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W. 그리피스 감독, 1921년 미국 작품
릴리언 기쉬, 도로시 기쉬, 조지프 쉴드크라우트

▲ "폭풍속의 자매들(1921)"

[박윤행 칼럼 @이코노미톡뉴스] 영화를 발명한 것은 에디슨과 프랑스의 뤼미에르형제지만, 오늘날까지 영화제작에 사용되는 주요한 영화적 기법들-쇼트를 롱숏, 미디엄숏, 클로즈업으로 나누어 영화언어를 창안하고, 교차편집을 통해 영화문법을 완성하여 흔히 ‘영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D.W.그리피스는 미국 초창기 무성영화시대를 이끌어온 위대한 감독이자 제작자이다.영화가 발명된 3년 후인 1908년 영화계에 뛰어들어 2분짜리 토막영화부터 15분짜리 단편영화까지 30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낸 그리피스는 1915년 드디어 세 시간짜리 대작 <국가의 탄생>과 1916년 네 시간짜리 장편 <불관용>을 발표하여 영화사에 불후의 금자탑을 쌓게 되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만든 장엄한 역사 멜로드라마가 이 작품이다.
무릇 영화산업에 종사하는 영화인은 물론이고, 영화를 사랑하는 전 세계의 영화팬들은 D.W.그리피스라는 위대한 영화인을 기억하고 그에게 감사해야할 것이다.

프랑스혁명이 발발하기 몇 년 전. 평민과 비밀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은 귀족가문의 여인이 가문의 손에 남편은 살해당하고 딸을 빼앗기게 되자, 아기의 목에 ‘루이즈’란 이름이 적힌 펜던트를 달아준다.
루이즈는 추운겨울날 성당 앞에 버려지는데, 가난 때문에 자기 아기 ‘앙리에트’를 성당 앞에 버리러 갔던 ‘지라르’는 버려져 울고 있는 아기를 보고 연민을 느껴 오히려 집으로 데려와 함께 키운다.
루이즈의 옷 속에 넣어준 금화 덕분에 비교적 여유 있게 성장하게 된 두 아기는 친 자매처럼 가깝게 지낸다.
가문의 강압으로 경찰청장 리니에르백작과 결혼한 루이즈의 모친은 그에게 과거를 숨기고 살지만, 빼앗긴 루이즈를 한시도 잊지 못한다.

▲시력을 잃은 루이즈 ▲앙리에트 유괴되고

당시 프랑스는 빈부의 차이가 극도로 심해 귀족들은 한없는 부를 누리고, 서민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며 인간이하의 삶을 살고 있었다. 전염병이 돌면서 앙리에트의 부모가 사망하고, 루이즈 마저 시력을 잃게 되자, 파리에 가면 눈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으로 두 고아소녀는 파리로 떠난다.
도중에 만난 간악한 프레이유 후작은 앙리에트의 청순한 미모에 반해 자신의 부하들에게 그녀를 납치해오게 하고,  홀로 남겨진 루이즈는 거지어멈에게 끌려가 자매는 헤어지게 된다.
온갖 사치와 방종으로 가득한 프레이유 후작의 귀족놀이에 이끌려온 앙리에트는 귀족 청년 ‘보드레이’의 도움으로 저택을 벗어나 사방팔방으로 루이즈의 행방을 알아보고 다니지만 찾을 길이 없고, 못된 거지어멈에게 끌려간 눈먼 루이즈는 그녀의 강요로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구걸을 한다.

▲노래하며 구걸하는 루이즈  ▲"루이즈의 목소리야"

