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화석연료 시대를 향해
화석연료와 인류역사

류가 석유를 사용하기 시작한 때는 기원전 2천년 전부터다. 당시의 석유(石油, petroleum) 석유는 말 그대로 돌에 묻어있는 기름이었을 뿐이었다. 오늘날 세계 경제의 주축을 이루는 석유시대 도래를 짐작도 하지 못할 시기였다.

▲ 지난 6월 1일,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공식 표명했다.

[배만섭 기자 @이코노미톡뉴스(이톡뉴스)] 최근 신재생에너지를 비롯해 탈원자력, 태양광·풍력·전기에너지 등 대체에너지에 관심이 뜨겁지만 현재도 여전히 화석연료인 중 하나인 석유가 주류임을 벗어나기는 힘들다. 아직도 많은 나라가 석유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석유는 각종 화장품, 아스피린, 타이어, 플라스틱, 섬유 등 인류의 작은 실생활에서부터 스마트폰, 인공위성 발사를 위한 로켓추진체로 사용되는 등 우주시대에서도 필요할 정도로 매우 중요한 현실적 가치의 실자원이다.

자원 민족주의 표방, "We're getting OUT"

자원 민족주의(資源民族主義), Resource Nationalism)는 최첨단시대를 달리고 있는 현재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세계경제의 주춧돌 중에 하나인 미국은 공화당의 트럼프 대통령이 선출되면서 자국 이익 중심의 정책을 노골적으로 표명하고 있다.

이윽고 지난 6월 1일, 트럼프 대통령은 파리기후변화협약 탈퇴를 공식 표명했다.

"We're getting out," he said. "And we will start to renegotiate and we'll see if there's a better deal. If we can, great. If we can't, that's fine." 미국은 (파리기후변화협정을) 탈퇴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협상을 시작할 예정입니다. 공정한 협정을 만들어지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탈퇴선언은)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

I was elected to represent the citizens of Pittsburgh, not Paris. 저는 파리가 아니라 (제조업의 불황의 늪에 빠져있는) 피츠버그의 시민을 대표하기 위해 대통령에 선출된 겁입니다.

자원의 부족시대를 대비하기 위해 미국은 일찌감치 에너지전략에 장기적이고 포괄적인 정책을 방안하고 구사해 왔다. 특히 중동의 천연자원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가희 대단하다 말할 수 있다.

사실 자원 민족주의는 석유자원의 민족주의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2차 산업혁명의 재료는 석유와 전기다. 19세기 후반의 산업의 발전에 석유는 여전히 중요한 자원이었다. 석유자원의 국유화의 시초는 1938년의 당시의 최대 산유국이었던 멕시코의 국내 석유 산업을 국유화시킨 탄생한 페멕스(Pemex)이다.

석유수출국기구인 오펙(OPEC)은 1960년 9월 원유의 가격하락을 막기 위해 이라크·이란·사우디아라비아·쿠웨이트·베네수엘라의 5대 석유 생산·수출국 대표가 모여 결성한 협의체다. 현재는 14개국으로 늘어나 있다.

'석유' 자원의 역사와 파동

현재 미국은 세계 1위 석유공급업체 엑슨모빌(ExxonMobil)을 보유하고 있고, 영국은 2위 업체인 BP(British Petroleum)를 가지고 있다.

1940년대 까지만 해도 미국은 남미와 함께 세계 최대 산유국이었다. 그러한 미국이 왜 중동의 석유로 관심이 돌리기 시작했을까. 1940년만 해도 중동의 원유 생산량은 전 세계 생산량의 5%에 불과했다. 그러나 중동의 석유 매장량의 수치를 확인했던 미국은 중동 원유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윽고 루즈벨트 대통령은 '영미 석유협약(Anglo-American Petroleum Agreement)'를 맺게 됨으로서 자국을 벗어난 자원 민족주의가 확대되기 시작했다. 중동 원유에 대한 지배력 강화에 큰 관심을 보였던 나라는 자원 강국인 미국과 영국이었다.

1970년대 여러 차례의 중동전쟁 시 미국은 이스라엘을 지원하였고, 이스라엘은 초기 건국 때보다 넓은 영토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에 대응해 아랍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원유 생산량을 크게 줄어서 원유자원을 무기화하기 시작했으며, 높은 석유 유가로 2차례 오일파동(1973년, 1978년)이 일어났다.

2번의 석유파동(Oil Shock)과 러시아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고(1986년)로 인해 세계 각국은 새로운 대체 에너지자원의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탈 화석연료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이 이 시기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많은 대체에너지 리소스가 연구·제시되었지만 구체적인 가격 경쟁력이 뒷받침되지 못하였다. 

