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이유(Versailles)궁전의 역사

1789년 10월
프랑스 농민폭동의 의미
베르사이유(Versailles)궁전의 역사
▲ 정원을 향한 측면의 궁전정면(La facade cote jardin )

[김무일 (파리1대학 국제정치학박사/(前)한전KDN(주)상임감사/ (前)주 프랑스국방무관) @이코노미톡뉴스(EconomyTalk News, 이톡뉴스)] 세계에서 현존하는 단일궁전으로서 호화와 사치로움에 있어서 단연 극치를 이루고 있는 베르사이유 궁전은 한때 전 유럽을 주름잡았던 프랑스의 루이 절대왕조의 본거지이다. 오늘날의 베르사이유 궁전은 루이(Louis) 13세의 성(城), 루이 14세의 왕궁이 아니고 17세기의 역사가와 여행자들이 우리들에게 감탄적인 기술로 남겨준 궁전이다. 1623년부터 1789년까지 166년 동안 프랑스를 지배했던 4명의 루이왕조의 왕들이 그들의 취향에 따라서 계속해서 궁전을 변모시켜왔던 족적이 남긴 건축물이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창건자는 사냥광이었던 루이 13세(1601-1643)왕이며 발드 갈리(Val-de Galie)에서 베르사이유 사이에 작은 사냥켐프를 짓기 시작했던 것이 시초이다. 오늘날 1623년에 건립된 최초의 사냥별채에 관해서는 루이 13세는 사치를 좋아하지 않았던 왕이었기에 몇 개의 방들이 있었던 수수한 집으로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루이 13세는 이곳을 좋아하였고 필리베르 르 루와(Phlibert Le Roy)에게 1631년에 그 당시의 유행 스타일에 따른 아주 큰 성을 벽돌과 돌로써 건축하도록 하였고 스레이트 지붕을 만들도록 하였다. 1643년 루이 13세가 사망하고 1661년부터 작은 베르사이유 성에 매료된 루이 14세(1638-1715)는 그의 취향에 따라서 궁전을 짓고 그곳에서 거주하기로 생각하였다. 원래 루이 14세는 어릴 때 아버지 루이 13세가 사냥을 할 때 따라다니면서부터 이곳을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정원사 르 노트르(Le Notre), 건축가 르 보(Le Vau), 화가 르 부렁(Le Brun) 등이 베르사이유 궁전을 확장하고 윤색하는데 그들의 모든 작업을 집중하였던 것이다. 그 당시 재무상 꼴베르(Colbert)는 루이 14세에게 필립 오거스트(Philippe Auguste) 왕 이래로 역대 프랑스 왕들의 전통적인 궁전이었던 파리의 루브르(Louvre)궁에서 집무하도록 권유하였으나 루이 14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루이 14세는 어릴 때부터 프롱드 당의 반란과 같은 궁중내의 정치적인 혼란을 겪어왔었고, 세론(世論)의 감시를 받는 것을 싫어하였기 때문이었다.

절대왕조 멸망 역사의 기록왕궁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확장하도록 하였는데 이곳에서 편안하게 거주하면서 왕정을 위한 회의도 하고 루이왕조의 위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세계 정치외교의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는 화려한 궁전을 건축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루이 15세도 자신의 취향에 따른 건축을 일부 추가적으로 하였으며, 루이16세는 외형보다는 내부시설에 특히 왕비를 위한 추가적인 작업을 하였다. 최초의 루이 13세의 검소한 성은 1682년부터 루이 14세가 본격적으로 이곳을 주로 왕궁으로 사용하면서부터 확장되기 시작하여 오늘날 볼 수 있는 외형과 내부의 구조로 변모되어왔다. 이 궁전에 한때는 5천명의 권세 있는 귀족이 거주하였고, 기타 5.000명은 그 근방에 살고 있었다. 1789년 10월 6일7월14일에 발발한 프랑스 시민혁명군이 베르사이유 궁을 점령하고 왕족을 파리로 데리고 가면서 이 왕궁은 절대왕조의 멸망과 함께 쓸쓸한 역사를 기록하기도 하였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 베르사이유 궁에서 국제적인 조약과 선언 등이 있었다. 1783년 미국전쟁의 종전조약서명, 1871년 1월 18일 독일제국선언식, 1919년 6월 28일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서명이 왕궁 내에서 가장 화려한 73m의 길이, 17개의 대형 창문으로 설립된 거울의 거실에서 프랑스와 연합국 그리고 독일 사이에 체결되기도 하였다. 1871년 루이필립(Louis Philippe)왕이 국가박물관으로 선언하여 일반인들에게 개방된 왕궁은 루이14, 15, 16세가 휴식 및 왕비들의 전원생활을 위한 별궁인 트리아뇽(Trianons)궁과 광대한 정원을 포함하여 오늘날 파리를 찾는 모든 여행자들이 꼭 한번 방문하는 필수적이고 유명한 관광코스로 되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전의 정세와 발단

