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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백일(金白一) 장군 추모] 흥남철수 ‘피난민의 아버지’순국 66주기, 탄생 100돌 학술회의
38선 돌파, 북진 작전 최 선봉장.
  • 배병휴 [이코노미톡뉴스 회장]
  • 승인 2017.07.18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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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전의 용장, 맹장...김백일 장군.

흥남철수 ‘피난민의 아버지’.
김백일(金白一) 장군 추모.
순국 66주기, 탄생 100돌 학술회의.
38선 돌파, 북진 작전 최 선봉장.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흥남철수 작선시 ‘피난민의 아버지’로 불린 김백일(金白一) 장군의 건군 및 6.25 전쟁 활약상을 추모하는 학술회의가 고인의 순국 66주기 및 탄생 100돌 기념으로 지난 6월 21일, 전쟁기념관 ‘이병형 홀’에서 열렸다. 학술회의는 (사)실향민중앙협의회(회장 노학우), (사)한국문화안보연구원(원장 김동명) 주관, (사)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후원으로 열렸다.

‘38선 사라졌다’ 북진하라 명령

김일성의 준비된 남침전쟁으로 대한민국의 운명이 낙동강 전선에 걸려 있던 풍전등화(風前燈火)일 때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파죽지세로 북진했다. 이때 낙동강 전선 동부의 인민군 공세를 격파한 김백일 장군의 국군 제1군단은 1950년 9월 29일, 38선 가까이 접근하여 38선 돌파 북진 명령을 기다렸다.
김백일 군단장이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38선 돌파 여부를 문의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적극 찬성하지만 워커 사령관이 반대할 것이라고 알려줬다. 이에 유엔군 측에게 적의 공세를 꺾기 위해 일시적으로 북진할 수밖에 없다는 취지를 구실로 설득했다.
이에 따라 김백일 군단장이 예하 3사단 23연대장에게 “이제 38선은 사라졌다. 북진하라”고 명령했다. 이날이 바로 1950년 10월 1일 오전 11시 25분으로 38선을 돌파한 ‘국군의 날’이었다. 이로부터 1군단 예하 제3사단(이종찬 대령), 수도사단(송요찬 대령)이 선두 경쟁을 벌이면서 원산을 동시 점령했다.
원산 점령 소식에 감격한 정부는 김백일 준장을 소장으로 진급시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소장과 같은 계급으로 예우했다. 곧이어 이승만 대통령이 두루마기 차림으로 원산시를 방문, 열렬한 환영 속에 통일의 꿈을 연설했다. 다시 1군단이 함흥을 점령하자 이승만 대통령이 함흥을 방문하여 감격의 연설을 했다. 그렇지만 1군단은 잠시도 중단 없이 청진, 혜산진을 점령함으로써 두만강변에 도달했지만 육군본부로부터 철수 명령이 내렸으니 청천벽력이었다. 중공군의 참전에 따른 흥남철수 작전이었다.

10만 ‘피난민의 아버지’ 칭호 절로

▲ 흥남 철수 작전 완료후, 마지막으로 흥남항을 떠나는 미해병 제7사단. <사진=국가기록원>

철수 작전설에 놀란 북한 피난민들이 흥남부두로 접근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미 10군단은 철수작전의 긴박성을 내세워 민간인 피난민들을 수송하기 어렵다는 입장이었다. 이 절박한 시각에 김백일 장군이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에게 호소하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김 장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다고 자신하는 북측에서는 국군이 진격했을 때 태극기를 들고 나와 만세를 불렀거나 시민환영대회에 참가하여 노래 부르고 춤춘 젊은이들을 모조리 ‘반동’으로 처단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절박한 호소에 알몬드 장군의 결단으로 전쟁 물자를 바다에 버리면서 민간인 피난민을 수송키로 작전을 변경했다. 이 결과 10만명의 피난민이 무사히 거제도로 안착할 수 있었기에 김 장군에게 ‘피난민의 아버지’ 칭호가 절로 주어진 것이다.
당시 흥남철수 빽빽한 수송선 안에서 5명의 생명이 태어나 미군 측에서 급한 대로 ‘김치’ 1호에서 5호까지 명명했다. 이중 한 분이 지금도 거제도의 유지로 활동하며 거제도 흥남철수작전기념공원 김백일 장군 동상보존 활동을 벌이고 있노라고 들었다.
김백일 장군 추모학술대회를 주최한 (사)실향민중앙협의회 노학우 회장은 흥남철수 피난민 아버지와 거제도 태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실향민 2세로 이날 행사 기념사를 마친 후 당시 흥남부두 피난의 절박감을 노래한 ‘굳세어라 금순아’를 목청껏 불러 참석자들로부터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사)한국문화안보연구원 김동명 원장은 육사를 나와 준장으로 전역한 김백일 장군의 차남이다.
‘굳세어라 금순아’는 1951년 8월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로 나와 피난살이 서러움을 달래주는 국민가요가 됐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데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더냐
피눈물을 흘리면서 1.4 이후 나 홀로 왔다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
이 내 몸은 국제시장 장사치기다
금순아 보고싶구나 고향꿈도 그리워진다
영도다리 난간 위에 초생달만 외로이 떴다

