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시 집필, 사후 1주년 유족이 출간
박관용 추모회장, 굴절 없는 원칙주의

이기택(李基澤) 정치일생.
우행의 ‘내 길을 걷다’.
생존시 집필, 사후 1주년 유족이 출간.
박관용 추모회장, 굴절 없는 원칙주의.
▲ 이기택 전 민주당 대표

한국 야당 정치사의 거목 이기택(李基澤) 전 민주당 대표가 별세한지 1주년이 지나서야 고인이 생시에 집필해 둔 정치 회고록이 유족에 의해 편집, 발간됐다. ‘우행(牛行)의 내 길을 걷다’(이상미디어, 2017.7)라는 제목이다.
회고록 출간 기념회는 9월 15일 하오 3시, 국회 헌정회관에서 열려 수많은 정계 인사들이 참석하여 고인을 추모했다.

‘소처럼 묵묵히…’ 우행(牛行)의 정치일생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이톡뉴스)] 아호 일민(一民)으로 불린 고인은 고대 상과대학 학생회장으로 4.18 고대생 시위를 주도한 후 정계에 입문하여 7선(選)을 기록하면서 반독재, 민주투사로 일관해 오다가 2016년 2월, 79세로 별세했다.
고인은 회고록 집필을 끝낸 후 여러 가지 제목을 생각하다가 ‘우행(牛行), 내 길을 걷다’로 정했노라고 밝혔다. 평생의 좌우명인 ‘호시우행’(虎視牛行)에서 인용한 것이다.
고인이 바로 소띠로 태생과도 인연이 닿는데다가 ‘좌고우면 하지 않고 소처럼 묵묵히 걷는다’는 신념의 표현이라는 해석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우행(牛行)을 고집한 것이 어리석은 우행(愚行)이 아니었을까 반문해 보기도 했노라고 했다. 정계의 변덕 때마다 홀로 고독한 결단을 고집해온 것이 어리석은 선택이 아니었을까 반성해 봤다는 뜻이다.

일민 이기택 추모회장 박관용(朴寬用) 전 국회의장은 고인은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정치적 변혁기 때마다 어떤 타협이나 굴절도 없이 늘 꿋꿋한 외길을 걸어왔노라고 회고했다. 박 전 의장은 고인과 학생운동 동지사이지만 이기택 총재가 먼저 정치권에 입문하여 그의 비서관으로부터 정치를 시작한 인연이 겹쳤다.
또 이윤기 전 도산서원 원장은 ‘일민이 걸은 길’이라는 추모 글을 통해 고인이 영천이씨 명문가의 후예로서 유가(儒家)의 엄격한 훈육으로 자라 정계에 진출한 뒤에도 철저한 금도와 절개로 지사형(志士型) 정치지성을 보여 주셨다고 회고했다.

▲ 1974년 5월 10일 국회 재무위에서 질의하는 신민당 이기택 의원
상대학생회장으로 4.18 고대생 시위 주도

일민 이기택의 정치일생은 1960년 4월 18일, 고대 상대 학생회장으로 3.15 부정선거에 항의한 고대생 시위를 주도함으로써 시작됐다. 당초 이날은 신입생 환영식이 예정되어 있다가 무기 연기되는 바람에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단이 인촌(仁村) 묘소 앞에 모여 시국선언문을 낭독한 후 태평로의 국회의사당 앞으로 시위행진 했다.
고대생 시위에는 3,000여명이 참가하여 도중에 경찰 저지선과 충돌하여 이기택 회장 등은 경찰차에 실려 학생처로 감금되고 말았다. 이때 국회의사당 앞 시위대는 김중위, 조남조(전 국회의원)씨 등이 지휘를 맡아 3.15 부정선거를 규탄했다.

사태가 악화되자 경찰과 큰 충돌을 우려하여 유진오(兪鎭午) 고대 총장과 민주당 이철승(李哲承) 의원 등이 시위를 마무리 짓고 학교로 돌아가도록 설득했다. 하오 6시가 넘어 시위대가 학교로 돌아가다 청계천 4가 천일백화점 앞에 이르렀을 때 괴한들이 습격하여 수많은 고대생들이 중경상을 입었다. ‘정치깡패’의 급습이었다. 이로써 학생시위는 더욱 가열되어 이튿날 4.19 학생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장면 내각책임제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유진오 신민당대표시절 비례대표 진출

