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사단 김현종 장군 취임식 참관
주적도발 전투적 만반의 태세 든든

대한민국 수호 '요새'
백전백승 '백골' 기상
제3사단 김현종 장군 취임식 참관
주적도발 전투적 만반의 태세 든든
▲ ‘살아서도 백골, 죽어서도 백골’ 구호 앞에서… <사진@이코노미톡뉴스>

북핵과 미사일 도발로 국가안보 상황이 매우 엄중할 때 육군 최강부대로 소문난 백골(白骨)부대장 취임식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지난 9월 29일 하오, 육군발전자문위원단에 편승하여 강원도 철원 깊숙한 산악지대에 위치한 보병 제3사단을 방문, 제50대 사단장 김현종 장군(소장)의 취임식에서 백전백승 백골부대의 확고한 기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수호’ 요새의 현장

[배병휴 회장 @이코노미톡뉴스(이톡뉴스)] 백골부대는 오래전부터 들어온 명성 그대로였다. 부대 입구 경계 방식이나 각종 구축물은 물론 당당하고 활기찬 장병들의 모습부터 달라 보였다.
최근 김정은의 무한도발에 대해 정부의 대응이 갈팡질팡하여 솔직히 “전방 장병들마저 멍청한 기상이면 어떡할까”라는 불안감을 감추지 못해 먼 길을 찾아 나선 기분이었는데 그만한 보람이 있었다는 소감이다.

우선 ‘백골’이란 장병들의 구호가 믿음직하게 느껴왔다. ‘살아서도 백골’, ‘죽어서도 백골’이란 구호들이 육감으로 전해 오는 기분이기도 했다. 장병들의 행동규범처럼 인식되는 각종 전투적 구호 속에 북의 김정은을 직접 겨냥한 붉은 글씨의 강렬한 인상이 행여 북의 도발 앞에 벌벌 떨고 있을 국민들에게 ‘걱정 마시라’고 위안하는 메시지로 들렸다.
이날 신임 사단장 김현종 장군의 취임식 행사는 ‘백골’ 구호로 시작하여 ‘백골’ 구호로 끝이 났다. 이는 6.25 전쟁 때 뛰어난 전공을 쌓은 백골부대 특유의 전통 호국문화이기도 하겠지만 우리네 안목으로는 친북, 종북세력이 준동하는 시대상황 속의 가장 확실한 ‘대한민국 수호의 요새’가 아닐까 싶은 소감이다.

▲ 9월 29일 하오, 보병 제3사단을 방문하여 제50대 백골단장 김현종 장군(소장)의 취임식을 참관했다. <사진@이코노미톡뉴스>
‘백골부대’ 지휘 가장 영광 자부

이날 취임한 김현종 장군은 육사 44기 출신으로 초보 소대장에서부터 각급 지휘관과 고급 참모과정을 다 거쳤지만 무엇보다 이곳 백골부대 대대장으로 복무했던 경륜이 돋보인다. 김 장군은 육본 정책실장 등 두뇌요직을 거치기도 했지만 백골부대장이라는 “야전 최고 지휘관 취임을 무엇보다도 가장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혔다.

김 장군은 또한 “백골부대 장병들은 단 한치도 어김없는 호국충성을 대한민국에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특히 사단장 취임행사 안내 및 지휘연단대에 1만 수천 명에 달하는 백골용사 전사자 명단을 책으로 엮어 비치해 둔 것이 특이하게 눈길을 끌었다. 6.25 전쟁기에 전사한 ‘선배 백골’들을 호국의 영령으로 모셔 늘 잊지 않고 받들고 추모하겠다는 백골부대 정신을 잘 말해줬기 때문이다.

우리네 7080 세대들은 이날 백골부대장 취임식 참관을 계기로 서울에서 맨날 TV 등 언론매체들을 통해 친북, 종북세력의 난동을 보고 불안과 분노를 느낀 심정이었지만 일시에 안정되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또 이곳 지역주민들도 백골부대장 취임을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를 나타났다. 철원 시내 거리 곳곳에 ‘김현종 장군 취임 축하’ 현수막을 내걸고 각급 기관장들도 취임식장에 참석, 축하했다. 뿐만 아니라 사병으로 복무했었다는 ‘백골 전우회’ 회원들 다수가 유니폼 차림으로 참석하여 “한번 백골은 영원한 백골”이라며 백골부대에서 복무했던 전력을 매우 자랑스럽게 들려주니 감명 아니고 무엇인가.

▲ 신임 사단장 김현종 장군의 취임식 행사. <사진@이코노미톡뉴스>
반공청년단 뿌리… 백전백승으로 명성축적

백골부대의 명성과 신뢰는 그들 스스로의 전공으로 쌓은 것이다. 보병 제3사단이 초기부터 북녘에서 남하해온 반공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부대가 편성되고 각급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기록, 김일성마저 벌벌 떨게 했다는 실전의 산물이기도 했다.
부대는 1947년 12월, 부산에서 여단으로 창설(여단장 이응준 대령)됐다가 1948년 5월 대구에서 보명 제3사단으로 승격했다. 6.25 전쟁 초기에는 국군이 아무런 준비가 없어 일방적인 후퇴작전을 거듭했지만 낙동강 방어전선이 구축되면서 용맹 전투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보병 제3사단의 경우 포항지구 전투에서 인민군들의 승세를 분쇄 격퇴한 후 북진대열로 나서 38선을 가장 먼저 돌파하여 오늘의 10월 1일 ‘국군의 날’을 창설한 부대이다. 이어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원산탈환작전, 해산진 최선두 진입 등 대기록으로 명성을 축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곧이어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의 후퇴작전으로 수도 서울이 다시 함락됐다가 수복하는 곡절을 겪어야만 했다.
보명 제3사단은 정전회담을 전후하여 철의 3각지대 사수를 위한 ‘피의 능선’, ‘금성지구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쌓아 김일성이 백골부대의 위력을 두렵게 여기게 된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백골부대는 6.25 전쟁기간 중 적 사살·포로 4만600여명, 무기·장비노획 1만 수천 점을 기록했다.

