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김천 산악지대 인접, 표적우려
북의 무제한 도발상황 외면 아쉬워

▲ 1950년, 6.25동란시, 맥아더 총사령관이 수원 근교 전선을 방문 반격작전을 지휘하고 있다. <사진=국가기록원>

추풍령 고개 넘어 내 고향 아담한 도농(都農)도시 김천(金泉), 벌써 출향 50년이 훨씬 넘었지만 고향 산천초목 어느 것 하나 그립지 않은 것이 있을손가. 지금은 나이 들어 기억이 가물가물 하지만 김일성의 남침 6.25 전쟁 때 고향 참상은 너무나 끔직했다. 그때를 회상하면 최근 북핵·미사일 도발 대응 성주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김천시민 투위의 목소리가 여전히 높다니 안타깝고 유감스럽다는 소감을 숨길 수 없다.

성주 사드반대 주민과 김천 주민

[이코노미톡뉴스=배병휴 회장] 문재인 정부가 발탁한 서주석 국방부 차관이 지난 달 27일 성주 주민들을 만나 “사드 배치관련 환경영향평가 과정에 반드시 주민대표들을 참여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사드 반대 주민투위 측에서는 서 차관이 “전 정권의 일방적인 사드배치 결정으로 주민들에게 피해를 끼친 점을 사과했다”고 밝혔다. 이어 사드배치 관련 한미 간의 합의과정, 발사대의 반입·설치 등 전 과정의 진상조사와 공개 및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노라고 주장했다.
이 같은 기사를 읽으면서 “북의 미사일 도발 대응 방어시스템 구축마저 각종 시민단체와 반정부 투쟁세력이 참여하고 있는 촛불민심의 동의절차를 거쳐야 한다는 말이냐”는 탄식이 나온다. 서 차관은 곧이어 일정을 잡아 김천 반대투위 사람들을 면담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때 내 고향 김천사람들이 어떤 응답을 내놓을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다만 6.25 때 참상을 겪은 김천 노후세대들이라면 사드배치를 아무도 반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과정을 통해 반 사드 방침을 확고한 신념처럼 강조해 왔었지만 트럼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위해 출국하기에 앞서 “사드 배치는 전 정권에서 결정했지만 결코 가볍게 생각 않는다”, “철회하지는 않는다”는 입장을 되풀이해서 발표했다. 반면에 추미애 민주당 대표는 “외교실패는 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면서 사드 배치가 미·중 갈등을 조장하고 남북한 오해를 불러 전쟁위험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로 반 사드 방침을 거듭 강조함으로써 대조를 이뤘다.

소련·중공·김일성 전쟁준비, 서울은 무사태평

언론인 출신 남시욱 교수의 ‘6.25 전쟁과 미국’(2015.5, 청미디어)에 따르면 김일성이 소·중공을 움직여 남침전쟁을 서둘고 있을 때 대한민국 정부와 군부는 북의 대남 도발이 상투적인 버릇이라고 해석하고 태평세월로 소일했다.
1950년 4월 모스크바, 김일성이 박헌영과 함께 스탈린을 만나 3차례나 비밀회담 끝에 남침작전계획에 합의했다. 1950년 5월 베이징, 김일성이 모택동을 만나 스탈린이 무력통일계획을 승인했노라고 보고하자 ‘항미원조’(抗美援朝) 명목으로 전쟁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다.
1950년 6월 평양, 김일성의 모스크바 방문 2개월, 베이징 방문 1개월을 맞아 소련대사 슈티코프가 모스크바에 남침공격 개시 일을 6월 25일 새벽으로 결정했다고 보고했다. 북측은 6월 7일 위장평화 공세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남북한 전국 사회단체 협의회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터무니없는 제의를 남측이 거부하자 다시 평양방송을 통해 북에 억류된 조만식(曺晩植)과 남측에 수감된 김삼룡(金三龍), 이주하(李舟河)를 교환하자고 제의했다. 또 남침준비 막바지인 6월 19일에는 김일성이 최고인민회의에 참석, 남측 국회와 합동으로 평화통일을 협의하자는 위장 평화공세를 펼쳤다.
이에 반해 1950년 6월 25일 서울은 인민군이 38선을 돌파한 시각에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이 전날 용산 육군장교 구락부 개관기념 파티에 만취한 채로 쿨쿨 자고 있었다. 국군통수권자인 이승만 대통령은 9시 30분, 경복궁 경회루에서 낚시를 하고 있다가 신성모 국방장관의 긴급보고로 남침사실을 듣고 경무대로 돌아갔다.
이미 개성이 인민군에게 함락되고 북의 야크기가 김포와 여의도 상공을 정찰하고 용산 일대를 기총소사로 제압하고 있던 시각이었다.