이기택 회장이 4.18 고대생 시위에 이어 4.19 학생혁명까지 주역의 한 사람으로 부각되자 체포령이 내렸다는 소문이 퍼져 나왔다. 이에 부산으로 내려가 ‘대한민주청년회’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사실상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학생운동 동지가 동아대 박관용, 서석재 등이 대표이다. 그 뒤 이기택은 1960년 7.29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에 입당했지만 5.16 쿠데타로 정치활동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간 중 이기택은 섬유수출업체인 태광산업에 입사하여 4년간 영업과장으로 활동하며 정계를 관찰하기도 했다. 유진오 총장이 신민당 대표를 맡은 1967년, 제7대 총선을 앞두고 비례대표 14번으로 추천되어 초선의원으로 등원했다. 이기택은 29세의 새파란 초선의원으로 총선 후 ‘부정선거’ 규탄 ‘선거무효화투쟁위원회’에 참여, 젊은 혈기를 마음껏 발산했다.

그렇지만 이 시기는 정국이 요동치고 사회가 극도로 혼란을 되풀이 했다. 1967년 7월, 중앙정보부가 동백림 사건을 발표하고 1968년에는 1.21 청와대 기습사건, 북한의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울진·삼척 무장공비 상륙사건 등에 이어 통일혁명당 사건 등이 겹쳤다. 이 같은 사건·사고 빈발 속에 공화당은 1969년 9월, 국회 제3 별관에서 3선 개헌안을 변칙 처리함으로써 정국은 극한대결로 더욱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 1992년 5월 26일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에 선출된 故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기택 대표가 손을 들어 인사하는모습.
소석 이철승대표의 ‘중도통합론’ 반기

신민당 유진오 총재는 3선 개헌 변칙처리를 막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유진산(柳珍山) 당수체제가 들어섰다. 이때 김영삼(YS)의 ‘40대 기수론’이 나오고 곧이어 김대중(DJ)과 이철승 의원 등이 동참했다.
유진산 대표가 YS를 차기 대선주자로 지명했지만 DJ가 불복하여 경선을 치른 결과 DJ가 이겨 공화당의 박정희 후보와 경쟁했지만 실패했다.

당시 초선인 이기택 의원은 유진오 당수체제에서 원내 부총무로 발탁되어 돋보이는 활동을 했다. 곧이어 8대 총선 때는 동래을구에 출마하여 당선됐다. 그러나 1972년 10월, 유신(維新)선포로 ‘긴급조치’ 시대에 접어들고 말았다.
1974년 4월, 유진산 당수의 별세로 YS가 ‘선명야당’ 기치를 내세워 당권을 장악했지만 1976년 5월 전당대회는 다시 각목(角木)대회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 이 무렵 수습 전당대회를 거쳐 소석(素石) 이철승 대표체제가 들어섰다. 이때 3선인 이기택 의원이 당 사무총장의 중책을 맡았다. 이미 독자계보인 ‘민주사상연구회’ 조직을 거느리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기택 총장은 이철승 대표와 대학 동문사이지만 그의 ‘중도통합론’에 동의할 수 없었다. 당시 이철승 대표는 “국내정치는 여야가 치열하게 대결하더라도 외교·안보문제는 초당적으로 협력하겠다”는 ‘중도통합론’을 강조함으로써 ‘사쿠라’ 논쟁이 빚어지기도 했다. 이 때문에 1979년 5월 전당대회는 YS와 DJ의 대결판이 되었다가 YS가 당선됐다.
YS가 당대표로 취임한 후 YH무역 근로자들이 민주당 마포 당사로 진입하여 시위 도중, 경찰진압에 맞서다가 여성 근로자 1명이 추락사 했다. 이때 공안 당국은 신민당 총재단 직무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으로 맞서 정국은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암흑기를 맞았다.
곧이어 부마(釜馬)항쟁과 10.26 국변(國變) 및 1980년 5.18 광주사태,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12.12 쿠데타 등으로 숨 가쁘게 돌변했다.

‘3당 합당’ 야합 참여거부 결단

야권 명장 이기택도 신군부에 의한 정치활동 규제로 4년여 ‘정치방학’을 누렸다. 이 기간 중 미국 펜실베니아대 객원 연구원으로 1년간 수학하고 귀국 후 ‘한국야당사’를 집필하고 서예, 수석, 난초에 심취하여 필생의 반려자로 함께 했다.
그 뒤 해금(解禁)정국 때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 1985년 1월, 사실상 YS  대리인격인 이민우 총재 아래 부총재를 맡아 12대 총선 때 제1 야당 지위를 확보했다. 그러나 얼마 뒤 속칭 ‘이민우파동’을 겪고 YS와 DJ의 분당 사태를 맞았다.
양 김은 정치상황이나 자기네 이익에 따라 협력과 분당을 되풀이 해온 사이다. 1980년 신군부가 비상계엄을 확대 했을 때는 적극 협력했지만 노태우의 ‘6.29선언’ 이후에는 분열하여 자기네 길을 걸었다. 속칭 ‘정치9단’들의 속셈과 술수는 여러 차례 체험한 사실이다.

