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姜無, 그때 그 시절 이야기들

옛날이야기, 기생과 요릿집 이야기를 엮은 명월관(明月館)이 책으로 나와 나이 든 세대들의 눈길을 끈다. 조선왕조가 쇠퇴한 망국(亡國)시절, 매국노와 친일파가 득세한 세월의 이야기다.
표지에 붉은 글씨 明月館은 1903년 9월 17일 광화문 황토마루에 안순환(安淳煥)이 개업한 명월관의 간판으로 고종 황제의 어용(御用) 화가이자 서예가인 김규진(金圭鎭)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있다.

▲ 명월관 평실 정원에 모인 기생들.
친일, 매국노 등 단골로 한세월 쾌감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이톡뉴스)] 유명 요릿집 명월관 이야기는 왕조 말기에서 8.15 해방까지 연속된다. 개업주 안순환은 풍채 좋고 기골이 장대하며 목소리가 우렁찬 사나이다. 그도 망국의 한(恨)을 느끼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명월관을 통해 한 세월을 휘어잡았노라고 쾌감을 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이완용, 송병준 등 당대의 친일 거물들이 모두 단골로 나온다. 기생들 이야기, 이능화(李能和)의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도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기생 이야기 가운데 백만장자 장길상(張吉相)의 외아들 장병천(張炳天)과 사랑의 도피행각을 연출한 평양 기생 강명화(康明花)는 그냥 화젯거리다. 반면에 충정공 민명환(閔泳煥)의 자결 소식에 구슬프게 호곡한 궁기(宮妓) 출신 설도(雪挑) 이야기는 뭉클한 감동이다.
또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대표인 의암 손병희(孫秉熙)의 셋째 부인 주산월(朱山月)은 권번시절 기생 중 으뜸으로 서대문 감옥 곁에서 끝까지 의암의 옥살이 수발을 다해 나중에 건국훈장을 추서할 때 의암 대신에 받았다. 1982년 1월 17일 87세로 별세한 빈소에 전두환 대통령이 조화를 보냈다.

▲ 춤추는 명월관 기생들
국일관 지배인 이기붕의 슬픈 이야기

책 속에 나오는 긴긴 사연들을 다 읽기가 벅찬 것이 사실이다. 당시 숨은 자료와 언론보도 등을 고루 인용했지만 정확한 상황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요릿집 국일관(國一館) 지배인 이기붕(李起鵬) 편이 뜻밖이다. 자유당 정권 제2인자로 부통령에 당선됐다가 장남 이강석 소위의 권총으로 온 가족이 자결한 서글픈 이야기가 생각나기 때문이다.
만송(晩松) 이기붕은 태종의 둘째아들 효녕대군의 18대손 왕손이다. 1896년 12월 20일,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평리에서 태어났지만 집안이 가난했다. 세 살 때 서울 노량진으로 이사 왔다가 종로구 누상동 등으로 전전하며 자랐다. 모친이 외아들을 제대로 공부시켜야겠다며 사립 보성학교에 입학시켰다.

이때 이기붕은 나약하여 늘 건강문제로 시달렸다. 음악에는 천재적인 소질을 보였다. 이 무렵 4촌 형인 이기룡(李起龍)씨가 선원증을 얻어와 이기붕의 미국행 길이 열렸다. 무일푼으로 미국에 도착하여 세탁소 경비원, 철공소 노무자, 쇼 단체 악사 노릇 등으로 생존했다. 그러다가 뉴욕 한국인교회 내에 거처를 지정받으면서 이승만(李承晩), 윤치영(尹致暎), 허정(許政), 이홍직(李弘稙), 김활란(金活蘭) 등과 친교를 쌓을 수 있었다.
1931년 박마리아가 미국으로 유학 오자 이기붕이 교제를 시작했다. 박마리아는 1928년 이화여전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후 기독계의 주선으로 도미 유학할 수 있었다. 1935년 두 사람은 귀국하여 결혼했다.

자유당정부 2인자에서 망우리 공동묘지로

이기붕 부부는 신혼 초부터 종로구 가회동에 식료품 가게로 ‘가회상회’를 개업, 이기붕이 자전거 배달 등으로 열심히 노력했지만 생활고를 면키 어려웠다. 이를 지켜본 국일관의 최남(崔楠) 사장이 지배인으로 초빙한 것이다.
이기붕의 악기 다루는 솜씨가 비범한데다가 재미 독립운동 거두들과 정기적으로 편지를 교환하는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국일관 지배인으로 월급을 알뜰하게 모은 이기붕은 얼마 뒤 허정과 동업으로 광산을 운영하고 건설 청부업에도 손을 뻗혀 8.15 해방을 맞았다.

이승만 박사의 귀국으로 이기붕이 서울시장, 국방부장관, 국회의장, 부통령 당선 등으로 자유당 정권 제2인자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체험한 근대사이다. 그러나 1960년 4월 28일 새벽 경무대에서 장남 이강석이 부모와 동생을 사살하고 자신도 권총 자살로 마감했으니 얼마나 참혹한 비극인가.
만송 이기붕 부부는 망우리 공동묘지에 합장됐다. 그곳에 일찍 간 큰딸 이강희(李康熙)의 무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기붕 부부 합장묘 아래 장남 이강석, 차남 이강욱의 무덤으로 가족묘역이 마련됐다. 이기붕 의장의 비서실장 한갑수(韓甲洙)님의 정계야화 속에 이기붕 부부가 큰딸의 묘비에 적은 애달픈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강희야, 어두운 밤 무서워 말고 눈보라 비바람에 떨지 말고… 고히고히 잘 쉬어 다오. 요단강 건너가 다시 만나자. 애달픈 아빠 이기붕, 엄마 박마리아.

저자 강무, 서예원 운영

명월관 저자 강무(姜無)씨는 서대문 냉천동에서 태어난 75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한때 시집도 발간하고 1985년에는 서예원을 개원, 붓글씨, 전각, 서각, 한자교육 등에 몰두하고 있다고 한다. 명월관 이야기는 2000년부터 월간 ‘한글 + 漢字문화’에 연재했었다. 민속원 출간, 2017.6, 350쪽.

▲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발행된 국한문판 일간신문 '매일신보' 6명. 1만부 발행 축하문구와 명월관의 사진과 주소, 전화번호가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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