姜德基 전서울시장, 수상록 출판기념회
9급으로 출발, 부시장·시장직대 신화

‘강도끼식’, ‘임전무퇴식’.
서울시와 함께 40년
姜德基 전서울시장, 수상록 출판기념회.
9급으로 출발, 부시장·시장직대 신화.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이톡뉴스)] 서울시 9급 공무원으로 출발하여 부시장 두 차례 및 시장직무 대리까지 40년간 근속한 강덕기(姜德基) 전 시장의 수상록 ‘서울시와 함께한 나의 길’ 출판기념회가 9월 20일 서울 중구 퇴계로 동보성에서 열린다. 소림(笑林) 강 전 시장은 확고한 소신과 투철한 책임의식으로 각종 민원을 신속하게 처리한 ‘강렬한 공직자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바 있다.

영등포 제5동사무장 시절 ‘목불인견’

소림은 1958년 부산대 법대 졸업 후 서울시 지방공무원 채용시험을 거쳐 1959년 종로구청 임시 서기, 영등포구청 사회과, 1960년 주사 승진시험 합격, 1961년 군 입대, 1965년 복직으로 영등포 제5동 사무장으로 ‘서울시 행정 40년’ 장도에 올랐다.

동 사무장은 구호양곡 배급업무가 가장 시급하고 귀중했다. 어느 날 누구인가 전화로 여의도 비행장 철조망 가까이에 있는 “돼지우리에 한번 가보소”라고 일러주었다. 급히 달려가 보니 허기에 찌든 20여명이 빈 깡통을 들고 줄을 서서 돼지죽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마디로 ‘목불인견’(目不忍見)이었다.
돼지우리 주인에게 “왜 돼지죽을 사람들에게 팔고 있소”라고 물으니 “이거 아니면 당장 굶어 죽을 처지라 제발 팔라고 애원하니 어쩔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나마 돼지국도 모자라 3일에 한 번씩만 살 수 있도록 사전에 ‘판매전표’를 발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새파란 동사무소장 강덕기의 분노에 찬 ‘양말산과 돼지죽’ 이야기의 시작이다.
현 국회의사당을 중심으로 100여만 평의 모래섬이 여의도이고 가운데 30여 m 높이의 모래섬이 양말산이다. 이 양말산을 중심으로 사방에 무허가 주택 400여 호가 다닥다닥 붙어있고 그 속에 600여 가구가 살고 있었다.

▲ 70년대 새로 지은 초고층 아파트의 시작은 여의도 시범아파트였다. 1970년에 착공하여 1971년에 완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24개동 1584세대로 이루어졌다. 준공식에는 박정의 대통령이 참석했다. 건설은 삼부토건, 현대, 부국, 대림, 한국건업, 건설산업, 모양건설이 맡았다. <사진@국가기록원>
‘오늘 안으로 밀가루 880포대 보내주오’

강 사무장이 그날부터 돼지죽으로 연명하는 50여 호를 방문하니 토굴 속에서 여러 가족이 겨우 숨만 쉬고 있었다. 때는 바로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라는 5.16 혁명구호가 찌렁찌렁 울리던 시기였다. 강 사무장이 전광석화(電光石火)식 아이디어로 서울시청 사회과장 앞으로 전언통신문을 작성했다.
“여의도 4개동 600여 세대가 기아선상에 허덕이며 사경(死境)에 헤매고 있습니다. ‘오늘 안으로’ 밀가루 4차를 보내주십시오”라는 요지였다. 밀가루 1차는 220포대, 4차는 880포대이다.
전언통신문 발송 직후 계속 독촉하니 하오 6시까지 보낸다는 응답이 왔다. 즉각 통·반장들을 소집하여 밀가루를 분배하고 나니 절로 배가 부른 느낌이다. 이튿날 출근하자마자 영등포 구청과 서울시청에 결과를 보고했다.