11시가 되자 평양방송은 “남조선이 무력으로 침공하여 조국해방전쟁이 시작됐다”는 허위 선전 나팔을 불어댔다. 하오 2시에야 경무대서 임시 국무회의가 열렸지만 이때도 신성모 국방은 “국군이 의정부를 탈환하고 곧 반격을 개시한다”는 허위 전황을 보고했지만 참석자들은 이를 박수로 환영했으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그러나 이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전쟁지휘는 기민하고 확고했다. 무초 미국대사가 경무대를 방문하자 이 대통령은 소총과 탄약의 즉각 긴급원조를 당부하고 장면 주미대사를 전화로 불러 즉각 백악관으로 달려가 군사지원을 요청토록 지시했다. 이어 도쿄 맥아더 사령부로 전화하여 맥 장군을 깨워 북한 공산군의 침략을 빨리 저지시켜야 하지 않느냐고 촉구했다.
미국 에티슨 국무장관은 주말 농장에서 휴식 중에 무초 주한대사로부터 긴급보고를 받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고하고 유엔 안보리 소집, 미국 참전 결정,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 임명 등 미국정부의 긴급대응으로 김일성의 침략전쟁을 격퇴시킨 것으로 요약된다.

▲ "트루먼 대통령(오른쪽)-맥아더 장군(왼쪽)-무초 주한 미국대사(John J. Muccio)" 회담 모습@1950년 10월 14일. <사진=트루먼도서관>

6.25 참전 언론인, 종군기자들의 수기

(사)대한언론인회 발간 6.25 참전 언론인들의 수기가 ‘우리는 이렇게 나라를 지켰다’(2013.8)이다. 이 증언록 속에 참전 언론인 23명의 전투기록과 종군기자 10명의 전투종군 기록이 실려 있다.
6.25 발발 당시 고등학생 또는 대학 1학년생 가운데 학도병으로 지원하여 군번도 계급도 없이 전투에 참가했다가 이름 없는 ‘무명용사’로 전사한 경우도 많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참전 언론인이란 이중 격전 속에서 살아남은 학도병들이 낙동강전선 사수를 위한 ‘다부동전투’, ‘안강전투’ 등에 참가하고 북진 대열을 따라 평양점령 작전에도 참가했던 용사들의 체험기록이다.
이들 참전 학도병들이 정전 후 언론계로 투신하여 (사)대한언론인회 내에 6.25 참전 언론인회를 구성하고 있다. 참전언론인회 박기병 회장은 6.25 당시 춘천사범 3학년 졸업반으로 교복을 입은 채 포병 16대대에 포탄을 날라주다 현지입대하여 백병전에도 참가한 역전의 용사이다.

6.25 종군기자들은 국방부가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등의 취재 보도 편의를 위해 국방부 출입기자들을 대상으로 육사에 파견 단기훈련을 통해 종군기자로 양성했다. 종군기자들은 6.25 당일은 물론 부산 피난시절과 인천상륙작전 성공 이후 수도서울 회복 및 평양 진입, 압록강변 진출 및 1.4 후퇴 등을 종군 취재 보도했다.
그러나 6.25 초기까지 군 당국자들은 북의 남침정보를 믿지 않고 침략하면 즉각 반격한다는 허세에 젖어 있었다는 사실을 비판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동양통신 편집국장을 지낸 종군기자 이지웅(李志雄) 씨는 6.25 당일 온양 인근 육군부대의 모내기 일손돕기를 취재하러 갔다가 남침 소식을 듣고 급거 귀경, 종군했었다. 이때 상경 열차 속에서 이 기자가 군 고위 장교를 만나 인민군의 남침을 심각하게 걱정하자 평소의 나태한 고정관념 그대로 “북이 침략하면 즉각 반격할 수 있다”면서 오히려 핀잔을 주더라고 증언했다.
이렇게 군 내부가 북의 남침태세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무사태평한 자세로 일관한 것이 6.25를 불러들인 이유가 아니겠느냐고 보는 것이다.

CIA 대장 니콜스의 종횡무진 첩보전

6.25 전쟁기간 중 한반도 첩보왕으로 불린 미 CIA 도널드 니콜스의 활약상을 그린 ‘한미연합 첩보전 6006’(최금산 장편소설, 2016.7 경지출판사)도 김일성의 남침전쟁에 대해 한국정부와 군부가 지나치게 무감각했음을 지적한 대목이 많이 나온다. 이 기록물은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한국인 첩보대원 김인호 씨의 증언실록 성격이다.
CIA 첩보대장 니콜스는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서 상사 계급으로 파견되어 전쟁 중에 소령, 대령으로 승진, 퇴역했다.
니콜스 첩보대는 남북 간 왕래가 자유로울 때 평북 선천지역에 비밀 감청부대를 가동시켜 김일성의 대남 테러첩보를 수집, 대응하기도 했다. 북측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10 총선거를 방해하고자 5.14 단전(斷電)조치로 전기공급을 중단하고 영월화력 파괴를 남로당에게 지령했다. 니콜스 첩보대가 이를 탐지하여 사전에 병력을 배치토록 권고하여 파괴공작을 분쇄함으로써 이승만 대통령이 전화로 감사를 표시했다.

