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녕 박사, 촌놈 뚝심 ‘ 공부에 미쳐’
KIST 시절 ㈜일진과 산학협동 결실 보람

▲ 서울대학교 1학년 시절, 공릉동 공대 1호관 앞에서.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 평생 연구에 몰두한 공학박사가 “공부 말고는 해본 것이 없다”면서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다. 서울대 교수로 40년 정년퇴임한 이동녕 박사는 미국서 박사가 됐을 때 모두가 귀국을 만류했지만 가난한 고국으로 돌아와 천직인 연구개발에 평생을 바친 것이 또한 행복이라고 말했다. 이 박사의 뚝심 애국심 이야기는 도서출판 행복에너지가 ‘나는 행복한 공학자’라는 제호로 출간했다. (2017. 7. 15)

‘함안촌놈’, ‘석.박사 140명 배출’ 행복 넘쳐

▲ 이동녕 박사

이동녕 박사는 서울대 공과대학 재료공학 교수로 정년때까지 공부에만 미쳐 석사 85명, 박사 55명을 길러 냈으니 큰 부자이자 대 행복가이다. 이박사는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촌놈’으로 어릴적에는 너무 가난했지만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아 너무 행복했었다고 말한다. 그의 고향 함안은 지리산 자락으로 8.15 해방 공간이나 6.25 전후 인근지역에 빨치산이 출몰하여 결코 평화로운 고장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동녕은 스스로 ‘함안 촌놈’이라 지칭하며 ‘촌놈 방식’대로 자라면서 서울 공대에 합격했노라고 자랑한다. 다만 공무원인 그의 부친이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돈을 빌리러 다닌 모습을 괴로운 사연으로 기억한다.

그뒤 함안 출신의 효성그룹 창업자인 조홍제(趙洪濟) 회장이 설립한 ‘영남장학회’의 장학생으로 선발되니 부모님의 걱정을 덜어 드리며 졸업했다. 이어 서울대 대학원으로 진학하여 금속공학을 계속 공부할 수 있었으니 이 또한 촌놈의 뚝심이었다고 주장한다.
대학 재학중에 대한민국 사나이의 필수 관문인 병역의무가 제기됐을 때 마침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원 공모가 있어 응시하여 합격했다. 그러나 기초 군사훈련 중에 5.16 혁명으로 국방과학연구소가 해체되고 육군기술연구소로 대체되는 바람에 육군본부 행정요원으로 복무했다. 제대말년에 이르렀을 때 최형섭(崔亨燮) 금속공학박사(나중에 과학기술처 장관)가 이끌고 있는 금속연료종합연구소 연구원으로 편입되어 평생 재료공학의 길로 접어들었으니 행운의 연속이었다는 결론이다.

▲ 밴더빌트 재학시절 실험실에서 이동녕 박사. (우)▲30년후 아내와 밴더빌트 대학본부 앞에서.

재료공학 박사학위 취득후 ‘애국심 귀국’

병역을 마친후 대학원에 진학했지만 금속공학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미국 유학이 불가피하다는 판단이었다. 해외 유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장학금을 물색하여 워싱턴 대학으로부터 월 300달러를 받기로 하고 손에는 달랑 32달러를 쥐고 미국으로 갔다. 이 장학금 가운데 30달러는 매월 집으로 우송했으니 유학하며 효도하는 ‘효심의 송금’이었다.

▲ 금속공학과 교수 재직시절 제자들과 함께한 이동녕 교수.