소림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여의도 국회의사당을 지나치게 되면 돼지죽으로 연명하던 ‘양말산 사람들’이 생각난다.
서울시의 행정이란 골목마다, 마을마다 쏟아져 나오는 민원처리가 우선이다. 수도, 전기, 연탄문제에다 도로와 아파트 문제 등 끝도 없이 민원이 생산, 재생산되기에 ‘서울시와 함께 한 나의 길’이란 민원처리의 연속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 1979년 지하철 2호선(강북구간) 기공식에는 당시 최규하 국무총리가 참석해 테이프 커팅을 했다. <사진@국가기록원>
지하철 재원조달위해 중앙부처 돌격

1977년 지하철 담당 과장일 때 재원조달 아이디어로 건설부가 관장하는 주택공채를 지하철공채로 전환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건설부를 노크해 봤지만 어림도 없었다. 이에 경제기획원 총무과를 통해 국무회의 상정안건에 이를 포함시키도록 공작(?)하고는 건설부 주택과장을 찾아갔지만 너무나 냉랭했다.
미리 구상한 ‘뗑깡작전’으로 중앙부처 사무실 안에서 “정부 부처간 이렇게 비협조적일 수 있느냐”고 고함을 질렀다. 동행한 서울시 계장은 더욱 큰 목청으로 대들어 한바탕 난리를 피웠다. 결국 건설부 과장이 항복하여 서울시 입장을 수용하기로 했다.

그 뒤 지하철공채 발행 근거가 되는 ‘지하철건설추진법’ 초안을 작성, 끝내 입법에 성공했다. 그 뒤 강 과장이 지하철 관리과장에서 예산과장으로 전보되어 교통부에 ‘지하철 국고보조금’을 신청토록 예산계장을 보냈더니 아예 문서 접수마저 거부했다. 즉시 강 과장이 뛰어가 담당 직원에서부터 계장, 과장, 국장을 만났지만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이어 수송조정실장, 차관을 거쳐 장관 면담을 신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강 과장도 물러서지 않고 3번째 장관실을 찾아가니 민병권 장관이 면담을 허용하여 서류를 처리, 30억원을 경제기획원에 신청하는 절차를 마칠 수 있었다.

당시 경제기획원 기획국장은 아웅산에서 순직한 김재익(金在益)씨로 지하철 건설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이 무렵 남덕우(南悳佑) 장관이 국무총리로 임명되어 또 다시 국고보조금 지급절차가 늦어지고 있어 문제였다.
어느 토요일, 남 총리 주재 ‘서울시 지하철 건설 대책회의’가 열리자 재무부 이재국장이 “우리나라 재정 형편상 연간 5,000억원을 지하철에 투입하기는 어려우므로 계획을 보류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남 총리께서 “지하철 건설계획은 이미 확정되어 오늘 회의는 각 부처의 지원방안을 논의하는 자리”라고 설명했지만 이재국장은 계속하여 “연간 5,000억원은 너무나 큰 통화량”이라고 반발했다.

이에 남 총리께서 “이재국장은 그만 나가시라”고 꾸짖고 말았다. 당시 서울시장은 거의 유구무언 입장이었다. 강덕기 지하철건설본부 차장이 나서 “5,000억원은 전액 현금투자가 아닐뿐더러 공채매출이 어려우면 뉴욕과 런던 채권시장에 상장하여 조달하는 방안이 있다”고 말하고 “다만 이를 위한 중앙정부의 승인이 필요할 뿐”이라고 설명하여 무사히 회의를 마칠 수 있었다.

▲ 1983년 강동구로 신축, 이전한 국립원호병원은 국가유공자와 그 가족뿐 아니라 일반국민의 보건향상에 기여했다. 사진은 1977년 박정희 대통령 큰 영애(박근혜) 위문방문 사진. <사진@국가기록원>
88올림픽 직전 환경미화, 악취제거 일사천리

서울올림픽 개최 두 달을 앞두고 동작구청장에서 갑자기 서울시 환경녹지국장으로 발령이 났다. 당시 김용래 시장이 올림픽 환경을 위해 환경미관과 악취제거를 독촉했다.
환경녹지국장 부임 이틀 만에 성산동 분뇨처리장을 폐쇄시키고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에 약품을 살포하고 침출수 웅덩이들도 메워버렸다. 또 환경미화원들의 손수레 쓰레기 수거방식을 자동차 수거로 교체했다. 강 국장의 행정처리 방식이 이러했다.

