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만 양병설(養兵說), 불가능한 주장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 류성룡의 편지. <사지=국립중앙박물관>

[이코노미톡뉴스=임영호 전 국회의원] 최근 한반도의 정세는 임진왜란 때 조선과 명, 왜와의 관계와 비교된다. 임진왜란 때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의 역사적 첫 충돌이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고 본다. 이때 전쟁 중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나라살림과 군사적인 일들을 처리한 류성룡(柳成龍)은 전쟁 후, 스스로 경험한 것을 정직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여 후손들과 조정이 되돌아보고 곱씹어 볼 것들을 몇 권으로 정리했다.
그 중 조선 선조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일을 쓴 류성룡의《징비록, 懲毖錄)》은 후손들이 강한 국가를 만들게 하는데 가장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 원로학자 송복(1937~)은《징비록》의 저자, 류성룡의 상소문 549개 자료를 분석하여 류성룡의 리더십과 자강정신(自强精神)이 무엇인가를 밝혔다. 송복의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라는 긴 제목의 책이 바로 그 것이다.

10만 양병설(養兵說), 불가능한 주장

먼저 그는 율곡의 ‘10만 양병설’의 진위에 대하여 논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나기 전, 8년 전에 죽은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7~1584)는 그의 가장 비판적이고 공격적인 상소문《만언봉사, 萬言封事》에서 조선의 현재를 뼈아프게 지적했다. 한마디로 “조선은 나라가 아니다.”는 것이다. 집으로 말하면 ‘어느 대목도 손댈 수 없는 집, 하루가 다르게 썩어 내려앉는 집’이라고 일갈했다.
송 교수는 율곡의 ‘10만 양병설’은 사후 제자들이 꾸며낸 말이라고 했다. 첫째 당시 230만 명의 인구에서 10만의 양병은 여자, 양반, 노비를 제외한 20대에서 30대의 남자 중에서 10만을 선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그들은 농사의 핵심계층 뿐만 아니라 30대가 넘으면 손자를 보는 나이라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두 번째로 국가 재정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당시 곡물 생산량은 500만석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중 세입은 최고 60만석이다. 10만 명을 유지하기 위하여 최소한 1년에 76만석이 필요하다. 그만한 병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모든 세입을 다 쓴다 해도 모자라다. 우리 형편으로는 겨우 1만 명의 정병만이 타당하다는 것이다.

조선은 왕·조정·백성·양반 모두 후진적

▲ 원로학자 송복의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신이 있다’는 독일 철학자 랑케(1795~1886)의 말처럼, 모든 시대는 그 시대의 특수성으로 이해해야 한다. 먼저 류성룡이 살던 시대상황을 보자. 당시의 문화는 당위의 세계, 윤리의 세계만 익숙해 있었다. 미국의 동양사학 분야 석학인 라이샤워(1910~1990) 교수는 조선에서 유교의 극단화, 경직화가 모든 논의를 도덕적 사악함으로 몰아가는 담론의 후진성을 가져왔다고 한다.
존재의 세계는 난마처럼 엉킨 실타래와 같은 것이다. 당시에 이것을 푸는 논쟁을 들어본 적이 없다.《만언봉사》라는 상소문을 임금에게 올렸던 율곡은 당시 38세로 한참 활동했던 최고의 인재였다. 그 조차도 조선의 중흥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했다. 조선의 모든 상소가 원칙은 있으나 방법이 없었다. 오로지 윤리적 주장만 있었다. 실상은 어떻고, 그 대책은 무엇이고 하는 객관적 상황분석이나 방법론이 없었다.
왕 또한 마찬가지다. 절대군주이지만 인민을 편안히 살게 해주는 치국안민(治國安民)개념이나 가지고 있을까 의심된다. 조선은 철저히 왕의 나라이다. 임금을 바꾸는 것은 하늘이 아니라 민심이라는 것을 모른다. 백성을 국가의 근본이 아니고 마음대로 쳐내도 되는 곁가지 정도로만 생각한다. 신하들도 예외 없이 절대 권력에 순종한다. 신하로서 사고와 행동범위는 좁고 얕다.
백성들도 국가 공동체라는 의식도, 애국심도, 충성심도 없었다. 백성의 마음에는 고정된 일정함이 없다. 적이든 아니든 관계없이 은혜를 베푸는 자에게 마음이 간다. 왜는 주둔한 한양에서 별 탈 없이 지냈고, 왕이 피난 갔을 때도 도성을 불태운 것은 왜군이 아니라 우리 백성이었다.
유학을 섬기는 지식인들도 최고 목표가 중국사람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내 나라 조선 사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소중화(小中華)가 되느냐에 있다.