워싱턴 대학원서 금속공학 석사학위를 받은후 지도교수를 따라 미국 남부의 하버드로 불린 밴더빌트(Vanderbilt) 대학원에서 대망의 재료공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유학 4년3개월만의 박사학위였다.
더구나 워싱턴대 유학시절 부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들도 낳았으니 행운이 겹쳤다. 이 무렵 보잉사에 근무하는 서울공대 선배집에 ‘김치 얻어먹고 싶어’ 자주 갔다가 “너 장가 안가”라는 선배 말씀 따라 결혼할 수 있었다. 신부는 서울대 농대 졸업 후 농업진흥원에 다니다가 미국 테네시 대학원에 유학온 규수였다.
재료공학 이동녕 박사를 아끼는 지도교수가 “한국에는 연구환경이 미비하니 귀국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지만 스스로 귀국을 선택했다. 서울에는 최형섭 박사가 이끄는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가 곧 발족하게 되어 있었다.

이 무렵 박정희 대통령은 과학기술처를 신설하고 ‘재외두뇌유치’(在外頭腦誘致) 계획을 강력 추진했다. 미국에서 이공계 박사학위를 받은 인재들을 매우 좋은 처우로 유치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서울대 교수보다 3~5배의 급료와 넉넉한 연구비를 보장하고 고급 아파트와 자녀 학자금까지 지원하겠다는 조건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기계, 전자, 금속, 원자력, 선박 등 이공계 박사들이 속속 귀국하여 산업화와 자주국방의 기틀을 잡을 수 있었다.
또한 홍릉에 위치한 KIST는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이 공동 설립자로 발족한 한미동맹 차원의 최신 연구소였다. 한국군의 월남전 참전에 따른 군사원조 외에 박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에게 산업화를 위한 연구소 설립지원을 요청하여 설립된 것이다.

KIST와 일진 만나 ‘동복강선’ 산학협동

▲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

이동녕 박사가 KIST에서 연구활동에 분주할 때 서울공대 동문으로부터 금속공학과 2년 후배인 ㈜일진 허진규 사장을 소개받았다. 허사장은 ROTC 1기생으로 복무한 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변전용, 배전용 금구류 국산화에 착수한 벤처기업인이었다.
KIST 재료공학 연구진과 ㈜일진과의 첫 만남은 시장성이 확보된 ‘동복강선’ 개발성과로 나타났다. 이 박사 주도하에 KIST 3천만원, 일진 3천만원 도합 6천만원의 연구 프로젝트에 착수하여 2년만에 순수 국산기술에 의한 파이럿 플랜트에 이르렀으니 1단계의 성공이었다.
그러나 아직 산업화 단계가 남아 있는 와중에 일진이 참여한 중동 프로젝트가 낙찰됐으니 은행융자 받아 설비확충하고 장비도입하여 제작, 납품할 기간이 모자랐다. 불행중 다행으로 그해 여름 집중호우로 영등포 일대가 침수되어 일진 공장도 피해를 입었다. 이를 기회로 ‘재난에 의한 납기연기’를 요청하여 신용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진은 동복강선 국산화를 계기로 자회사 덕산금속(현 일진소재공업)을 설립, 첫해에 매출 89억원으로부터 1993년 256억원, 2004년 1,400억원 등으로 급성장했다. 반면에 KIST도 15년간이나 일진으로부터 상당한 기술료를 받았으니 산학협동의 큰 뜻을 살렸다.
이박사는 동복강선 연구가 파이럿 플랜트 단계이던 1974년 10월 서울공대로 옮겨 학교강의가 없는 날에는 KIST에서 연구를 계속했다. 당시 서울공대 조교수 월급은 KIST의 절반수준이었다. 연구비 규모도 KIST의 5분의 1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박사는 자유롭게 연구하고 제자들을 많이 길러낼 수 있는 ‘스승의 길’에서 더 큰 보람을 찾을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 일진금속공업사 노량진 공장에서 양평동 공장으로 확장 이전 (1968). (우)▲일진제강 심리스강관공장 준공식 (2012. 7)

이박사가 숱한 제자들을 자랑하지만 일진그룹과의 산학협동 관련 제자들로는 덕산금속 사장 김윤근 박사, 일진 다이아몬드 기술본부장 신택중 박사 등이 일진 장학금으로 공부했다고 소개한다. 또 운동권 학생으로 지목된 양점식이 석사학위를 받기까지 일진 장학금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이박사는 1987년 서울대 신소재 공동연구소를 설립, 초대 연구소장을 맡아 6년간 근속했다. 일진이 1,500평 규모의 이 연구소 건물을 1990년 7월에 준공, 기증했다. 이박사와 일진간의 산학협동 성공이 발판이었음은 물론이다. 서울대측은 연구소에 일진 허진규 회장 아호인 ‘덕명’ 기념관을 설치하여 감사의 뜻을 기록했다.

