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선친과는 정치적 동지사이

▲ 고영완 선생(왼쪽)과 조선학생동지회.

[이코노미톡뉴스=최수권 논객] 무계 고영완(1914. 2. 11〜1991. 8. 6)은 전남 장흥사람이다. 필자의 고향인 장흥에서 1945년 미군정하에서 장흥군수를 지냈고 제2대, 5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이다.
제2대 국회의원 당선일이 1950년 5월 31일이었고, 다음달 6.25일에 한국전쟁이 났다. 혼란의 시기 1945년 5월 1일까지 임기를 마쳤다. 제5대 국회의원 에 당선되었고(1960.7.31)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정치활동이 금지됐다. 1대, 3대, 4대, 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하였다. 어떻게 보면 비운의 정치인이기도 했다.

항일 조선학병동지회 호남책임자 역할

고영완은 서울중앙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센슈대학(專修大學)에 유학했다. 유학중에 그는 항일결사조직인 조선학생동지회에 참여해 전라도 책임자로 독립투쟁의 선봉에 나섰다.
1939년 12월에 조직된 학생동지회는 기미년(1991년) 3.1운동과 같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하기도 하였다. 전 세계에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 조선이 독립국으로 태어날 수 있도록 전 세계를 향해, 구원의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대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학생운동인 것이었다. 거사일을 1942년 3월 1일로 정했다.
몽양 여운형의 권유로 연희 전문학교 재학 중인 윤주연과 김상흠(인촌 김성수의 아들), 서영원(서재필 박사의 손자)이 주축이 됐고, 같은 학교 학생인 이동원, 김영하, 민영도 등과 함께 항일 결사단체인 “조선학생 동지회”가 조직되었다. 당시 몽양은 “이 운동은 반드시 도쿄유학생들과 회동하여 긴밀히 밀착되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조직의 리더였던 윤주연은 장흥의 지주집안출신으로 일본 유학중인 고영완을 설득했다.
동지회는 그 조직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고, 각 학교는 물론 일본 등 해외 유학생들과 연계하여 거국적인 거사를 계획했다.
1940년 2월부터 1941년 7월까지 조직 확대와 동지 규합을 위해 수차례 모임을 가졌다. 남한산성, 냉천동약수터, 연희전문학교 뒷산, 벽제관 등에서 조직의 결속과 확대를 위한 것이었다. 각 학교, 지역단위 세포조직의 리더들이 정해지고, 거사일(1942.3.1)에 서울의 남산으로 집결토록 계획됐다. 거사 직전에 독립선언서를 선포하고 일제히 봉기해 시위를 행동으로 옮기자고 결의했다. 삐라 약28만장을 인쇄해 각도 조직에 배포했다.

-조선 학생 동지회 격문-
전 조선 학생 동지들이여
궐기하자!
일본 왕국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약탈했다.
이제는 더 이상 가져 갈 것이 없다.
남은 것은 생명뿐인데, 그것마저 앗아갔다.
최후의 단발마 일본을 타도하자.
오는 3.1일을 기해서 일제히 일어나자.
그리고 시위하자
민족의 정기를 되살려 국제적으로 널리 알리고
우리의 살길을 기어이 찾자!

여동생과 함께 검거되어 징역형 옥고

조선학생 동지회의 거사는 실패했다.
1941년 7월 함경도책 이근갑이 경성의 윤주연(조직리더)에게 보내는 소개 편지를 소지한 원산 상업학교 세포책이, 상경 기차의 검문에 걸려 체포 되면서 거사의 전모가 드러나고, 거사는 미완으로 끝난다. 1941년 9월에는 동지회 경성본부와 도쿄 유학생 본부가 일본경찰의 대대적인 검색으로 조직이 붕괴되고 와해됐다. 후에 이 사건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비하되어 많은 사람이 검거된다. 조선학생 동지회 회원들은 검거되고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고영완은 여동생 고완남(인촌 김성수의 자부, 이화여전 재학 중)과 함께 검거되어(1941.9.) 1943년 3월 함흥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혐의로 징역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고영완 부친 고동석 옹은 이 사건의 충격으로 사망했다. 조선학생동지회의 리더는 윤주연이었으며, 숨은 지도자는 고영완으로 전해지고 있다. 「조선학생 동지회약사」에는 고영완의 외가 장성 흥정에 있었던 논 300마지기를 담보로 은행에서 40만원을 융자 받았다는 사실이 기록된 것을 보면, 20억 상당(현재기준)을 독립자금으로 지원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부에서는 1982년에 고영완에게 독립유공자로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으로 위로했다.
해방 후 조선동지회 멤버는 여운형과 결별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고하 송진우편에 서게 된다. (계곡의 안개처럼 살다/고산지저 자료인용)

선대는 임란시 전사한 고경명 의병장

고영완은 해방 후, 고향인 장흥중학교를 설립시 답 100두락을 희사한다. 또한 장흥 농업중학교를 설립시켰다. 황폐한 농촌부활을 꿈꿨다.
당시 부의 기준은 전·답이었다. 재산 3만평을 기부한다는 게 쉽지 않는 결정이다. 대인이다.
고영완 16대 선대가 임진왜란 당시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문신) 고경명이다. 의로운 집안의 DNA를 받아서였을지 모른다. 필자의 선친과는 해방 전후부터 정치적인 동지로 가깝게 지내셨고, 선친의 기일에는 자주 찾아와 주셨던 고마운 분이기도 한다.
선친은 해방 후 대한청년회, 국민회의 지역책임자를 지내셨고, 6.25전쟁 중 고향에서 적에게 포로로 잡혀 인민재판으로 총살을 당하셨다. 운명직전에 “대한민국 만세” 삼창으로 최후를 마감했다. 그날 저녁 거의 전 가족이 끌려가 총살당한 비운의 집안이기도 하다.
필자는 철이 들면서 한 많은 고향을 떠났다.
그리고 청년시절 어느 날, 호남선 열차 안에서 고영완 선생님을 우연히 뵙게 됐다.
“제가 해월(海月) 최동희 씨의 아들입니다.”
하며 인사를 드렸다.
“힘들지 않느냐?”고 놀라워했다.
언제든 찾아오라고 위로해 주었다.
반세기도 지난 얘기다.

▲ 최수권(전 세계문인협회 부이사장, 수필가)

지난달, 고병돈(고영완의 삼남) 형이 서울에 왔다며 전화가 왔다.
우린 식사를 하며 사는 얘기를 나누며 선대들의 자취를 떠올려 보기도 했다.
세월이란, 지나면서는 참 모질고, 긴듯하지만 돌아보면 순간인 것을 그래도 어떻게 사는 게 정말 잘사는 인생인지, 아직도 가늠이 서질 않는다. 재산을 다 나누고 사는 삶? 고영완은 후손에게 유산을 많이 남기지 않았다. 조국을 위해 목숨을 가족까지도 내놓은 삶? 이는 삶에 어떤 의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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