니콜스는 평양에도 군과 민간 휴민트를 가동시켜 남침정보를 수집, 맥아더 사령부에 수시로 보고했다. 니콜스는 자신이 직접 평양을 방문, 탐색하겠다고 나섰다. 이승만 대통령이 위험하다고 만류하자 “호랑이를 잡자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는 한국의 속담을 인용하여 묵인 받을 수 있었다.
니콜스는 키 194cm, 체중 140kg의 거구로 금방 눈에 띄는 것이 문제였다. 이에 따라 급히 체중과 키가 유사한 미국인 4명을 선발, ‘5명의 니콜스’가 평양으로 잠입했다. 당시 평양에는 소련 베리아 경찰이 파견한 첩보원과 김일성의 첩보조직이 니콜스의 존재를 파악하고 미행하고 있었다. 니콜스는 이를 의식하면서 5명의 ‘유사 니콜스’팀이 교차 작전으로 김일성과 남일 중장의 동태를 집중 관찰했다.
미국 구호품을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분배할 때 김일성이 참석하여 미 제국주의자가 어쩌구 저쩌구 하면서 비난하는 연설을 할 때 니콜스가 멀리서 지령했다. 민간인 휴민트 강창옥(여인)에게 녹음기, 난수표, 달러화 등을 전달하기 위해 밀가루 포대를 나르던 첩보대원이 일부러 넘어지면서 밀가루 난장판을 만들어 내도록 연출했다.
서울로 돌아온 니콜스가 김일성의 남침첩보를 확인하고 일본으로 한반도, 만주, 대만, 연해주 일대 5만분의 1 지도 각 2만부씩을 주문하여 대방동 공군첩보부대 사무실에 보관했다. 이 지도가 6.25 전쟁 작전용으로 요긴하게 활용됐다.
또 북측 스파이가 수시로 들락거리는 임진강과 한강수로 측정을 위해 도쿄 사령부를 설득하여 예산을 확보한 후 한국군 방첩대장 김창룡 장군을 통해 수로작업 인부들을 제공받았다. 이때 ‘정치깡패’ 혐의로 영창에 갇혀 있던 김두한, 이성순, 이정재, 유지광, 임화수, 신정식 등 6명이 출감하여 수로측정 노역을 잘 담당했노라고 한다.

▲ 1950년 6월 25일에는 브라질 월드컵 개막식이 열렸다. <사진=fifa.com>

브라질월드컵 개막날 인민군 서울침공

1950년 6월 25일 새벽 브라질 월드컵이 개막되어 잉글랜드와 칠레가 축구 개막전을 벌여 잉글랜드가 2 대 0으로 승리했다. 같은 시각에 김일성의 T-34 탱크가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지만 FIFA 줄리메 회장은 브라질 월드컵을 ‘세계평화의 제전’이라고 선포한 후 축구 개막전을 관람하고 있었다. 전반전이 끝났을 때 줄리메 회장은 김일성의 남침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듣고 놀랐다.
김일성의 준비된 남침은 3일 만에 수도서울을 점령하고 잠시 대기하고 있다가 한강을 건너 남행하여 낙동강전선에서 대한민국 운명을 압박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함으로써 전세를 역전시켰다가 다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1.4 후퇴를 거쳐 반격 중에 정전회담으로 휴전이 성립됐다.

정전회담 소식이 전해지자 첩보대는 ‘정전은 곧 실업’이 아니냐며 동요했다. 니콜스는 첩보활동기간 중의 보수와 보상금 등에 관해 상부에 문의했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반면에 김일성은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지정, 관철시키도록 지령했다. 김일성은 “이승만이 개성과 연백평야, 철원평야 등을 먹고 서해 섬들도 먹으려고 노린다. 동쪽으로 고성, 설악산을 주더라도 이들 평야지대를 확보토록 판문점 회담을 관철하라”고 지시한 것이다.
이에 니콜스는 교동도, 말도, 주문도 등으로 첩보 요원들을 이동시켜 개성폭격을 위한 비밀훈련을 실시했다가 헬기편으로 50여명을 개성시 송곡리에 투입,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정전회담장을 폭격하기도 했다. 이 결과 정전회담을 얼마간 지연시키는 작용을 했지만 첩보대원들의 사후보상 대책은 마련할 수 없었다고 증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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