이 무렵 난지도 쓰레기 매립장이 포화상태로 새 매립지 확보가 절박했다. 듣고 보니 동아건설이 매립공사 중인 김포 검단면 해안 300만 평이 준공단계에 이르렀다. 이에 환경처와 접촉하여 감정원 감정가격으로 150만 평을 서울시가 매입하겠다고 제안, 환경처, 동아건설과 함께 계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이어 1989년 산업국장 때는 진폐증 환자들의 민원이 제기되어 있는 연탄공장들을 정리하고 1991년 상수도 사업본부장 때는 ‘맑은 물’ 대책으로 ‘마실 수 있는 서울 수돗물’을 공급했노라고 자부한다.
다른 한편으로 소림 강덕기 시장은 서울시정 40년간 잊을 수 없는 대형사고로 7가지를 꼽는다.

①1969년, 기획예산계장 시절 와우아파트 도괴사건, 불도저 김현옥 시장의 추락 ②1970년, 주택행정계장, 양택식 시장 시절 광주 대단지(현 성남시) 소요사태 ③1971년, MBC 창사기념 공연시 시민회관 화재사건 ④1978년 영천고개 대공포(對空砲) 사격사건 ⑤1984년, 한강 대홍수 ⑥1995년, 성수대교 붕괴사건 ⑦1996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등.
1996년 최병렬(崔秉烈) 서울시장은 광화문 서울시민회관에서 퇴임을 앞둔 고별인사 중에 삼풍백화점 사건을 보고 받고 얼굴이 하얗게 질려 현장으로 달려갔다.

▲ 완공된 상암 월드컵 경기장. <사진 @이코노미톡뉴스DB>
‘강도끼’의 내력… ‘아무리 크고 험하다 한들’

소림은 지난 2009년 11월 ‘아무리 크고 험하다 한들’이란 제목으로 행정수상록을 발간했다. (예지, 384쪽)
이 책 속에 ‘강도끼’란 별명을 얻은 내력이 나온다. 1966년 소림이 거의 초병이던 시절 재래시장 관리업무를 맡고 있을 때 군 출신 안찬희 과장이 부임하여 매우 직선적이고 과감한 일처리를 선호했다. 이때 재래시장 관련 소송을 위해 법원으로 출장을 떠나려는 시각에 직속상관 과장이 “자네도 대학을 나왔으니 소송은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패소하면 아예 사무실로 돌아올 생각도 마시게”라고 강압했다.
다행히 그날 소송은 이겼다. 이에 과장이 자축연을 벌여주었다. 그로부터 안 과장이 가는 곳마다 “저 친구는 도끼같이 일처리 방식이 명확하여…”라고 선전하여 ‘강도끼’라는 별명이 출입기자실로 알려지고 사방으로 소문이 퍼졌다는 이야기다.

소림이 2008년 봄 서울적십자사 회장으로 이산가족 상봉단 단장으로 금강산 면회소에 갔을 때 북측 장재언 위원장이 “어찌하여 강도끼라는 별명을 얻게 됐는지요”라고 물어 북측까지 소문이 퍼진 줄 알게 됐다고 한다.
소림이 행정수상록을 왜 ‘아무리 크고 험하다 한들’이라고 제목을 붙였을까.
그에게 닥쳐오는 일들이 아무리 크고 험하다고 해도 그는 태산준령을 넘고 험한 파도를 건너는 자세로 결코 회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소림이 겪은 초보 공무원 시절부터 민원행정 수요가 넘쳐났다. 이때 민원인에게 나라의 형편을 반영하여 설득하고 이해를 시키고자 노력했을망정 자신의 편의를 위해 결코 거짓이나 몸조심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소림은 민원처리 과정에 실수를 저질거나 과오를 범하면 언제나 물러날 각오를 했기에 큰일 앞에 마음의 평정을 이룰 수 있었다고 한다.

소림은 공직 40년의 좌우명을 자신의 필체로 책속에 적어 소개했다. ‘경상생죄’(輕上生罪)요 ‘모하무친’(侮下無親)이라, “윗사람을 경솔하게 대우하면 죄를 낳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김으로써 친밀감을 잃게 된다.”
말단 9급으로 출발하여 ‘강도끼’식 우렁찬 목소리로 서울시장직을 수행하기 까지 40년을 이 같은 좌우명이 지켜준 셈이다.

70년대 새로 지은 초고층 아파트의 시작은 여의도 시범아파트였다. 1970년에 착공하여 1971년에 완공된 여의도 시범아파트는 24개동 1584세대로 이루어졌다. 준공식에는 박정의 대통령이 참석했다. 건설은 삼부토건, 현대, 부국, 대림, 한국건업, 건설산업, 모양건설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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