이 시기에 탄생한 용어가 바로 '불확실성의 시대'이다. 1977년 캐나다 출신의 경제학자인 존 K.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가 '불투명하고 앞을 내다보기 힘든 시대의 도래'가 왔다면서 사용한 용어다. '불확실성의 시대'가 거론하는 주요 개념의 많은 부분들이 성장에 따른 자원과 환경의 문제에 초점이 깔려있다.

석유의 역사는 세계 강대국의 역사이고 이는 바로 세계역사와도 연관되어 진다. 자원 측면에서의 역사관이지만 오늘날에도 자원 강대국의 지위는 역사를 바꿀 수 있는 만큼 강력하다.

▲ 마리온 킹 허버트의 오일피크설(검정선)과 실제 미국 석유 생산량(빨간선). <자료=위키피디아>
전 세계 석유 매장량=1조7천억 배럴

영국 BP(British Petroleum)社의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말 기준으로 전 세계 원유 확인 매장량은 약 1조 7067억 배럴로 적지 않은 매장량이다. 현재의 연간 생산량을 기준으로 보면 앞으로 약 50년은 사용할 수 있는 수치다.

지역별로 보면 여전히 중동이 47.7%로 확인 매장량 또한 거대하다. 중남미가 19.2%로 최근 오일샌드 매장량의 확인으로 10년 전 7.9%에서 2배 이상 급증했다. (북미 13.3%, 유럽·유라시아 9.5%, 아프리카 7.5%, 아시아·태평양 2.8%).

이로 인해 세계 최대 원유 매장량은 중남미의 베네수엘라가 차지했고, 그 뒤로 사우디아라비아가 2위다.

1956년 미국의 마리온 킹 허버트(Marion King Hubbert)는 석유자원이 고갈된다는 '오일피크' 이론을 발표했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1970년 초에 석유 생산량이 최고 정점에 이르고 그 이후부터는 줄게 된다는 이론이다.

'오일피크설'이 한때 크게 관심 받았던 때는 1차 오일파동 때였고. 정확히 1971년부터 미국의 최고 생산량을 기점으로 줄기 시작했다. 그가 주장한 오일피크설이 맞아 들어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재 전 세계적인 생산량은 줄지 않고 증산하는 추세의 곡선을 그리고 있다. 다시 전체적인 생산량은 해마다 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원유 매장량의 확인이 현대의 첨단 기술의 도움으로 확인 매장량이 늘어나고 있다. 최근에는 오일샌드를 비롯해 초중질원유, 셰일 오일의 개발로 인해 확인매장량이 해마다 늘고 있다. 기존에는 경제성이 적어보였던 신규 석유 매장량이 기술의 발달로 인해 경제성, 가용성 , 효율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 대한석유공사 울산 정유공장의 모습. <사진@국가기록원>
130년 역사의 우리나라 석유

우리나라에 석유가 들어와 사용된 지도 100년이 넘어섰다. 19세기말 1880년대에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유입되기 시작한 석유는 외국 석유기업의 국내 진출이라는 의미보다는 지배하는 의견이 다수다. 국내 석유산업의 본격적인 태동의 시기는 1960년대부터로 본다. 이는 이 시기에 국내 정유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 석유가 처음으로 등장하게 되었던 기록을 살펴보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기록의 발견으로 1880년대로 추정된다. 구한말에 미국과 러시아로부터 석유를 수입하는데 그 회사가 미국 스탠다드 석유회사다. 한일병합 후에는 미국 스탠다드 오일 외에도 텍사코 오일(미국), 영국 쉘社가 있었으며, 한국 최초의 주유소인 역전주유소가 서울역 앞에 위치했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정유공장인 '조선석유주식회가'가 1935년에 원산에 세워졌다. 6.25 전쟁 이후에는 주요 석유배급가 우리나라에서 철수하고 대한석유 정제회사가 석유를 직접 판매하기 시작했다. 당시 정부는 휘발유 물품세를 기존 60%에서 100%로 인상해 휘발유 소비량을 감소시켰다.

SK의 모태가 된 대한석유공사가 1962년에 설립되었다. 1968년에 휘발유 세금이 100%에 200%로 인상되기도 했으며, 1969년 2월에는 석유제품 가격고시제가 실시됐다. 1972년 석유사업법 공포, 1973년과 1979년에는 석유파동이 일어났다.

1981년 '3.14 조정명령'으로 정부나 정유사가 주유소를 소유·경영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 대리점과 주유소가 급증했다. 이후 주유소 허가제가 실시되어 증가추이가 둔화되었다. 1992년 주유소 상표표시제가 실시되면서 서울시 강남구에 자가 폴(自家 pole) 주유소, 셀프 서비스 등의 자동판매 주유소가 처음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95년 주유소가 거리제한제도가 폐지되면서 신규주유소가 급증하기도 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