조선을 지키는 군인이 없었다

조선시대 전쟁의 지휘는 비변사이다. 거기서 군국기무(軍國機務)를 관장했다. 유성룡은 1593년에서 1598년 5년 동안 영의정이라는 정무와 군무를 겸한 도체찰사를 지냈다. 당연히 군인들이 중심이 되어야할 군국기무에는 군인도 없고 장수의 직접적 참여도 없었다. 문인의 지휘로 전쟁한다. 군국기무는 류성룡이 조정에서 떠나는 날 사실상 폐지되었고, 청일 전쟁 후인 1894년, 다른 나라 주도로 실제 국가 기구화 된다. 그때 이미 나라는 기우러져 있었다.
임진왜란 때 국방을 담당한 조선군의 수준은 한마디로 목불인견이다. 군사력이 전무였다. 조선은 독자적으로 침략군에 맞설 힘이 없는 나라였다. 당시 전쟁의 당사자는 명과 왜였다. 명은 구원 군이다. 조선군은 작전권도, 지휘권도 없는 명의 예속 군에 속한다. 우리는 전쟁 마당이었을 뿐이었다.
조선에는 싸울 수 있는 군인이 없었다. 적만 보면 도망가는 도망 군뿐이었다. 병법도 몰랐다. 당시 명장이라고 하는 신립(申砬)도 최후의 방어선을 험준한 문경새재가 아닌 평평한 남한강변 탄금대(彈琴臺)로 정하는 ‘바보 같은 짓’을 했다. 정보도 파악하지 못하여 적이 바로 코 앞 10리 밖에 와 있는 것도 몰랐었다. 오로지 바다에서만 이순신이 있어 조와 왜의 전쟁이었다.
조선의 군대는 희한한 군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조직은 피라미드인데 조선군은 역 피라미드이다. 군 최고 명령자는 한 사람이 이어야한다. 조선군은 최고명령권자가 여러 사람이었다. 지휘계통이 서질 않았고, 명령도 제멋대로 이었다. 도원수, 순변사, 순찰사, 병사, 수사 심지어 조방장까지 같은 등급이면 모두 특정 지역의 병권을 장악하는 도원수 노릇을 한다. 도원수도 전문 무관이 아니고 문관이 맡았다.
중앙의 무관은 늦게나마 봉급미(俸給米)를 받는다. 그런데 하층 무관인 병사, 수사, 첨사, 권관은 생활을 보장하는 녹봉이 없었다. 그들은 백성을 수탈하여 생계를 잇는다. 진(鎭)의 장수는 어민들에게 생선을 상납하게 하고, 사병을 개인화하여 베를 바치면 군역을 면제받게 한다. 오히려 녹봉 없는 장수가 인기였다. 녹봉 없는 무록제(無祿制)에 대하여 어느 누구도 제도 개혁을 제시하지 않았다.

<필자소개 : 임영호>

△1955년생 △충남고, 한남대 행정학 박사 △제25회 행정고시 합격 △대전 동구청장 3선 △18대 국회의원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비서실장, 자유선진당 대변인 △전 코레일 상임감사.

평소 군인들은 군사훈련이 안 된 상태였다. 대부분 병농일치(兵農一致)의 농사꾼 병사였다. 장수가 병사들을 단 한 번도 지휘하지 않았다. 명 장수 이여송은 조선군대를 ‘도망 잘 치는 군대’로 낙인찍었다. “너희 나라 군대는 병기가 전혀 없다.“ “ 주 무기가 몽둥이와 죽창, 곡괭이, 쇠스랑이다.“
조선은 고을 아전이 군인을 뽑는 나라이다. 당시 실제 복무하는 군수는 8000명이었다. 장부상에는 4만 명이다. 6년마다 군적을 정리하여야 하는데 정리가 안 되었다. 주소불명인 걸인들과 사람인지 개인지 모를 이름들이 수두룩하다. 실전에 동원 할 수 있는 군사의 수는 극히 적었다. 선조가 한양을 떠날 때 호위병사가 겨우 300명이었다.
평안도의 경우 평상시 장부상 군사의 수는 1만 명이다. 현역으로 복무하는 병졸에게 비용을 대는 봉족(俸足)을 포함하면 2만 명이다. 그러나 실제 동원 수는 500명에 불과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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