1788년에 프랑스는 여전히 유럽에서 제일 강대한 국가였으며 인구는 유럽 총인구의 16%가 되는 2천6백만이었는데 비해 대영제국은 1천 5백만, 프러시아는 8백만에 불과했다. 프랑스는 때마침 아메리카 독립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육해군이 어느 때보다도 강력하였다. 또한 프랑스의 철학가와 예술가의 영향이 전 유럽에 파급되고 있었다. 따라서 1789년에 프랑스 왕정은 대외관계에 있어 아무 문제점도 없었다. 국내에서도 왕정이 국민을 강압하고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았으며 법적으로는 절대왕정이었으나 자유주의자들이 15년간이나 집권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내는 소란으로 동요되고 정부는 신용을 상실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무엇보다도 우선 왕국의 성문화(成文化)가 되어 있지 않던 구헌법이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국민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전제정치가 아니라 귀족들의 계급적 편견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폭동에 의하여 시작된 것이 아니라 목가적인 분위기로부터 발단되었다. 1789년 1월 1일에 네케르가 국왕이 삼부회를 소집하고 제3신분(평민)의 정원을 배가하도록 윤허했다고 발표하자 이 소식은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왕의 인덕에 감격하여 모두가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왕정체제에 대한 충성이 변한 것 같이 보이지도 않았던 것이다. “국왕이 우리에게 불만을 호소할 자유를 주셨다. 얼마나 귀중한 은덕인가 인자하신 관심을 가지고 국민에게 하문하시려는 국왕폐하께 무엇이라고 감사를 드려야 할 것인가!”

그러나 만일 왕이 삼부회를 소집하지 않았더라면 프랑스 혁명은 적어도 그처럼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루이 16세가 달리 해결할 도리가 없었던 정부의 위기에 있었다. 인민이 최초의 주동자는 아니었다. 부르주아지는 법적인 대변인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농민이나 노동자 계급은 더욱 그러하였다. 이와 반대로 특권계급은 그러한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즉 성직자는 성직자 회의를, 그리고 귀족은 고등법원과 지방 삼부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왕에게 강제력을 가진 것은 바로 이들이었다.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그것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혁명의 제1막은 1788년 귀족 계급의 승리였다. 귀족계급은 정부의 위기를 이용하여 카페왕조가 그들로부터 정치권력을 그들로부터 빼앗아 간 데 대한 복수를 가하는 동시에 그것을 되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사회적 우월을 보장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던 왕권을 마비시킴으로서 부르주아 혁명에, 이어 도시의 민중혁명, 끝으로 농민 혁명의 길을 열어 주고 스스로는 앙시엥레짐(Ancien Regime : 구제도)의 폐허 속에 매장되어 버렸다.

1789년 10월 6일, 농민폭동의 의미

당시 10월 5일과 6일사이의 농민의 폭동 목표는 무엇이었을까?. 국민회의의 의장인 도피느 지방 출신의 부유한 부르주아 인 무니에로를 의장석으로부터 그리고 왕비 마리 앙뜨와네트(Antoinette)를 왕좌로부터 내쫓기 위하여 베르사이유 궁으로 진격하자는 것이었다. 구실은 국왕에게 가장 충성스럽다는 콜랑드르 지방연대가 왕궁에 도착했을 때 친위병들이 그들에게 향연을 베풀면서 왕비의 표지인 흑색 모장(帽章)을 달았다는 것이었다. 악대가 그들을 군악으로 사기를 돋우고 반혁명적인 영광된 공기가 궁정에 충만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이에 격분한 수천 명의 부녀자가 베르사이유로 진격하기 위하여 소집되었고, 궁정이 이러한 여자행렬에 발포를 명령하는 일은 없으리라고 짐작하고 스커트를 입은 남자들이 여자들 사이에 섞였다. 얼마 후에 궁전은 침공을 당하고 수명의 병사가 살해되었다. 국왕은 파리에 머물러 있을 것이며 국민의회도 파리로 따라오겠다는 협약이 성립되었다. 사람들은 이제 겨우 혁명이 시작된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러한 민중의 생각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8월의 법령에 대한 승인을 확보함으로써 10월 폭동은 앙시앵레짐의 종말을 결정지었으며, 이제 아무것도 그것을 다시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적어도 1789년의 혁명은 끝을 맺었으며, 이어서 왕조체제에서 공화정체제의 완성을 성공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혁명이란 지배계급의 교체를 말하는 것이며, 과도한 부정, 빈곤과 재난, 전쟁의 패배 등에 기인되는 지배자의 몰락에 의하여 야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유력한 통치계급이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상실하고 직책을 포기하는 것이 계기가 되어 발생하는 혁명도 있다. 루이 16세의 우유부단한 개혁정치의 실패, 경제적위기, 혹독한 세금수탈제도, 왕실의 지나친 사치, 귀족들의 평민들에 대한 지나친 신분차별대우 등이 10월 6일의 농민폭동이 일어나게 된 원인으로 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정자와 그 주위의 정치세력이 위민정신(爲民精神)을 망각하고 국가의 주인인 백성들을 홀대하고, 변화무쌍한 국제정세의 흐름에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하면 그 정부나 나라는 멸망하였다는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농민폭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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