1973년 적의 DMZ 도발 응징, 보복

이날 제50대 사단장 취임식이 끝난 후 역대 사단장 관련 일화에 관한 방담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1970년대 부대장 박정인(朴定仁) 장군의 일화가 화제였다.
박 장군은 함남 신흥 출신으로 김일성의 학정을 피해 월남하여 육사 6기생으로 임관되어 6.25 전쟁 초기부터 참전했다. 당시 박 대위는 북진대열 최선두에 서서 두 차례나 포로로 잡힌 격전을 겪었지만 끝내 적진을 탈출하여 다시 전선에 복귀함으로써 용맹지휘관 명성을 얻었다.
그러나 뒤에 ‘만년대령’으로 전역할 처지에서 극적으로 장군으로 진급하여 1973년, 동기생들보다 한참 뒤늦게 보명 제3사단장에 취임할 수 있었다. 이때 박 장군은 사단장 지휘지침을 통해 철모착용, 실탄장전, ‘백골’구호 열창 등을 엄중 지시하는 한편 총검술 표적훈련 방향과 화장실의 용변방향마저 북측의 김일성을 겨냥토록 지시한 반공의 강골 면모를 보여줬다.

박 장군이 백골부대장에 취임한지 얼마 안 된 1973년 2월, 춘계 DMZ 표지판 보수작업 과정에 중대한 적의 기습을 받고 즉각 수십 배로 응징, 보복한 획기적인 사건을 기록했다. 당시 DMZ 표지판 보수작업은 유엔사령부를 통해 북측에 사전 통보했기 때문에 분쟁의 소지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북측 559GP에서 도발적인 자세로 시비를 걸어오더니만 끝내 우리 측 0654DMZ 표지판을 제거해버린 만행을 저질렀다.

이에 천성의 반골체질인 박 장군이 정훈참모에게 지시하여 즉각 보수작업을 지휘토록 명령했다. 이에 보수작업이 끝날 무렵에 갑자기 북측의 기습사격으로 대위와 하사관 각 한명이 중상을 입었다. 분노한 박 장군이 즉각 사단 관측기를 띄워 적 559GP를 표적으로 105~155미리 포격을 가해 GP를 완전히 날려버렸다. 또한 연막탄을 발사하여 부상 장병도 무사히 구출할 수 있었다.
이어 후속 도발을 예방하기 위해 일몰 후에는 전 사단 트럭을 동원하여 헤드라이트를 켜고 전진하는 기세를 보여주자 적진이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이때 놀란 김일성이 전군에 비상령을 발동하고 판문점을 통해 엄중 항의해 오니 유엔사령부와 우리의 야전군 지휘부도 난리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보직 해임됐지만 보람과 긍지 자부

당시 백골부대장의 대북 보복과 응징은 전례가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이 결과 군 내부가 모두 통쾌감을 누린 것은 사실이지만 유엔군사령부마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김일성의 항변이 거칠고 거세였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도 박 장군에 대해 ‘전투 잘하는 장군’으로 인식하여 울산특정지역 경비사령관으로 장기 보직했다가 모처럼 야전군 사단장으로 임명했기에 웬만하면 그의 지휘권을 보장해 주고자 고심했었다.

그렇지만 김일성의 노발대발에 유엔군사령부의 항의로 박 장군은 1973년 4월 보직해임 통고를 받고 권총을 반납하고 전역하기에 이르렀다. 박 장군의 이임식에서 사단 군악대가 ‘이별의 곡’을 연주하고 전속부관 이계복 대위(ROTC 출신)가 해임된 용맹장군을 미 전차군단장 조지 패튼 장군에 비유하며 울먹였다. 또한 수행부관 임영호 준위는 박 장군의 사택까지 수행하여 부대 장병들의 정성으로 만든 별 5개의 ‘오성’을 선물하니 바로 ‘왕별’이다.

▲ 1970년대 백골부대 사단장 고 박정인 장군.

뒷날 출간된 박 장군의 회고록은 ‘풍운의 별’이라 표현했다. 박 장군이 전역한 후 10년이 지난 1985년 9월 20일, 이산가족 방문단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함남 도민회 이상순 회장에게 북의 정치보위부 간부가 접근해 오더니 “함남 신흥 출신의 박가 사단장 그가 지금은 뭐하고 있소”라고 물어 “난 기업인이라 잘 모른다”고 대답했다. 실은 함남 동향인 이상순 회장과 박정인 장군은 매우 친밀한 사이였다.
생전에 박 장군은 이 사건을 회상하면서 비록 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해임됐지만 전무후무하게 적의 도발에 응징, 보복한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는 소감을 거듭 밝혔다. (박정인 회고록, 풍운의 별. 1990.12, 홍익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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