▲ 1950년 흥남철수작전 중, 시베고르호가 함포 지원사격을 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산하를 삼킬 듯 기개로 34세로 순직

김백일 장군은 1951년 3월 28일, 미 8군 전방 지휘소에서 열린 작전회의에 참석한 후 군단으로 귀환 중 경비행기 추락사고로 순직했다. 당시 34세의 한창 젊은 김 장군이 순직한 지점은 현 용평스키장으로 눈 속에 묻혀 시신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한 달 열흘이 지난 5월 9일 나물 캐러 나온 처녀들에 의해 비행기 잔해와 유해가 발견되어 사상 처음 육군장으로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에 안장됐다.
당시 눈 속에서 숨진 장군의 가죽점퍼 속주머니에서 하이네 시집이 발견되어 야전의 맹장이 아름다운 시심(詩心)에 젖어 악천후 속에 대관령을 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시집 속에 장군이 읽다 만 대목이 접혀 있었다.
즐거운 봄이 찾아와 온갖 꽃들이 피어날 때에
그때 내 가슴 속에는 사랑의 싹이 움트기 시작하였네
즐거운 봄이 찾아와 온갖 새들이 노래할 때에
그리운 사람의 손목을 잡고
불타는 심정을 호소하였네

김 장군의 전공을 기리는 무공비가 1955년 3월 1일, 부산시 남천동 금련산에 세워져 있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 대장이 비를 세우고 사학자 이병도 박사가 비문을 썼다. 비문에 “기개는 산하를 삼킬듯하고 용맹은 물불을 헤아리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김 장군의 38선 최초 돌파를 기념하는 강릉 ‘백일교’(김백일교)가 1956년 1101 야전 공병단에 의해 세워졌다. 그 뒤 목제다리가 낡아 1972년에는 콘크리트 다리로 강화되고 2002년 6월에는 지역 사단장 김태영 장군과 강릉시가 뜻을 합쳐 김백일 기념비를 건립했다. 또 2015년 11월에는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와 김 장군의 유족 및 보병 23사단이 강릉시 연곡면 연곡천 하류 백일교 남단에 위치한 기념비를 대폭 확장, 정비함으로써 38선 돌파와 북진의 기상을 추모케 한다.

▲ 김백일 장군 순국 66주기 및 탄생 100돌 기념으로 지난 6월 21일, 전쟁기념관 '이병형 홀'에서 열린 '김백일 장군의 건국 및 6.25 전쟁 주요활동' 학술회의 기념사진. <사진=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

