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핵놀음 기고만장
대통령이 다시 전쟁은 없다고 했지만…

▲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지난 7월 28일 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참관한 가운데 대륙간 탄도미사일급 '화성-14'형 미사일 2차 시험발사를 실시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채널A 뉴스캡쳐 20160920>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시절 “미국을 향해 ‘노’라고 말할 수 있는 대통령이 되겠다”고 말했다. 또 “미국보다 북한을 먼저 방문할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러나 실제 대통령이 된 후에는 미국을 먼저 방문했다.
북한에 대해서는 군사회담과 적십자사회담을 제의했지만 북으로부터 ICBM 발사시험 응답을 받았을 뿐이다.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을 보라

[김동길 박사 @이코노미톡뉴스]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은 유엔 안보리가 대북 제재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지만 기(氣)가 죽기는커녕 오히려 기고만장한 꼴이다. 그는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기까지 ICBM을 발사하고 미국 워싱턴까지 초토화 시킬 수 있다고 위협한다. 이 때문에 한반도를 둘러싼 전쟁위험론이 나오더니 미국과 중국 간에 북핵 동결을 위해 주한미군 철수론까지 나오니 행여 한국정부를 배제한 미국과 중국, 미국과 북한 간 어떤 거래가 벌어지지 않느냐는 우려마저 제기된다.
이와 관련 문재인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지만 김정은의 핵과 미사일 놀음이 어디까지 갈는지는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 아닌가.

▲ 2016 RIMPAC 훈련에 참가한 우리해군 세종대왕함의 실사격 모습. <사진=해군>

일단 전쟁이 터지면 지구멸망

일단 전쟁이 터지면 지구 멸망의 날이 온다. 1945년 8월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군 B29기가 원폭을 투하하여 수십만 명의 죄 없는 목숨이 사라지고 마침내 일본은 항복하여 태평양 전쟁이 끝났다.
세계 정복의 야망에 불타던 소련과 이를 억제하려던 미국 사이에 옥신각신이 한동안 요란하더니 드디어 소련의 사주를 받은 북의 김일성이 1950년 6월 남침을 감행하여 한국 전쟁이 시작되었다.
철수했던 미군이 트루만 대통령의 명령으로 다시 한반도에 진주하여, 유엔군은 일단 그 침략은 물리쳤으나 한반도의 민주화 통일을 두려워하던 모택동의 중공군이 참전하여 남하함으로 또 다시 서울이 침략자의 수중에 들어갔다. 그 전쟁이 휴전이라는 명목으로 일단 끝이 난 것이 1953년 7월의 일이었다.
이 전쟁으로 한국인이 겪은 곤욕과 희생은 말로 다하기 어렵지만 미국의 젊은이들도 5만 이상 이 전쟁으로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 10만여, 행방불명자도 8천이 넘었다.

당시의 한국 대통령 이승만은 미군의 철수를 앞장서서 반대했고 국민의 마음도 한결같았다. 당시 주한 미 대사이던 무치오는 미 철군을 앞두고 “미군이 철수해도 인민군의 남침은 없을 것이다”는 성명서를 발표했지만 미군의 한반도 철수가 6.25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또 다시 ‘주한 미군 철수’를 부르짖는 자들은 예외 없이 대한민국의 존재 이유를 과소평가하는 동시에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바라는 천치바보들이다. 그런 자들을 ‘진보’로 치부하고 앞세우는 자들도 따지고 보면 정신박약아들이다.

미국도 중국도 핵무기를 만들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제3차 세계대전이 터지기는 어렵고 또 다시 냉전 시대가 찾아올 가능성은 농후하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 판국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말실수를 한 마디 하면 예기치 못했던 비상 상태가 벌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한국의 지도층 인사들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일단 핵전쟁이 터지면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다 죽어야 한다.

