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 없는 대화도 있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뜻
상대 없는 대화도 있는가
▲ 문재인 대통령이 10월 11일 오후 청와대 본관 백악실에서 북핵 문제 해법 모색차 미국을 방문한국회 동북아 평화협력 의원 외교단 소속 의원들을 면담하고 있다. <사진@청와대>

문재인 대통령의 뜻은 확고하다. “한반도에서 전쟁은 결코 용납할 수 없으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막겠다”는 것이다. 문정인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는 “동맹이 깨지더라도 전쟁은 안 된다”고 거들고 있다. 여당도 추임새를 넣는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4일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북한과 미국에 특사를 파견하자. 우리 정부가 북·미간 대화를 적극적으로 촉구하고 남북 대화의 채널을 가동시키기 위한 전 방위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진곤 칼럼 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이코노미톡뉴스(이톡뉴스)] 이와 때를 같이 해서 국회 동북아평화협력 의원외교단 소속 국민의 당 정동영, 민주당 이석현·김두관, 바른정당 정병국의원이 2~5일 미국을 방문해서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절대로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왔다”고 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물론 대통령이 이들을 위해 청와대에서 성과자랑을 할 기회를 만들어줬다. 미국의 국무부와 의회 인사들은 “선제공격은 없다”고 했고, 전술핵 재배치에 대해서는 전혀 호응하지 않더라고 전했다.

우리만 결심하면 전쟁 없어지나

이 같은 정부 여당의 태도와 주장, 그리고 활동을 가장 반길 사람은 김정은이다. 일은 자기가 저지르고 뒷감당은 대한민국의 정권측이 해주고 있는 셈 아닌가. 이런 정부 여당의 ‘북한핵 대응’은 과거에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이들의 생각은 철저히 굳어져서 조금의 변화도 스스로들 용납하지 않을 듯하다. 말하자면 확증편향 같은 것이겠다. 
“평화적 방법이 안 된다면 도대체 어쩌자는 것이냐,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이냐?”

이들의 이 말 한마디에 대북 압박·제재론자들은 할 말을 잊게 된다. 자칫하다가 북한식 표현으로 ‘호전광’ 낙인이 찍힐 수도 있으니까. 북한이 핵실험을 하고 미사일을 쏴 올리는 와중에도 이들의 언행은 한결 같다. 
북한에 대한 ‘호의 표하기’에도 지치는 기색이 없다. ‘인구조사 비용 600만 달러’, ‘인도적 지원 800만 달러’ 운을 뗐다가 여론이 격화되고 미국의 반응이 나빠지는 듯하자 슬그머니 거둬들였다. 그렇다고 포기하는 것 같지는 않고 어떻게 해서든 명분 세워서 보내줄 방안을 찾는데 골몰하는 인상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이 정도로 정성을 쏟는데 북한 당국도 좀 이해를 하고 호응해 오면 오죽 좋으랴. 대화할 의향만 내비쳐도 문 대통령의 체면을 크게 세워줄 것이 아닌가. 나아가 트럼프의 대북 강경정책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요인쯤으로 몰릴 것이고, 우리의 대북 지원이 명분을 얻을 텐데 북한은 시종일관 비난에다 욕설까지 퍼부어댄다. 때로는 조롱도 하고….

까닭은 분명하다. 북한 체제로서는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걸음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50년대부터 시작됐을 핵개발 시도, 8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했을 핵무장 본격 추진 과정을 거쳐 지금 막 완성단계에 이르렀다. 단지 한 걸음이 남았을 뿐인데 그걸 포기하려 할 리가 있을까. 
문 대통령의 대화 주문에 호응한다 하더라도 북한으로서는 얻을 게 별로 없다. 경제적 지원에 흔들릴 김정은이 아니다. 체제 보장은 한국은 물론이려니와 미국도 약속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건 북한 내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핵무장을 완료하고, 국제사회가 이를 인정하게 되면 미국과 대등한 협상 상대가 되고 한국에 대해서는 상국(上國)의 지위를 확고히 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도 도전세력의 혼을 빼놓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 직전 단계에 와 있다고 공언하고 있는 북한 집단이 핵 포기를 전제로 한 대화에 응할 까닭이 없지 않겠는가.
그런데도 문 대통령과 정부 여당의 유력자들은 ‘대화’에 나라의 명운까지 걸 태세다. 대화는 상대가 있어야 성립된다. 북한은 관심조차 안 보인다. 응할 상대도 없는 대화를 유일한 해결책으로 주장하는 우리 정부의 속내는 도대체 무엇인가. 

북한 정권은 애족집단 아니다

대화를 주장하려면 그 기대성과도 제시해야 한다. 대화만 성사되면 북한은 핵동결, 나아가 핵포기 결심을 하게 될까? 그런 확신도 없이 ‘대화’ 주문으로 시간을 보내면 그 동안 북한도 일 손 놓고 기다려 줄까? 하루가 가면 그만큼 북한의 핵무장 완성도는 높아진다. 핵실험, 미사일 발사 때만 화들짝하다가 금방 긴장을 늦춰 버리는 이런 대응자세야 말로 북한 김정은의 자신감을 한껏 부풀려주는 태도가 아닐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늘어난다. 우리만 결심하고 맹세하면 전쟁 위험은 없어질까? 미국의 손발을 묶어 버리면 한반도에는 평화가 정착될까? 북한 김정은 집단은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평화애호세력인가? 그게 아니라면 평화를 주장하며 우리의 경계태세를 이완시키고 한미동맹에 위해를 끼치는 사람들에게 응분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 ‘이적행위’란 바로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라고 여겨왔는데 오해인가?

