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증명의 초기 대응 중요

[이코노미톡뉴스=고윤기 칼럼] 나는 재판, 기업의 법률자문 혹은 강의를 하기 위해서 전국을 돌아다닌다. 위로는 경기도 파주부터 아래로는 제주까지 안다니는 곳이 없다. 전국 법원을 돌아다니다 보니, 재판 시간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시간도 많다. 나는 변호사 초년생 때, 선배로부터 내 사건 보다 먼저 재판정에 들어가서 재판장의 재판진행 스타일을 확인하도록 교육받았다. 재판 대기 시간에는 항상 앞선 사건을 보면서, 재판장의 재판 진행을 지켜본다. 특히, 법관 인사 이동이 있은 후에는 꼭 변론시간 전에 미리 가서 재판장이 변론 진행을 어떻게 하는지 살펴본다. 물론 나도 회사의 후배들을 그렇게 교육하고 있다.

사망한 아버지가 남긴 채무 방치

그날 내 앞의 재판은 상속과 관련된 사건이었다. 아버지는 아이들이 어릴 때 부인과 이혼하고 따로 오래 살았다. 아버지와 아이들은 어린 시절에는 연락이 없다가,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나서야 몇 번 만난 것이 인연의 전부였다. 아버지는 예전에 사업을 하다 실패를 했고, 그 이후로 수년을 일용직 노동자로 지내다가 객사했다. 아이들은 아버지의 장례를 치렀고, 아버지에 대한 일들은 완전히 잊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은 내용증명을 한통 받게 되었다. 그 내용증명에는 아버지의 채무가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아이들은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그 서류를 방치했다. 그 이후에 채권자로부터 소장이 날라 왔고, 형제는 법정에 서게 되었다.

상속포기, 후순위 상속인까지 합의

보통 돌아가신 아버지의 빚이 너무 많다면, 상속 포기를 해야 한다. 그런데 상속포기는 상속개시 후(피상속인 사망 후) 3개월 동안만 가능하다. 더구나 상속포기를 할 경우 후순위 상속인들에게 빚이 승계되기 때문에 상속 관련인들을 전부 모아서 한 번에 상속포기를 해야 다른 사람이 피해를 입지 않는다. 1순위 상속인인 나만 상속포기를 한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잘못하면 후순위 상속인들이 내 아버지의 빚을 떠안게 되고, 원망을 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상속한정승인’이라는 제도를 이용한다. 한정승인은 말 그대로 물려받은 만큼만 빚을 갚겠다는 것이다. 채권 목록을 작성해서 신문에 공고하는 등 좀 번잡하기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고 자신의 부모의 채무 상황을 후순위 상속인들에게 알릴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많이 이용된다. 이 한정승인도 상속개시 후 3개월 이내에 해야 한다.

민법 ‘특별 한정승인’ 제도

그렇다면 아버지의 빚을 모르고 있는 상태에서 상속포기나 한정승인을 못하고 3개월의 기간이 지나버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러한 경우 때문에 우리 민법은 ‘특별한정승인’이라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 상속인이 상속채무가 물려받은 재산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중대한 과실 없이 알지 못한 경우에 그 사실을 안 날부터 3개월 이내에 한정승인을 할 수 있는 제도이다.
사실 위의 사건도 형제들이 내용증명을 받고 나서 특별한정승인을 하였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사안이다. 그런데 형제들은 이 특별한정승인 기간을 지나쳤고, 졸지에 아버지의 거액의 채무를 떠안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두 형제는 아직 변변한 수입이 없는 것으로 보였고, 뒤에서 보기에도 정말 딱한 상황이었다. 사실 판결로 간다면, 재판장은 두 형제에 대한 패소판결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재판장이 원고에게 말했다. “두 청년의 처지가 좀 딱합니다. 제 생각에는 적절하게 조정을 했으면 합니다. 피고들이 돈이 없으니, 돈을 벌 때까지 3년 정도 채무를 유예해 주시고 그 이후에 월 100만원 씩 2년만 받는 것으로 채무를 줄여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원고가 머뭇거리자 재판장이 다시 말했다. “아들 벌 되는 아이들 아닙니까? 원고도 승소해봤자 모든 돈을 받을 수 없다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자 원고가 “그럼 그 정도로 양보하겠습니다.”라고 말했고, 재판장은 그 내용으로 그 자리에서 조정을 완료했다.
생각보다 법원에서 온 통지나 내용증명을 소홀히 해서 법률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이 사건도 처음 서류를 받았을 때 미리 조치를 취했다면, 간단히 해결되었을 문제이다. 이 사례는 재판장이 조정을 권유하여 적절히 끝났지만, 원고가 계속 조정을 거부한다면 피고 패소가 선고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법률분쟁에서 적시에 대응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필자소개> 고윤기

-고윤기 변호사는 사법시험(사법연수원 39기)을 합격한 연세대 출신으로 서울지방변호사회 사업, 기획, 인권이사를 역임했다. 서울동부지방검찰청 형사조정위원회 위원과 서울시 소비자정책위원 등 다양한 공적 활동을 겸하고 있다.

이코노미톡뉴스, ECONOMYTALK

(이톡뉴스는 여러분의 제보·제안 및 내용수정 요청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pr@economytalk.kr 로 보내주세요. 감사합니다.
저작권자 © 이코노미톡뉴스(시대정신 시대정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