평창동 꼭대기의 생일잔치

평창동 일대가 험한 산기슭인 줄만 알다가 평창동에 사는 김형국 교수 댁에 초대 받아 ‘대구 잔치’에 감동한 것은 혹독하게 추운 어느 겨울날 저녁이었다. 나는 평안도 맹산 산골에 태어나 거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한 평생, 동지섣달에도 내복을 입은 적이 없는데 내가 김 교수 댁에 초대 받아 평창동을 찾았던 그 저녁은 차디찬 바람이 내 바짓가랑이에도 사정없이 밀려오는데 정말 견디기 어려웠다.
그러나 엊그제 그의 생일잔치에 갔을 때에는 입추를 지나기는 했지만 여전히 더운 날이었으나 평창동 언덕의 바람은 시원했다. 이 댁의 관례가 겨울에는 ‘대구 잔치’ 여름에는 ‘민어 잔치’여서, 이 댁의 마담이자 ‘메가미’(女將)인 김외련 여사는 생선 요리를 가지고 우뚝 섰습니다. 왜? 그런 생선 요리를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대접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식당 방이 좁아서 네 사람 이상이 초대되기는 어렵다. 주인 내외를 합치면 여섯이 되는데 최명 교수 내외, 김혜선 교수, 그리고 ‘나’ - 초대 손님은 넷인데, 나를 빼고는 다 서울대학 출신이고 한 분만이 경희대학에서 정년퇴임했고 두 남자 교수는 다 서울대학에서 나이 때문에 밀려난,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아직도 새파랗게 젊은, 쟁쟁한 교수들이다.
큰 접시에 민어회가 껍질까지 나오는데 정말 그 맛은 별미였다. 화려한 회 접시에는 서너 가지의 꽃송이가 함께 있어서, 안주인의 예술적 감각과 취향을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다음엔 민어전 그리고 마지막이 민어국과 밥 한 공기! 그 맛은 붓으로는 다 표현하기 어렵다고 느꼈다.
김형국의 생일은 오늘이라지만 오늘이 일요일이라 엊그제 모임을 가졌다. 최명 교수를 집집마다 초대하고 싶어 하는 까닭은 (특히 안주인들이) 식사가 끝나면 자진해서 그 집 부엌으로 가서 접시를 다 닦아 준다니 싫어할 사람이 누구입니까? 또 접시를 닦으면서 부르는 ‘이순신 장군의 노래’도 들어봤는데, 접시도 보통 수법으로 닦지 않고 ‘이순신 전법’으로 닦는다니 입이 딱 벌어진다.

김혜선 교수는 피아노 전공이지만 최 교수나 김 교수는 인문학 전공이라 이 시대의 저명한 논객들이기도 하다. 나는 양심이 살아있고 명망이 자자한 후배이자 동지인 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인생의 석양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이보오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이보오 저 늙은이 짐 벗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인들 무거우랴
늙기도 서러워라커든 짐을 조차 지실까

열 살이 좀 넘어 암송한 이 시조 한수는 내가 90까지 사는 동안 줄곧 나와 함께 있었다. 내용이 하도 쉬워서 세월을 기다리지 않고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오늘 아침 혼자 일어나 앉아 이 시조를 되새겨 보니 감개가 더욱 무량하다.
나와는 상관없는 ‘노인들’에 대한 당부라고만 알고 그 시조를 읊조렸는데 ‘저 늙은이’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약간 무안하다. 이런 날이 올 것을 전혀 모르고 젊음을 자랑하던 그 날들이 다 가고 이제는 정말 초라한 노인이다.

무겁건 가볍건 짐을 질 생각은 전혀 하지도 못한다. 옛날엔 나도 뛰어다녔는데 오늘 뛰어다니는 젊은이들을 보면 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성기바람 불기 시작하는 가을의 문턱에 서서 나는 제대로 걷기도 어려운데! 뛰어다닌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월이 하는 일을 어찌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 자주 하는 말이지만, 세월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 그런 사실들을 받아들이는 아량이 노인들에게는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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