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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전 의원칼럼] "류성룡의 리더십(2)", '조선은 나라가 아니었다!'류성룡은 10만 양변설이 아닌
'정병' 1만 병 양성 제안
  • 임영호 전 국회의원
  • 승인 2017.07.03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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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로학자 송복의 ‘류성룡, 나라를 다시 만들 때가 되었나이다’

[이코노미톡뉴스=임영호 논객칼럼] 군량미 부족이 양병의 어려움
7년 전쟁은 군량전쟁 이었다. 조선의 군량은 1차적으로 명군의 식량이 되고, 2차적으로 우리 군대의 식량이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굶어 죽어가는 백성들에게 돌아간다.

류성룡은 전시 수상으로 군량 수송 역을 맡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곡식이 나올 곳이 없었다. 기껏해야 3~4천석밖에 없었다. 류성룡은 하루하루 식량을 모아간다. 호남과 평북지역, 영남 3분의 2외에는 거의 전역이 농사를 못 짓는다. 특히 이순신의 호남지역이 주된 군량조달지이다. 호남의 길목인 진주성 방어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징비록》에 보면 군량조달에 관한 생생한 기록이 있다. 우리 병사들은 늘 굶주림과 피곤에 지쳐 있었다. 당시 이여송의 군대는 하루 1인 3되를 주었다. 4만 5천명의 1년 치 군량만 48만 6천석이다. 평상시의 조선의 세입 60만석과 비교해 보라. 당시 조선의 군량 공급능력은 1만 명분이 고작이었다. 게다가 명의 군마(軍馬)까지도 사료공급을 해야만 했다.
수송의 어려움도 컸다. 거의 산지수송이라 5일분 지속이 능력의 전부다. 호위군까지 차출해서 조달했다. 학전(學田)으로부터도 군량을 거두었다. 특히 비교적 부자인 중인계급인 아전, 의관, 율관, 역관, 산관 등으로부터 걷었다. 또한 공명첩을 주고 군량미를 걷었다. 공명첩은 실제의 직이 없는 이름만의 벼슬이나, 조정에 대한 충성심을 높인다. 명과의 무역으로도 조달했다.

류성룡은 1만 정병 양성코자 했다

그는 정병주의(精兵主義)와 훈련제일주의(訓練第一主義)를 주장했다. 강한 훈련이 강한 군인을 만든다고 생각했다. 포, 조총 등 병기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포대 설치와 척후의 활용을 강조했다. 일본은 척후를 적극 활용했다. 대가도 지불했다. 명주와 면 포, 소와 말로도 포상했다. 이일의 첫 패배와 충주 탄금대 신립의 패전은 척후활용의 실패의 예이다. 적이 가까이에 와 있어도 몰랐던 것이다.

류성룡은 속오제(束伍制) 실시를 주창했다.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군인이 될 수 있게 했다. 양반도 징집하려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병사 5인을 묶어 1오(伍)로 하여 피라미드식으로 부대를 만든다. 훈련도감을 중앙에 설치하여 주요 군 조직으로 했다. 이 훈련도감은 1881년까지 지속하였다.
그는 또한 정병 1만 주의를 제안했다. 1인당 3되로 지급하면 1년 식량으로 10만 8천석이 필요하다. 2000명씩 1영으로 하여 5영으로 나누어 훈련한다. 당시는 군사의 훈련교본이 없어 명군의 것으로 하였다. 지금의 특전사처럼 가장 날쌔고 용감한 병사를 선봉으로 하는 군 편제를 실시했다. 용겁불혼(勇怯不混), 용기 있는 자와 겁 많은 자를 혼합하여 두지 않았다.
류성룡은 군 병사는 생계가 걱정 없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고, 패배 시는 군졸과 오장, 모두 다스리는 연좌제를 제안했다.

임진왜란은 왜·명에겐 조선분할 전쟁

명은 조선영토를 반인 한강 이남인 경기 남쪽부분과 충청, 전라, 경상도를 왜에 주고, 조선의 북쪽인 함경, 평안, 황해, 강원도라도 사수해 왜로 부터 명을 지키는 울타리로 삼으려 했다.
명과 왜의 분할시도는 전쟁으로 시작되었다가 협상으로 옮겨가고, 다시 전쟁으로 이어 졌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과 함께 끝을 맺었다. 이런 가운데 조선은 철저히 배제되었다. 왜와의 3차 회담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강화조건으로 7개조를 제시했다. 그 중 4번째 조항이 조선분할 안이다.
명 조정에 보고할 때는 오직 히데요시를 일본국왕에 봉한다는 것만 담긴 가짜 국서가 명 조정에 상신된다. 명 조정에서는 이것을 믿고 명의 책봉사를 일본에 파견한다. 히데요시는 강화 7개조가 완전히 무시된 것을 알자 4년여의 협상을 완전히 결렬시킨다. 히데요시는 조선 4도의 분할 목적으로 14만 5천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다시 쳐들어온다.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명의 조선 직할 통치론은 1594년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제기되었다. 선조는 임진왜란 첫 날부터 조선군이 어이없이 패배하자, 백성과 조선군에 대한 불신이 컸다. 그의 목표는 오로지 왕권유지이다. 선조는 철저하게 명에 의존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오히려 명군대의 철군을 반대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600년까지 명군 3만 3천명이 더 조선에 주둔한 것도 직할통치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류성룡의《징비록》에 서려있는 자강론(自强論)은 물거품이 되었고, 그 역사는 가깝게는 30년 후, 멀게는 300년 후에도 되풀이 된다.

<필자소개 : 임영호>

△1955년생 △충남고, 한남대 행정학 박사 △제25회 행정고시 합격 △대전 동구청장 3선 △18대 국회의원 △자유선진당 이회창 총재 비서실장, 자유선진당 대변인 △전 코레일 상임감사.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말이 옳다. 요즘 사드 배치문제로 국론이 분열된 상태이다. 사드를 왜 배치하려고 하는 걸까? 북한이 탄도미사일인 스커드나 노동미사일을 발사하여 마하의 속도로 떨어진다고 가정하자. 사드같은 방어용 무기가 없다면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중국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경제보복까지 하고 있지만, 만약 중국의 요구대로 사드배치를 하지 않고 중국과 평화관계를 유지한다면 그것이 진정한 평화인가? 류성룡의 자강론은 현재에도 유효하다. 한국의 군사력을 강하게 하는 것만이 나라를 지키고 평화를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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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호 전 국회의원  econotalki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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