촛불집회를 열었다. 야간의 대규모 촛불집회는 참가자들 뿐만 아니라 영상 시청자들에게도 대단한 심리적 자극을 준다. 촛불이 분노 원망 슬픔의 감정을 고조시키는 작용을 하는 것이다. 제 몸을 태워 미망(迷妄)을 밝힌다는 의미의 촛불 혹은 등불이 정부에 대한 반감을 고조시키고 그들을 행동에로 나아가게 충동질 하는 효과를 발휘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지만 엄연한 현실이었다(그리고 때로는 횃불시위대까지 등장해 살벌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제19대 대선에서는 촛불집회가 아예 상황을 주도했다. 이야말로 박 전 대통령을 탄핵과 사법처리로 내몬 원동력이자 추진력이었다. 대선은 8개월 가까이 앞당겨졌고, 선거판은 더불어민주당과 그 유력주자의 독무대가 되다시피 했다. 국민의당 안철수 후보의 경우,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에 비해 조건이나 환경이 아주 달랐다. 더욱이나 구여권 정당 후보들의 경우는 촛불집회와 탄핵정국으로 지리멸렬한 상태에서 엉겁결에 나서는 형국이었다. 이 점에서 문재인 정부는 촛불정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뒤늦게 적극적인 보수세력이 태극기집회로 맞섰다. 그 수가 급격히 늘어 어느 때부터는 촛불집회를 압도할 정도에 이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원수불구근화(遠水不救近火)라고 했다. 먼 곳의 물이 얼마나 많든 당장 여기서 타오르는 불을 끌 수는 없다는 한비자의 말이다(설림). 태극기집회가 박 전 대통령을 구하려 나섰을 때 이미 박 전 대통령은 촛불집회와 야당의 공격으로 재기불능상태에 빠진 상태였다.
문 대통령은 직전 정부를 붕괴시키는데 앞장섰고,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결정을 압박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 과실을 스스로 차지했다.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반정세력을 이끌고 왕좌를 차지한 격이라 하겠다. 아마 당초의 일정대로 12월에 대선이 치러지게 되었더라면 대선 결과는 예상하기 어렵다. 그 같은 판단으로 문 대통령과 민주당 측이 더 적극적으로 박 전 대통령 축출에 나섰으리라는 생각을 털어 버릴 수가 없다.

▲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이제 문재인 정부가 출범했다. 그렇지만 앞길이 순탄하기만 할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전쟁 같은 대선을 치른 만큼 반대세력의 거부감 저항감은 극도로 고조된 상태다. 이들은 대통령과 정부의 작은 과오 또는 과실도 그냥 넘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야당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의 야당과 그 동조세력들도 상시적으로 광장을 지키면서 정권을 쓰러뜨릴 기회를 노릴 수도 있다. 그래서 지켜보는 국민의 마음도 아슬아슬하다.
이왕 탄생한 정부인만큼 제발 국민의 신뢰를 얻어 순항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정부가 성공해야 국민이 성공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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