▲ 1995년 훌륭한 공대교수상 시상식에서 수상소감을 낭독하는 이동녕 박사.

가장 청빈하고 곧은 심지의 외곬

일진그룹 허진규 회장은 이동녕 박사의 ‘나는 행복한 공학자’ 출판기념 추천사를 통해 자신이 만난 가장 청빈하고 곧은 심지의 기술개발 외곬 학자가 바로 이박사라고 밝혔다. 허회장이 1970년초 30대 중반의 이박사를 처음 만났을 때 금속공학과 2년 선배인 그의 눈빛과 언행에서 기술개발의 열정, 신념을 읽었다고 말하고 미국서 박사학위 취득후 지도교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귀국을 고집하여 동복강선 국산화 기술을 개발했다고 소개했다.
허회장은 동복강선이란 이동녕 박사의 신념이 녹아있는 연구과제로 국내 전선회사들이 몇차례나 도전했지만 실패했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세계적으로 4개국이 독점하고 있는 이 기술의 국산화가 절실하다고 확신했기에 당시 일진의 회사 자본금과 맞먹는 3000만원을 투자했었다고 밝혔다.

허회장은 KIST와 일진 간 산업협동은 상호 신뢰 속에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 동복강선 국산화로 1970년대 농어촌 근대화 사업이 추진되고 이란에 500만 달러의 수출기록도 수립했노라고 강조했다. 또 허회장은 KIST의 홍보 동영상 첫머리에 ‘동복강선 개발에 빛나는 KIST’라는 표제를 읽을 때마다 이박사를 만나 기초연구에서 제품화와 해외수출에 이르는 산학협동 모델을 이룩한 보람을 느낀다는 소감을 밝혔다.
허회장은 이동녕 박사가 경남 함안 산촌 태생으로 미국 유학 재료공학 박사가 되고 자신은 전북 부안 농촌 출신으로 미국유학 대신에 산업전선에 나서 상호협동에 성공한 인연이 소중하다고 말했다.

일진그룹을 자수성가로 일으킨 허진규 회장은 ROTC 1기생 육군소위로 육본 병기감실에 복무하면서 총포류, 탄약, 차량 등의 국산화 현장을 참관할 기회가 많았던 엔지니어였다. 전역후 1968년 자신의 집 앞마당에 흑연 도가니를 설치하고 직원 2명과 함께 각종 금구류 국산화에 도전하고 있었다. 이어 정부가 전자공업 육성책을 추진하자 전자용 PCB 기판 일렉포일(Elecfoil), 공업용 합성 다이아몬드 소재 개발에도 착수했다.
공학도 출신인 허회장은 산업화 과정을 지켜보면서 남들이 손대지 않고 있는 분야에 주목하여 ‘공부밖에 해본 것이 없다’는 대학선배인 이박사를 만날 수 있었노라고 회상한다.

이동녕 박사는 정년 은퇴시까지 전문서적 22권을 저술하고 국내 논문 110편, 국제 학술지 논문 224편을 발표했고 발명특허도 10여건을 획득했다. 서울대 공대 금속공학교수 40년, 한국소성가공 학회장, 대한금속학회장을 역임했다. 허진규 회장은 여든 고령에 이른 이박사가 아직도 자신이 창립했던 서울대 신소재 공동연구소에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 고개가 절로 숙여지며 존경하게 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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