보드레이는 왕명으로 공주와의 결혼을 제안 받았지만,   앙리에트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거부했다가 감옥에 가게 된다. 이제는 백작부인이 된 루이즈의 친모는 보드레이의 숙모로 앙리에트를 찾아와 그와의 결혼을 단념하도록 설득하다가 우연히 루이즈가 앙리에트의 자매로 살아온 사실과 지금 파리에서 헤어져 찾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망연자실한다.
그때 루이즈가 거지어멈에게 이끌려 앙리에트의 이층집 앞으로 노래를 부르며 다가온다.
루이즈의 노래임을 알아챈 앙리에트는 “지금 무슨 노래 소리가 들리지 않나요?” 귀 기울이던 부인 “아니, 난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그때는 루이즈가 노래를 멈췄을 때이다. “그렇군요 너무나 루이즈를 생각하다가 내가 환청을 듣나봐요” 다시 노래를 시작한 루이즈가 밖의 길을 지나간다.
“아니 정말 루이즈의 노래가 맞아요” 앙리에트는 이층 발코니로 뛰어나가 길에 있는 루이즈를 발견하고 소리친다. “루이즈! 루이즈!” 앙리에트가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눈먼 루이즈도 “앙리에트”하고 마주 소리친다.
앙리에트는 “기다려 내가 내려갈게” 미친듯이 아래로 뛰어내려가려하는데 백작이 보낸 병사들이 가로막고 앙리에트를 체포한다. 보드레이의 삼촌인 백작이 두 사람 사이를 떼어놓으려는 것이다.
앙리에트는 병사들의 가슴을 마구 치면서 루이즈를 찾아내려가려 하지만 역부족, 결국 병사들에게 끌려가고 루이즈도 다시 거지어멈에게 끌려간다.
이대목이 바로 이영화의 백미로 유성영화 보다도 소리가 없는 무성영화라는 것이 오히려 이 장면을 더욱 극적으로 이끈다.
오직 표정과 몸짓만이 말과 소리를 대신하면서 두 자매의 간절하고도 안타까운 심정을 폭풍처럼 영상에 쏟아낸다.

▲형장으로 가면서 ▲최후의 순간의 구원

앙리에트는 감옥에 갇히지만 곧 대혁명이 발발하고, 시민군이 바스티유감옥을 습격하고 장악하자 풀려난다.
왕당파와 시민군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다. G.W.그리피스 감독은 4:3의 화면비율을 최대한 넓게 확장하려는 시도로 위, 아래를 마트로 가려 거의 16:9의 화면비율을 만들어내는 천재성을 보인다.
감옥에 갔던 보드레이도 탈출, 평민으로 위장을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파리로 돌아와 앙리에트와 기쁘게 재회하지만, 혁명 중에 검사로 신분상승을 한 소작농에 들켜 둘 다 혁명재판에 회부된다.
루이즈는 착한 피에르의 도움으로 거지어멈의 소굴에서 빠져나와 우연히 재판정에 오게 되었는데, 재판을 받던 앙리에트가 발견하고 함께 눈물의 재회를 하지만, 보드레이에 이어 앙리에트도 길로틴 처형을 선고받는다.
앙리에트는 루이즈가 장님으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호소하지만, 막무가내로 마차에 실려 길로틴으로 끌려간다. 문 앞에서 앙리에트를 발견한 당통(과거 앙리에트의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은 “사랑과 증오는 오랜 세월 다퉈왔소. 자비와 사랑만이 이 고통 받는 나라를 구원할 것이요” 하며 두 사람의 사면을 청원한다.
방청석의 압도적 성원으로 사면장을 받아든 당통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들을 구하기 위해 눈썹 휘날리며 말을 몰아 처형장으로 향한다. 차례가 되어 길로틴으로 오르는 앙리에트. 처형대에 묶였을 때 보다 못한 착한 피에르가 막난이의 등을 찌르고 소동으로 처형이 잠시 지연된다.

▲다시 찾은 행복

다시 형이 집행되려는 찰나 소위 ‘최후의 구원’으로 잘 알려진 대로 당통이 도착해 형을 중지시키고, 사면장을 내보여 앙리에트와 보드레이를 석방한다.
혁명이 종식되고 루이즈는 의사의 시술로 시력을 회복하고 앙리에트와 보드레이는 행복한 미래를 축복받으며 끝난다.

▲ 박윤행 전KBS PD, 파리특파원, 경주대 사진영상학과 교수 역임

당시 특권층 귀족들의 극에 달한 횡포와 사치를 서민들의 비참한 삶과 극명하게 대비시켜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소이연을 설명하면서, 인간성이 갖는 선과 악을 스펙터클하게 풀어나가는데, 온갖 간난과 시련을 겪고-심지어 단두대에서 처형을 기다리는 아슬아슬한-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멜로 드라마지만, 거의 백년 전 초창기 흑백 무성영화임에도, 두 시간 반 동안 전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G.W 그리피스감독의 탁월하고 담대한 역량에 새삼 경의를 표하게 되는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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