대북 선전이나 압박 수단까지도 지레 내던져 버리고 오직 상대의 호의에 호소하는 이 태도가 정말 국가 안보를 책임진 사람들의 것인가. 뜻을 모아 북한 호전집단에 공동으로 맞서기 보다는 동맹의 일방에 대해 사사건건 시비 걸듯 하면서 북한의 모험주의를 부추길 수 있는 신호를 지속적으로 주는 것이 대한민국 안보 사령탑의 전략이라는 것인가. 
북한은 애족적인 집단이 아니다. 북한 동포 대부분은 폭정의 희생자들일 뿐이다. 그리고 북한 지배체제는 애족주의자들이 아니라 수령유일지배체제 광신자들이다. 정부가 대화와 협상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북한 지배집단 어느 누구에게서 자기희생적 애족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인가.  

문 대통령이 9월 21일 유엔총회 연설에서 ‘레이건의 평화’를 높이 사는 연설을 했으니 레이건의 말로 평화를 이야기 하자. 레이건은 1964년 베리 골드워터 공화당 대선 후보를 위한 찬조연설에 나서서 이렇게 말했다. 
“전쟁과 평화의 중간을 고른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다만 금방 평화를 얻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있습니다. 바로 항복하는 겁니다. 물론 항복 이외의 수단은 위험이 따릅니다. 그러나 역사는 유화정책이야말로 더 큰 위험을 가져온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소련의 흐루시쵸프는 말했습니다. ‘미국은 냉전을 이기지 못하고 후퇴하고 있다. 언젠가 때가 되면 미국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도덕적으로, 경제적으로 나약하기 때문이다.’ 흐루시쵸프가 이렇게 생각한 것은 ‘무슨 대가를 치러도 평화가 우선이다’라는 우리의 나약한 자세 때문입니다. 혹은 ‘죽는 것보단 빨갱이로 사는 게 낫다’라는 생각 때문이고요.”

북한에 기대할 수 있는 게 뭔가

절대로 전쟁은 안 된다, 어떤 수단을 쓰더라도 막겠다고 한다면 북한의 전쟁 도발을 제어할 방법이 따로 있다는 것일까? 무저항비폭력운동이라도 벌이겠다는 뜻일까? 한국 정부가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결코 용인할 수 없다”고 하면 북한이 겁을 먹고 전쟁을 포기할까? 그렇게 된다고 치자. 그런데 만들어 둔 핵무기와 미사일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걸 용도폐기하거나 최소한 묶어두게 할 수단이 있다는 것인가. 
한사코 대화를 고집하고 전작권 조기 환수 의지를 과시하면서도 정작 이렇다 할 복안은 갖지 못한 듯한 문 대통령의 언급 때문에 더 기가 막힌다. 그는 지난달 10일 5부 요인 초청 청와대 오찬 자리에서 “안보 위기에 대해 우리가 주도적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9월 27일 여야 정당 대표 초청 대화에서는 “우리가 주도할 수 없는 여건 속에서 평화를 위협받고 있다”고 토로한 바 있다. 7월 11일 국무회의에서는 “현실적으로 (북한 핵 문제는)우리에게 해결할 힘이 있지 않고 우리에게 합의를 이끌어낼 힘도 없다”며 무력감을 드러냈었다. 그러면서도 ‘대화’만을 고집한다. 도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북한에 대해 한 마디 심한 말을 할 때마다 한국 정부에 의해 태클이 걸리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13일 백악관에서 가진 대이란 연설에서 오바마 행정부 때 타결된 ‘이란 핵협정(ICPOA: 포괄적 공동계획)’ 이행에 대한 ‘인증철회(decertification)’를 선언했다. 그는 이란 핵협정을 ‘가장 일방적이고 최악인 거래’로 규정하고 “기껏해야 이란의 핵개발 능력을 잠시 지연시키는 협상은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트럼프는 이날 “이란이 북한과 거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북한 사례에서 보듯, 위협은 방치할수록 더욱 심각해진다”고 했다. 이 말에서 트럼프가 대화를 통해 북한을 설득할 수 있다는 기대는 갖지 않았음을 재확인할 수 있다.

▲ 이진곤(정치학박사, 경희대 정외과 객원교수, 국민일보 전 주필, 전 논설고문)

그래서 더욱 한국 정부의 대북 정책에 대한 의문이 꼬리를 문다.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의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것일까,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적의 어떤 행동이나 요구도 응해야 하는 것일까? 외교적 방법을 통한 평화적 해결에 매달려온 결과가 북한의 수소탄 및 ICBM 성공이다. 그래도 군사적 옵션은 절대 안 된다고만 말할 것인가. 핵무기 완성 후 북한의 위협은 무엇으로 막아낼 것인가. 그 때도 대화만 말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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