간도로 망명한 독립투사의 손자

추모학술대회에서 이준구 전 경기대 교수는 김 장군의 가계와 건군활동에 관해 자세하게 발표했다. 김 장군은 1917년 1월, 북간도로 망명한 가계에서 탄생하여 서울 보성중학을 졸업하고 만주 길림 고급중학을 졸업했다. 이어 봉천 육군군관학교를 나와 육군소위로 임관되고 만주군 한인특설부대 중대장(대위)으로 해방을 맞았다.
1946년 군사영어학교를 수료한 후 중위로 임관되어 육군 제3연대 (이리) 창설, 육사교장 등을 거쳐 6.25 발발 때는 육군본부 행정·작전참모부장을 맡고 있다가 낙동강 동부전선이 위급할 때 김홍일 장군 후임으로 제1군단장(준장)을 맡아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김 장군의 부친 김창근은 서울 보성중학을 졸업했지만 병약하여 일찍 별세했다. 이 때문에 조부 김영학(金永學) 독립투사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라면서 군인의 길을 택했다. 조부는 구한말 신·구학문의 선각자로서 관북지방 최고 명문 ‘함일학교’ 제2대 교장을 맡기도 했지만 한일 합방 후 북간도로 망명했다.
망명생활 중에 현지 교민회장을 맡고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운동에 이어 간도 광복단을 창설, 독립선언식을 가진 후 지하로 숨어 서울로 잠입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됐다가 1944년 7월 옥사했다. 정부는 1990년 고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백일 장군의 순직이후 친일논란이 제기된 적이 있지만 독립투사의 손자로서 대한민국 건군과 6.25 전쟁 무공을 생각하면 말이 되느냐는 반론이 많다. 만주군 대위 계급을 친일의 잣대로 제시한 일부가 있지만 이는 ‘박정희 중위’를 친일명단에 포함시키기 위해 위관급을 끌어들인 것이 아니겠느냐고 보여진다.

▲ 김백일 장군이 38선 돌파 직후 기념비를 세우고 '아아 감격(感激)의 삼팔(三八)선 돌파(突破)'를 적고 있다.

기계, 안강전투서 적 2개사단 격퇴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이상호 박사는 낙동강 방어전 동부전선인 기계(杞溪), 안강(安康)전투에서 김백일 장군의 국군 제1군단의 전공을 높이 평가했다. 당시 북의 유격대대, 5사단, 12사단 등이 포항, 대구, 부산까지 압박하기 위한 공세를 강화하여 전세가 너무나 급박했다. 수도사단과 제3사단으로 구성된 국군 제1군단이 적의 경주 진출을 차단하고 낙동강 전선 진출을 방어해 내는데 성공했다.
당시 실전지휘 경험이 풍부한 김 장군이 국군 1군단장을 맡아 인민군 2개 사단을 격멸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의 동부를 확고히 지켜 북진으로 전세를 반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무렵 적의 공세가 치열할 때 수도사단 제1연대(연대장 한신 중령)는 적에게 완전 포위된 상태에서 3일간 진지를 사수한 기록을 세웠다.

▲ 앞줄 오른쪽부터 김백일, 채병덕, 정일권, 황헌친 장군.

5년 단기간에 각급 야전군 지휘관

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위원 남정옥 박사는 김백일 장군이 5년간이란 짧은 기간 복무하면서 각급 지휘관과 최고위 야전군 사령관으로 활약하여 군 원로들의 회고록마다 고인을 회고하는 대목이 나온다고 밝혔다. 실로 기록을 분석하면 고인은 단기간에 국군의 최고 경력을 거쳤고 정규군, 비정규군 전투도 고루 경험했다.
장군은 연대장에서부터 군단장까지 지휘관을 거쳤지만 이보다 앞서 공비토벌사령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옹진지구 전투사령관 등으로 비정규전, 게릴라전도 지휘했던 것이다.
또한 장군은 국군의 인재를 발굴, 양성하는데도 큰 공적을 남긴 것으로 평가된다. 초기 제3연대장 시절에 소대장 요원으로 발탁한 김종오, 이한림, 정래혁 소위 등이 모두 대한민국 국군고위 지휘관으로 큰 역할을 맡았다. 또 육사과장 시절에는 민기식 소령을 발탁했고 옹진지구 전투사령관 때는 참모장 강영훈 대령(전 국무총리), 임충식 중령(국방부장관) 등과 호흡을 같이 했다.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때는 공국진 소령을 참모장으로 발탁, 작전통으로 육성했다.
김 장군이 3사단장으로 가면서 공 중령을 참모장으로 데리고 갔고 다시 육본 참모부장으로 전출할 때도 공 중령이 육본 군수국 차장으로 영전했다. 그 뒤 김 장군이 1군단장으로 공 중령을 작전참모로 불러 1951년 3월 30일에 취임했다. 그러나 김 장군은 공 참모가 부임하기 이틀 전에 비행기 사고로 순직하고 말았다.
김백일 장군이 인정했던 후배 장군들은 대다수가 육군대장에 참모총장, 국방부장관 등을 역임했다. 이를 보면 김 장군이 순직하지 않았다면 4성장군에 육참총장을 역임하지 않았겠느냐고 예상할 수 있는 것이다.

배병휴 [이코노미톡뉴스 회장]  econotalki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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