1988년 4월, 13대 총선을 통해 1노(민정당 노태우), 3김(통일민주당 김영삼, 평민당 김대중,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등 4당 체제가 확립됐다. 노태우 정권으로서는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 아래서 단독으로 처리할 능력이 없었다.
이 때문에 DJ와 YS를 번갈아가며 합당을 추진하다가 1990년 2월 노태우, YS, JP 등 3당이 합당하여 ‘민자당’을 발족시켰다. 이기택은 당시 통일민주당 부총재 및 원내총무를 맡고 있었지만 이를 야합(野合)으로 규정, 합당 불참을 선언했다. 김정길, 김광일, 노무현, 장석화 의원 등이 반 합당에 동참했다. 무소속의 박찬종, 이철 의원도 불참선언으로 ‘독불장군’의 길을 고집했다.

‘고독한 결단’이후 ‘꼬마 민주당’ 창당

이기택의 ‘고독한 결단’ 이후 ‘영남권 야당 재건’ 명분으로 민주당 창당을 선언하여 1990년 6월 15일, 현역의원 8명으로 민주당이 발족됐다. 언론에서는 이를 ‘꼬마 민주당’으로 호칭했다.
당수 이기택이 의원 8명을 배경으로 평민당 70석을 향해 당대당 합당을 제안했다. 신중한 DJ가 고심 끝에 통합민주당으로 합당, 이기택과 공동대표를 맡았다. 정권교체를 위해서는 꼬마 민주당의 영남권 교두보가 절실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DJ와 동거하며 14대 총선을 치르면서 이기택 대표는 고비마다 고집을 부려 DJ의 양보를 받아내기도 했다. 그 뒤 DJ가 대선 후보가 되자 이기택 대표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열심히 지원했다.

대선 결과는 YS의 승리로 끝나고 DJ는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그렇지만 DJ의 은퇴는 오래가지 않았다. 1993년 3월 전당대회를 거쳐 이기택 대표체제가 들어선 후 얼마 안 돼 1994년 DJ가 귀국 후 아·태재단을 설립하면서 대권 4수(修)를 노린 당내 분열, 갈등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1995년 7월, DJ가 정계복귀를 선언하고 동교동계가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시키니 민주당은 다시 소수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 1994년, 김영삼 대통령과 이기택 민주당 대표 접견자리. <사진@국가기록원>
이회창 총재의 ‘공천학살’ 그 뒤

1997년 11월,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과 합당, 한나라당으로 바뀌면서 조순 총재, 이회창 대선후보, 이기택, 김윤환 선거대책위원장 체제로 DJ 후보와 경쟁했지만 실패했다. YS에 이어 DJ의 집권세월이 열린 것이다. ‘유신본당’이라 자부한 JP가 ‘DJP연합’으로 그의 집권을 도와준 결과이다.

▲ ‘우행(牛行)의 내 길을 걷다’ (이상미디어, 2017.7)

이 무렵 강릉 보궐선거에 당선된 조순 총재가 국회의장 선거에 패배하자 총재직을 사퇴하여 이기택 부총재가 한나라당 총재 권한대행을 맡아 DJ의 JP 국무총리 지명을 강력 항의했다. 그 뒤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2월, 이회창 총재가 이기택, 김윤환, 신상우 등 당내 중진들을 ‘공천학살’로 추방했다. ‘젊은 피를 수혈한다’는 명분이었지만 이회창 총재도 연속 실패의 길로 들어선 악수였다. 이기택씨 등은 공천학살에 불복하여 급히 ‘민주국민당’을 창당하여 총선에 나섰지만 참패하고 말았다.

‘이기택 정치’의 은퇴였다. 그 뒤 특정 대선후보 지지선언이나 선거유세 활동은 있었지만 자신의 정치재개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MB 시절 민주평통 수석부위원장을 맡고 해외 한민족교육진흥회 사업에만 적극 참여했을 뿐이다.
이기택 정치인생은 청년 정치인 시절 3선 개헌 저지투쟁, 양김시대의 독자노선, 3당 합당 불참 및 꼬마 민주당을 통합 야권 통합으로 야당의 집권기회를 창출할 수 있었다고 평가된다. 다만 말년에 겪은 정치적 시련은 우행(牛行)의 ‘내 길을 걷다’라는 표제에 비춰보면 결코 후회할 수 없는 스스로 선택의 결과라고 믿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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